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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3)화 (63/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3화

    책을 낭독하는 데도 순서가 있다. 나이가 많은 순부터 적은 순, 지위가 높은 순에서 낮은 순으로 진행하는 게 규칙이었다. 가장 마지막은 주최자의 낭독으로 끝나는데, 그래야 초대받은 사람들이 쉽게 떠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건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한 자리에 곧게 앉아 있으려니 어깨가 뻐근했다. 손님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인지, 쉬는 시간마다 일어나 잡담을 나누곤 했다.

    개중에는 멀리 떨어져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남녀도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인 연인 관계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 여기까지 와서 티를 내고 싶을까.’

    그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관한 글귀를 읽었는데, 읽으면서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절절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 둘이 어떤 사이인지 알아챈 것 같았지만,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 외에는 대체로 무난한 책들이었다.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상 깊었던 책 속 구절을 읽은 뒤, 짧게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고 앉는 게 전부였기 때문에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내 차례가 되었다.

    “벌써 마지막이네요. 제가 소개해 드릴 책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최대한 낭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 내렸다. 부부간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구절이었다.

    “불신 속에는 행복이 없다는 말을 어린 부부들은 가슴 속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것이다.”

    책을 덮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부간의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 주는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답니다. 비록 잠시 오해가 있더라도 노력하면 마음이 통할 수 있다는 것도요.”

    말을 마치고 일어서자 의례적인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손님들을 보며 웃어 보였다.

    “독서 낭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편하게 쉬었다 가세요. 오늘 즐거우셨기를 바라요.”

    자리에 앉자, 다른 사람들도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게 보였다. 주변을 힐끔거리던 몇 사람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가까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신전에서 마주쳤던 귀족들이었다.

    “오늘 모임 정말 재미있었어요.”

    “좋은 책을 많이 알아 가네요.”

    “즐거우셨다니 다행이에요.”

    적당히 예의를 차린 말이 끝나자, 그들이 정말 묻고 싶었던 본론이 튀어나왔다.

    “카지노에서 모임을 여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나쁜 뜻이 아니라, 독서 모임을 집 밖에서 여는 일은 흔하지 않으니까요. 독특하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티가 나게 웃는 얼굴을 꾸며 내며 대꾸했다.

    “원래는 저택에서 하려고 했는데, 일이 좀 생겨서요.”

    “일이요?”

    어설프게 호기심을 자극하자, 금방 누군가가 물음을 던졌다. 나는 당황한 척 입가를 가렸다.

    ‘아예 얼버무리는 건 얼마든 할 수 있는데, 어설프게 티 내려고 하니 더 어려운 것 같네.’

    눈을 내리깔고 애써 슬픔을 참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지긋하게 깨물었다. 그러곤 짧게 한숨을 쉬고, 난처한 티를 내며 머뭇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게…… 으음, 아니에요.”

    입을 열다가 금세 다물자, 그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먹이를 발견한 짐승처럼 눈이 반짝였다.

    “부인, 무슨 일이 있었나요?”

    “편하게 이야기해 봐요. 우리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그들은 나를 열심히 구슬렸다. 내가 등 뒤를 힐끔거리자 테오도르가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게, 백작님께서…….”

    나는 최대한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파티를 열면서 돈을 낭비하는 게 불편하다고 하셔서요. 물론 제가 요즘 파티를 몇 번 열기는 했지만…….”

    애써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이내 안타까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아…….”

    “세상에…….”

    “부끄러운 이야기죠. 전부 제가 남편의 신뢰를 얻지 못해서 그런 건데…….”

    나는 정말 부끄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탄식과 함께 위로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들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 뒤, 명백하게 인위적으로 분위기를 바꾸려고 시도했다.

    “너무 사소한 이야기를 했지요? 아, 그렇지, 아까 말씀하신 소설에 대해 더 듣고 싶었던 참이었어요.”

    내가 노린 것은 백작가의 재정 상태에 대한 소문이다. 부인에게 파티를 열지 말라고 할 정도로 돈이 모자란다는 인상을 주면 그의 사업이 더욱 난항을 겪을 테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부인이 직접 말한다면 신빙성은 더욱 높아지겠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서로 의미 없는 잡담을 나누다가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주변에서 소곤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백작이 선박 권리서를 파는 걸 본 사람이 있어요.”

    “카지노에 매일 붙어 있더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솔깃한 말 또한 들을 수 있었다.

    “백작에게 투자한 돈을 회수해야겠군요.”

    * * *

    독서 모임이 끝나고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백작에게 편지가 쏟아졌다.

    “백작님께서 집사님에게 화를 내고 계셨어요, 마님.”

    “뭐라고 하시던?”

    “일을 어떻게 했길래 투자를 회수하겠다는 말이 나오냐고 고함을 치셨어요. 얼굴에 편지도 던지시고요. 혹시나 해서 떨어진 편지 몇 통을…….”

    벨은 백작의 편지를 빼돌릴 수 있었던 건 리자에게 배운 손기술 덕분이라며 뿌듯하게 말했다. 귀여운 행동에 피식 웃으며 편지를 받아 훑어보았다.

    백작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배를 띄운 지 얼마 안 된 참이다. 먼 대륙의 특산품들을 싣고 와 비싸게 파는 사업에 투자한 것이다. 배가 돌아와야 이윤을 내고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줄 수 있는데, 벌써 투자금을 회수하게 되면 파산이나 다름없었다.

    ‘생각보다 더 큰 수확이야.’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렸다. 한 명 한 명의 투자 금액은 그리 크지 않더라도 여러 명이 몰려와 동시에 투자금을 되찾으려고 하면 어느 사업이든지 큰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의 백작으로서는 그 요구를 단번에 들어주기 어려울 것이다. 현금은 바닥난 지 오래였고, 당장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자잘한 것들 또한 모조리 카지노에 팔아 치웠으니 말이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곳은 인터넷도 없으면서 소문이 참 빠르다니까.’

    나는 이전에 피데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수도의 카페에 앉아 있기만 하면 온갖 이야기를 다 들을 수 있다 했던가. 그때는 허풍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경험해 보니 놀라울 정도다.

    “벨, 편지는 다시 잘 갖다 놓고, 회수 요청한 투자자랑 투자처 듣는 대로 정리해서 따로 보관해 줘.”

    “네.”

    벨은 내가 건네준 편지를 가지고 방을 나섰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멀뚱멀뚱 나를 보는 리자가 눈에 밟혔다. 빤히 보는 걸 들켜놓고도 눈을 피하지 않길래 핀잔을 주었다.

    “뭘 보니?”

    “마님께선…… 늘 어려운 말만 쓰시는 것 같아서,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리자가 맹랑하게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비아냥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애초에 리자는 누군가를 비꼬아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부류였다.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척추에서 그대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내 표정을 살피려고 애썼다. 평소처럼 귓불 아래로 금발이 흘러내렸다. 나 또한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자, 이전에 느꼈던 어색함의 원인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뭐가 달라졌는지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 리자의 귀걸이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선물한 귀걸이를 빼는 하녀들은 종종 봤지만, 리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귀걸이를 착용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나는 내 귓불을 톡톡 두드렸다.

    “잃어버렸니?”

    리자는 고개를 살랑살랑 저었다.

    “백작님께서 가져가셨어요.”

    “백작님이?”

    내 물음에 그녀가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급하게 쓸 일이 있으시다고 하셔서 드렸어요.”

    허전한 귓불을 더듬는 손가락이 애잔했다. 나는 그 귀걸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돈을 주지 않자 백작이 리자에게까지 손을 뻗은 것이다. 장부를 확인하면 귀걸이를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수고를 들여 그녀에게 액세서리를 되찾아 줄 생각은 없었다.

    ‘알아서 하라지.’

    나는 심드렁하게 리자를 바라보았다. 시무룩했던 것도 잠시, 그녀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방긋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이 목걸이가 남아 있는걸요!”

    백작이 선물해 줬음이 분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뻔뻔하게 선물한 물건을 빼앗아 간 사람이 두 번은 못 할까. 백작은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 리자의 목걸이를 빼앗아 갈 것이 분명했다.

    ‘귀걸이를 뺏기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그리고 내 생각대로, 리자가 해맑게 자랑하던 목걸이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백작의 손에 들어갔다. 그걸 알게 된 건, 백작이 차를 마시자고 권하며 내게 목걸이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좋아할 거 같아서 준비했소.”

    그는 부인에게 정부의 목걸이를 내밀며 은근슬쩍 가지고 있는 현금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다. 백작은 세상에서 가장 얼굴 가죽이 두꺼운 남자일 것이다.

    “다른 게 아니라, 지금 급하게 투자금을 회수하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오. 정말 기다릴 줄도 모르는 작자들이라니까.”

    그는 투덜거리며 내게 투자자들에게 돌려줄 돈을 요구했다.

    “당신이 조금만 돈을 융통해 주면 돼. 물론 지금 당장 그만한 돈을 내놓긴 힘들겠지. 하나 소공작에게 빌릴 수는 있잖소.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게 우선이니 말이오.”

    헛소리를 무시하려고 시선을 내리자, 티스푼에 리자의 창백한 얼굴이 비쳤다. 그녀의 눈은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꽂혀 있었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제가 조금 도움을 드린다고 해서 백작님의 일이 해결될 것 같지는 않군요.”

    “뭐?”

    백작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좋아요. 지원해 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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