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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0)화 (60/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60화

    주방장이 심혈을 기울인 만찬은 그야말로 예술 작품 같았다. 식탁의 중앙에는 큼직한 칠면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샐러드와 으깬 감자 따위의 음식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디켄터에 담긴 와인과 화병에 꽂힌 장미 몇 송이가 얼핏 허전해 보일 수 있는 식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식탁에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주방장이 칠면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주었다. 후작 부부는 다리를, 나와 피데스는 날개를, 이본은 가슴살을, 미셸 남작은 부드러운 살코기를 골랐다.

    미셸 남작은 손님 중 유일한 젊은 남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식사량이 그리 많지 않았다.

    “여전히 적게 드시는군요.”

    피데스답지 않게 새초롬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녀가 시비를 거는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남작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저는 원래 적게 먹습니다.”

    “그래서야 어떤 파티를 가든 밤늦게까지 춤은 고사하고 자리를 버티기도 힘들 겁니다. 좀 더 드시죠.”

    “그러는 소공작님께서도 평소보다 적게 드시는 것 같은데요.”

    둘의 대화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본과 후작 부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점차 식기 소리가 줄어들었다. 이본은 아예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식단 조절을 하고 있어서요. 폐하의 생일 연회에서는 드레스를 입어야 하니까요. 전 파트너보다 덩치가 크게 보이고 싶지 않거든요.”

    “그렇군요. 어느 분과 함께 가실지 모르겠지만, 상대에 맞춰 굳이 식단을 조절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피데스가 들이대고 미셸 남작이 철벽을 치는 게 틀림없었다. 묘한 신경전을 들으며 나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남작을 바라보았다.

    피데스는 카를라와 닮아 이 세계 미의 기준에 부합하는 외모는 아니지만,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피데스가 말을 수습했다.

    “어, 그러니까, 폐하의 생일이 다가오니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할 것이 있지 않습니까?”

    “확실히 아가씨들이 들뜰 만한 행사예요. 저도 결혼 전에는 왕실 행사가 열리면 설레곤 했거든요.”

    “소공작님께서는 파트너를 정하셨나요?”

    후작 부부와 이본의 얼굴에 장난기가 서렸다. 셋 다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나도 조금 흥미가 있었다. 능청을 떠는 데 선수인 동생의 연애를 눈앞에서 보다니. 남이 연애하는 게 무어라고 나까지 가슴이 콩닥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피데스는 미셸 남작을 슬쩍 흘겨보고는 말했다.

    “글쎄요.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중입니다.”

    “미셸 남작님께선 파트너가 있으신가요?”

    이본이 슬쩍 끼어들어 묻자 남작은 작게 고개를 저으며 아직입니다, 하고 답했다.

    버너 후작은 옳다구나 싶었는지 둘을 부추겼다.

    “그럼 두 분이 함께 가시는 건 어떨까요? 잘 어울리는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신앙심이 깊은 젊은이들이 짝을 지어 어울리는 모습은 언제나 늙은이를 흐뭇하게 한답니다.”

    피데스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미셸 남작의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는 식기를 든 그대로 굳어 있다가 피데스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뺨을 붉혔다.

    ‘어?’

    그건 어디서 많이 보던 표정이었다.

    “너무 놀리지 말아 주십시오. 미셸 남작은 숙맥이라 이런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하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피데스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남작은 피데스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반짝거리는 눈빛이 그의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미셸 남작도 피데스를 꽤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

    “소공작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는 좋습니다.”

    그는 덤덤하게 말을 뱉었으나 바짝 긴장한 것 같았다. 피데스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남작은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계속해서 와인을 들이켰다.

    마침내 그녀가 대답했다.

    “늦게까지 춤을 출 건데, 괜찮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들을 지켜보던 이들은 민망해하고 있는 남녀를 위해 흐뭇한 미소를 감추고 다시 잡담을 시작했다. 대화의 주제는 왕의 생일 연회에 관한 것이었는데, 매년 다른 곳에서 열려 장소를 추측하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올해는 어디에서 열릴지 궁금하군요.”

    “얼른 초대장이 왔으면 좋겠어요. 작년에는 신전에서 열렸지요.”

    작년 연회에서 카를라는 얼굴만 비추고 돌아갔다고 한다. 모두 왕과 카를라의 사이가 틀어졌었기 때문임을 알고 있지만, 애써 몸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포장해 주었다.

    “올해는 몸이 많이 좋아졌으니 느긋하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신의 가호로군요.”

    “그렇고말고요.”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승마와 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주 접해 본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모처럼 카지노와 돈이 관련된 일이 아니라 마음이 편했다.

    “우리 때는 쿼드릴만 춰서 왈츠가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요즘은 쿼드릴을 배우지 않는 젊은이들이 많잖아요.”

    “저도 쿼드릴을 춰 본 적이 없습니다. 왈츠부터 배웠거든요.”

    술이 오르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후작 부군이 춤을 추자는 제안을 꺼냈다.

    “그럼 한번 배워 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본은 기꺼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카를라, 괜찮죠?”

    “물론이죠. 그런데 짝이 맞지 않아서…….”

    쿼드릴은 남녀 네 쌍이 추는 춤인데 나와 이본을 포함해도 여섯 명밖에 되지 않아 수가 모자랐다. 내가 말끝을 흐리자 후작 부군이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누구든 금방 배울 수 있으니까요.”

    이본은 춤을 추고 싶었는지, 디저트를 가지고 온 주방장을 끌어들였다.

    “카를라, 주방장이 춤을 출 줄 아나요?”

    “글쎄요. 자네, 춤을 좀 출 줄 아나?”

    “잘 추지는 못합니다만…….”

    “어쨌든 출 줄 안다는 말이죠! 좋네요. 이리 와요!”

    부족한 한 명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데 피데스가 등 뒤를 눈짓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진하게 입을 뗐다.

    “테오도르 경이 끼면 수가 딱 맞겠군.”

    내가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자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모르니 부탁이나 해 보자 싶어 물었다.

    “테오도르 경, 괜찮다면 같이 춤추지 않겠어요?”

    그의 눈이 깜빡이더니 이내 부드럽게 휘어졌다.

    “영광입니다.”

    * * *

    식당이나 응접실은 춤을 추기 적절하지 않아 넓은 홀로 나갔다. 첫 번째 파트너를 누구로 해 줘야 좋을지 고민하는데, 후작 부부가 빠르게 피데스와 미셸 남작을 짝 지어 주었다. 이본은 얼른 주방장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나와 테오도르가 짝이 되었다.

    우리는 마름모꼴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자신의 짝과 마주 보고 절을 해요.”

    후작은 강사처럼 큰 소리로 말하며 남편과 마주 보고 직접 시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고는 바로 뒤돌아 옆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원을 그렸다. 그렇게 몇 가지 행동을 한 후에는 여자가 오른쪽으로 돌아 다른 남성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 된다고 한다.

    “한 곡에 한 번 파트너를 바꿔서 총 네 번 춤을 추는 거예요. 일단 시작해 볼까요?”

    나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는데, 거리가 가까워 그런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발을 밟을지도 몰라요. 미리 사과할게요.”

    드라마나 소설에서 보던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춤이라고는 초등학교 운동회 때 추던 부채춤이 전부라 미리 테오도르에게 사과를 건넸다. 내가 소곤거리자 그 역시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얼마든지 밟으셔도 됩니다.”

    가만히 있어도 치맛자락이 그의 허벅지를 스칠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목덜미를 오싹하게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자, 시작할까요?”

    다행히 후작은 바로 춤을 시작했다. 우리는 무릎을 굽혀 가볍게 인사했다. 이어 테오도르가 내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 절제된 동작이 잠시 넋을 잃을 정도로 우아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음악이 없어 입으로 딴딴딴, 하고 박자를 맞춰야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재미있었다

    춤은 비슷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뿐이라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손을 잡기는 했지만, 적당히 거리를 두고 추는 춤이라 테오도르의 발을 밟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하하, 쿼드릴이 왈츠보다 더 재밌네요!”

    이본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방장은 처음에나 쩔쩔맸지, 지금은 누구보다 즐거운 표정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반면, 피데스와 미셸 남작은 여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목각 인형이 춤을 춰도 그들보다 부드러울 것 같았다.

    주변을 힐끔거리는 동안에도 테오도르의 시선은 계속 내게 머물러 있었다. 나는 애써 그것을 모르는 척 외면했다.

    춤은 아주 빠르게 끝났다. 마지막 동작을 마친 우리는 다시 눈을 마주치고 인사했다.

    “즐거웠어요.”

    “저 역시, 즐거웠습니다.”

    나는 이본이 있던 오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테오도르의 앞에는 피데스가 섰다. 그녀의 표정은 이전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나는 아주 잠깐, 피데스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 * *

    한 곡은 아주 짧다고 생각했는데, 세 곡을 연달아 추자 갑작스럽게 피곤이 몰려왔다. 몸을 움직여 취기가 빨리 돈 탓일지도 모른다.

    다들 나와 비슷할 정도로 취했을 것 같아 주위를 살펴보니, 후작 부부는 점잖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이본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고, 피데스와 미셸 남작은 여전히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굴었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이었다. 손님들은 춤을 추고 난 후, 가볍게 디저트를 먹고 헤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피데스를 배웅한 후 비틀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테오도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많이 움직여서 지쳤을 뿐이에요. 오늘은 정말 재미있었어요. 다른 파티에서도 이렇게 춤출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마음 놓고 춤을 즐길 기회가 다신 없을 것 같다는 예감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테오도르가 마지막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제가 카를라 님께 춤 신청을 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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