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1화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여기서 춤을 추자는 말인가?’
리자와 벨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방에 들어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자 테오도르가 머쓱하게 목덜미를 매만지며 덧붙였다.
“폐하의 생일 연회에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카를라 님께 춤 신청을 해도 되겠습니까?”
테오도르가 이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거리를 좁혀 올 때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남자가 왜 내게 이러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러나 그의 제안은 쉽게 뿌리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나는 방금까지 혀끝을 적시던 달콤한 시간을 떠올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술에 취한 머리가 빙빙 돌았다. 테오도르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왕의 생일 연회같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흠 잡힐 일은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우습게도 생각과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눈이 적을 때라면…….”
나도 모르게 나온 말에 엇, 하고 입을 가렸지만, 이미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사르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나는 무표정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꼭 무언가에 홀린 것 같았다. 벨과 리자가 따라 들어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걸 도왔다.
“마님, 물을 가져올까요?”
리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평소 느슨하게 묶어 뺨 아래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귓가가 허전해 보였다.
‘뭐지? 뭔가 달라진 것 같은데.’
잠시 리자를 훑어보았지만,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술에 취해 평소랑 다르게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며 대충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둘 다 들어가서 쉬어. 오늘 수고 많았어.”
“네, 마님!”
“안녕히 주무세요.”
푹신한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지치긴 했지만 정말 즐거운 하루였다. 입에서 저절로 딴딴딴, 하고 박자를 맞추는 소리가 나왔다.
‘다른 사람들이랑 좀 더 친해진 기분이 들어.’
눈을 감고도 웃고 있던 이본과 딱딱하게 굳은 피데스의 얼굴을 쉽게 그려 낼 수 있었다.
‘테오도르와도 가까워진 것 같고…….’
그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테오도르의 얼굴이었다. 그의 뜨거운 시선은 지우려고 하면 할수록 선명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다른 생각을 하자.’
테오도르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써 다른 걸 생각해도 계속 그의 다정한 목소리와 눈빛이 떠올랐다.
‘미치겠네!’
나는 이불을 머리 위로 덮어쓰고 눈을 꽉 감았다. 그러나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피곤이 밀려와 잠에 빠질 때까지 테오도르는 계속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 * *
아침이 되자 어젯밤의 일들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이 굴러가는 동안 나는 테오도르를 최대한 보지 않으려 애써야 했다.
“마님, 초대장은 화장대 위에 놓아둘까요?”
“그래.”
초대장은 계속 쌓였고, 나는 적당히 몇 개의 파티를 골라 참석했다. 그리고 그중 친해질 만한 사람들을 저택에 초대하고, 다시 초대받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 정도로 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동안 백작은 양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돈을 요구했다. 당연히 거절했다. 내가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자, 백작은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안 오면 나야 좋지.’
어차피 부부가 함께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침실이나 방도 따로 썼으며, 재산도 완전히 따로 관리했다. 아들의 것은 아들의 것, 딸의 것은 딸의 것이라는 관용구가 있을 정도였으니까.
카를라처럼 돈이 필요하다는 남편에게 자진하여 재산을 바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철저하게 자신의 몫을 지켰다.
파티도 마찬가지라, 부인이 여는 파티에 꼭 남편이 참여해야 할 필요는 없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은 따로 참석하여 불륜 상대와 밀회를 즐기곤 했다.
그러니 백작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불이익을 당할 일은 전혀 없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초대장을 훑으며 다음에는 어느 곳에 얼굴을 비출까를 생각했다. 그때, 금가루가 섞인 봉랍이 눈에 띄었다.
‘아, 드디어 왔네.’
왕이 보낸 초대장이었다. 파티에 참석할 때마다 한 번씩은 입에 오르내리던 ‘왕의 생일’이 다가온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초대장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내게 먼저 왔거나, 아니면 지금쯤 이 초대장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내려놓고 종이 무더기에 가려져 있던 그것을 꺼냈다. 나는 평소처럼 친애하는 카를라로 시작하는 문장을 읽어 내리려 했다. 그러나 이번 초대장에는 전혀 다른 문구가 적혀 있었다.
[친애하는 이카루스 백작, 백작 부인.]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좋든 싫든 카를라와 이카루스 백작은 결혼으로 묶인 관계이기에, 공적인 자리에는 어쩔 수 없이 동행해야 한다. 나는 투덜거리며 초대장을 완전히 펼쳤다. 편지 안에 끼워져 있던 종이가 톡, 하고 무릎 위로 떨어졌다.
떨어진 종이에는 왕의 글씨체로 카지노의 홀을 통째로 빌리고 싶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다시 초대장을 보니 장소가 적혀 있어야 할 칸이 희게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이분도 참 장난을 좋아하신다니까.’
초대장에 참석 여부를 표시하여 돌려보내야 하는 걸 이용한 장난이었다.
‘어차피 카지노 주인은 왕인데, 나한테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나?’
나는 참석하겠다는 표시와 함께 비워진 공간에 카지노의 주소를 적었다.
* * *
한동안 사교계의 인사는 ‘초대장 받으셨어요?’가 되었다. 누가 왕의 파티에 초대받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지가 가장 큰 이야깃거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지금껏 자신이 참석했던 왕의 생일에 대해 늘어놓았는데, 몇 시간 동안 떠들고 나서도 다음날이 되면 다른 이야기가 끝없이 튀어 나왔다.
덕분에 나는 왕이 입었던 옷들의 디자인이나, 그녀가 평균적으로 샴페인을 몇 잔 비웠는지도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이 추려지자 그들의 관심사는 어떤 옷을 입고 갈 것인가로 바뀌었다. 막 사교계에 데뷔하는 어린 청년들뿐만 아니라 나이가 지긋한 노인까지 들뜬 것 같았다.
이본은 너무 튀지 않게 갈색에 가까운 노란 드레스를 입을 생각이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어떤 옷을 입어도 그녀가 눈에 띄지 않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즐거워하는 이본을 위해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난 뭘 입고 가지?’
왕의 생일은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 때쯤이었다. 이곳의 날씨는 계절에 따라 큰 변화가 있지는 않아서 가을이라고 하더라도 그리 춥지 않을 것 같았다.
‘왕과 사이가 돈독해졌다는 걸 명백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자리야. 그러니 이전에 맞췄던 드레스에 선물 받은 흰 숄을 걸쳐야겠다.’
백작과 함께 초대받았으니 옷 색을 맞춰야 했지만, 도통 그를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내 멋대로 정한 후 집사에게 어떤 드레스를 골랐는지 통보했다. 백작에게 맞추는 것 보다 그가 내게 맞추는 게 더 편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옅은 베이지색 드레스는 몇 번 입었던 적이 있는 옷이라 몇 군데를 수선하기로 했다. 이럴 바에야 옷을 새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벨이 오랜만의 수선에 의지를 불태우고 있어 말리기 어려웠다. 나는 미리 옷을 입어 보고 어디를 고칠지 그녀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금색 자수를 놓으면 어떨까요?”
“너무 요란해 보이지 않을까?”
“살짝만 넣으면 차분해 보일 거예요. 성기사님의 제복에도 금장이 있지만, 전혀 과해 보이지 않는걸요.”
벨이 테오도르를 들먹이며 눈을 빛냈다. 어쩌면 그녀는 장부 업무에서 벗어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일지도 모른다. 나는 테오도르의 정갈한 흰 제복을 떠올렸다. 가슴팍과 어깨에 달린 금빛 장식은 우아한 멋이 있었다.
“그래. 그럼 조금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벨은 신이 나서 옷을 어떻게 수선할지에 대해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적당히 과하지 않을 선에서 수선할 방향을 잡으니 이번에는 테오도르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살짝 문을 열어 그를 불렀다.
“테오도르 경.”
“네, 카를라 님.”
“폐하의 파티에 갈 때도 신전에 갈 때랑 같은 제복을 입으시나요?”
내가 묻자 테오도르가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 예.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내 호위로 파티에 참석하게 될 테니, 그와 옷을 너무 비슷하게 만드는 건 피하고 싶었다. 이카루스 백작보다 테오도르와 어울리는 드레스를 입으면 호사가의 입에 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고마워요. 드레스 색을 고르는 데 참고하려고 물어봤어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테오도르는 내 말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빛이었으나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가 조금도 위험하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내 심장은 겁을 먹은 것처럼 두근거렸다. 테오도르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물어봐 주셔서 기쁩니다.”
“별게 다 기쁘시군요.”
내 쌀쌀맞은 대꾸에도 그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예. 카를라 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기쁠 겁니다.”
앳된 얼굴에 꽃망울이 터지듯 미소가 번졌다. 아. 누가 그런 표정을 보고도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 입이 멋대로 열렸다.
“테오도르 경은 이미 제게 큰 도움을 주고 계세요.”
그가 등 뒤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진다는 뜻이었으나, 빤히 바라보는 얼굴에 괜히 목소리가 떨렸다.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저는 다시 들어가 보겠어요.”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실을 고르고 있는 벨에게 황급하게 말했다.
“자수는 금색 말고 다른 색이 좋겠어.”
벨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이면서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파란색은 어떠세요?”
“그래. 그렇게 해.”
냉정함을 되찾은 후에야 테오도르의 눈 색이 푸른색이라는 걸 상기해 냈지만, 벨이 이미 작업을 시작한 후였다. 그래서 차마 다른 실을 쓰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