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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2)화 (62/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2화

벨이 내 드레스를 수선하는 동안, 백작은 옷을 새로 맞추기로 했다. 살이 빠져 기존에 입던 옷이 전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백작에게 기존에 있던 옷을 수선해 입으라고 하고 싶었다.

사실 그러려고 세탁 하녀들에게 수선을 맡겼으나 옷을 다 뜯어야 할 것 같다는 하녀들의 말에 입을 다물기로 했다.

왕의 생일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한 달간 카지노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아틀라스와 만나지 못한 백작은 한동안 아편을 피울 수 없었다. 그는 매일 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독한 술을 찾기 시작했다. 아편을 단기간에 많이 접하다 보니 지독한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듯했다.

어쨌거나 백작이 카지노에 가지 않으니 집사가 한숨 돌렸겠거니 했는데, 생각과 달리 그 불똥이 내게 튀었다. 백작은 새 옷을 맞추고는 뻔뻔하게 내게 옷값을 요구했다. 당장 현금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단번에 거절하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짜증스럽게 뱉었다.

“당신은 변했어.”

“그런가요?”

“예전에는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깝지 않다며 뭐든 건네줬는데, 이제는 수표에 사인하기도 싫어하니 말이오.”

사랑이 식었냐고 칭얼거리는 그의 입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뭐라는 거야. 나는 최대한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상대가 변하지 않고 언제나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오만이죠.”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백작이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설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생겼소?”

감정이 격양된 그의 목소리는 꺼끌꺼끌했고, 당장이라도 기침을 토해 낼 것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려다가 얼굴을 굳혔다. 흐리멍덩한 시선은 내가 아니라 내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백작은 테오도르를 죽일 듯 노려보았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고개를 끄덕인다면 백작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백작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니 돈줄이 사라지는 것에 큰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돈을 지급하기를 거부한 이유를 찾으려고 필사적인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까지 테오도르를 밀어낸 것도 모두 이런 의심을 받고 싶지 않아서였지 않은가. 그러나 생각처럼 쉽게 고개를 저어 부정할 수는 없었다. 묵묵히 나를 지키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따끔거릴 정도로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저 이전과 같지 않다고만 말씀드린 것뿐이에요.”

나는 한숨을 쉬며 수표에 서명했다. 옷값을 지급한 건, 불필요한 신경전을 이어 가고 싶지 않아서였으나, 백작의 생각은 영 달랐던 모양이다.

그는 이후로도 테오도르를 계속 걸고넘어졌다. 백작의 시비가 절정에 달한 것은 초대받은 모임에 가기 위해 준비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방문을 두드리더니, 문이 열리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또 어디를 가려고?”

“버너 후작님의 낭독회에 초대받았어요.”

“사내가 많은 곳도 아니고 여자들끼리 모이는 시시한 모임에 꼭 기사를 대동해야 하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백작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는 말을 이었다.

“외간 남자와 단둘이 외출이라니. 허락할 수 없소.”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몰라 순간 말문이 막혔다. 테오도르가 이전부터 내 호위를 맡고 있다는 것은 백작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백작이 내 행동을 통제할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아직도 내가 이전의 카를라와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뺨이 움푹 들어간 백작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이젠 참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계속 참고 있었지?’

빼앗긴 지참금도 대부분 되찾았겠다, 여차하면 받아 줄 가족도 있겠다, 더는 백작의 말과 행동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목을 빳빳하게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요?”

“뭐?”

백작은 듣지 못할 것을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나는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말을 되풀이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요? 폐하께서 직접 내린 호위 기사입니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폐하께 말씀하셔야죠.”

권력이란 얼마나 편리한 것인지. 나는 왕을 들먹이며 백작을 쏘아붙였다. 그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식은땀만 훔치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군!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오. 갑자기 저택에 현금이 부족해질 이유가 뭐가 있겠어?”

뒤로 물러서 있던 리자와 벨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자 백작은 발을 구르며 내게 다가왔다.

“내 눈은 못 속여. 당신이 저 기사한테 돈을 바치고 있던 것 아니오?”

“그러지 않았어요.”

그는 검지를 내 얼굴에 바짝 들이밀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웃었다. 그는 점점 더 험한 목소리로 나를 몰아세웠다.

“그렇지 않으면 저 남자가 당신처럼 못생긴 여자를 감싸고 도는 이유가 뭐겠소?”

“이 손 치워요.”

백작에게서는 아편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어 도무지 정상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백작은 뒷걸음질 치는 나를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솔직히 말하는 게 좋을 거요.”

“그런 적 없다고 말했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테오도르와 나 사이에는 어떠한 육체적 교류도 없었다. 그러나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 좋아. 그렇게 시치미를 떼겠다 이거군.”

그는 손가락을 거두고 몸을 뒤로 물렸다. 백작은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는데, 뺨이 뒤틀려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앞으로 저택에 사람을 초대하는 건 금지요.”

갑작스러운 말에 눈만 깜빡이자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어깨를 폈다. 모임을 주최하며 이제야 진짜 내 편을 만들어 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작은 훈계하듯 눈을 부라렸다.

“매일 파티니 뭐니 하며 흥청망청 쓰니 돈이 부족해지는 것 아니오! 집사에게 말해 둘 테니 파티는 꿈도 꾸지 마시오.”

그에게 반박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저택은 백작의 소유였고, 그가 못된 마음을 먹고 모임을 훼방 놓거나 손님에게 무례하게 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하죠. 이제 하고 싶으신 말이 끝나셨으면 나가 주시죠. 한참 외출 준비를 하던 중이라.”

나는 단호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백작은 순순히 걸음을 떼었지만 마지막까지 속을 긁는 소리를 뱉었다.

“앞으로 두고 보겠소.”

두고 보자는 사람이 제일 무섭지 않은 법이었다. 나는 리자에게 방문 앞에 소금을 뿌리라고 시켰다. 그녀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면서도 시키는 대로 주방에서 굵은 소금을 얻어 와 복도에 뿌렸다.

* * *

저택에 손님을 부를 수 없다고 모임을 못 여는 건 아니었다. 나는 카지노에서 모임을 열기로 했다. 정확히는 카지노의 식당을 빌려 독서 모임을 열기로 했다.

왕의 생일 연회를 준비하기 위한 실내 장식 공사가 한창이라 원칙적으로는 식당과 숙소 또한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놀고 있는 공간을 쓰고 싶다는 내 부탁에 왕은 흔쾌히 허락을 내렸다.

식당이라고는 해도 정갈하게 꾸며 놓은 곳이라 테이블과 의자를 새로 배치하자 평범한 응접실처럼 보였다.

‘언제 이런 곳에서 독서 모임을 해 보겠어.’

오밀조밀 모여 책을 읽을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다과회 같은 분위기를 더하려고 한입에 먹기 쉬운 작은 과자들을 준비하고, 여분의 책을 준비했다.

독서 모임은 낭독회보다 더 가벼운 분위기였다. 낭독회는 한 사람마다 책 한 권을 읽지만, 독서 모임은 자신이 준비한 책의 몇 구절만 읽기 때문에 중간중간 잡담을 할 수가 있었다.

꼭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듣기로는 선박 투자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다가 분위기가 가라앉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준비했다. 그리고 초대장을 받을 사람들의 절반은 입이 가벼운 사람으로 채워 놓았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백작 부인.”

“어서 오세요.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나는 입구에 서서 사람들을 맞으며 자리를 정돈했다. 손님들의 손에는 각각 크기가 다른 책들이 들려 있었다. 나도 준비한 책을 꺼내자, 손님 몇 명이 다가왔다.

“처음 보는 책이네요. 어떤 내용인지 들을 수 있을까요?”

“믿음에 관한 이야기예요. 요즘 제게 참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서요.”

나는 슬그머니 책 표지를 들어 보였다. 서재를 뒤져 찾아낸 책은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제목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낡아 있었다.

“어머나, 고풍스러운 책이네요.”

“그렇죠? 표지가 낡기는 했지만, 안의 내용은 정말 알차답니다.”

나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책의 내용을 설명했다. 믿음은 신과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평범한 자기 계발서와 다름없었지만, 앞으로 내가 할 말들을 위해 애써 고른 책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책을 가지고 왔는지 물었다.

“저는 시집을 가져왔답니다. 좋아하는 시를 다른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요.”

평범하게는 시집이나 신앙에 관한 책부터 로맨스 소설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개중에는 자신이 쓴 책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다.

“왕자가 주인공인 로맨스 소설이에요. 부끄럽지만 정말 열심히 썼답니다.”

“정말 재미있을 것 같아요. 얼른 다른 분들의 책도 소개받고 싶네요.”

나는 적당히 대꾸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주변을 훑어보자 모두 준비가 된 것처럼 책을 들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손님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될 일이라, 방긋 웃으며 초대객들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럼 독서 모임을 시작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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