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8화
백작은 망설임 없이 사업 자금으로 쓰고 남은 카를라의 지참금을 처분했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니 아쉬울 것도 없는지, 팔아 치우는데 거침이 없었다.
선박, 광산, 흩어져 있던 땅이며 건물의 권리서가 쌓일 때마다 지참금 목록에 연필 자국이 늘었다. 백작은 카지노의 게임보다는 아편에 더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듣기로는 아틀라스는 게임에서 많이 잃을수록 시가의 값을 올린다고 했다.
푸르던 나뭇잎의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물들 때쯤, 카를라의 재산 대부분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저택의 분위기는 영 어수선했다. 오후 늦게까지 늘어져 잠을 자다가, 해가 저물 때쯤 카지노로 달려가는 백작 덕분이었다. 상급 사용인들은 이제 그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내게 달려와 집안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카를라가 백작 부인으로서 응당 받아야 했던 대접이었다.
“응접실의 커튼은 어떻게 할까요?”
“따뜻해 보이는 색이 좋겠어. 밝은 상아색으로.”
“네, 마님.”
나는 백작저에 손님을 초대하기로 했다. 그동안은 다른 사람의 초대만 받았지 남을 초대한 적이 없던 까닭이었다. 나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좀 더 돈독하게 만들 겸 적당한 구실을 붙여 만찬회를 열기로 했다.
집사는 내가 만찬회를 열겠다고 하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을 설득하기는 그보다 더 쉬웠다. 카지노에서 막 돌아왔을 때를 노려 말을 걸자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치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고로, 한참 동안 저택을 꾸미는 데 집중해야 했다. 집을 꾸미는 것은 살인적인 노동력을 요구했다.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춰 가구를 재배치하는 것부터가 그랬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욕심을 내다 보니 거의 대공사가 되었다.
저택이 넓고 가구가 많아 사용인들이 모두 달라붙어 일을 도와야 했다. 개중 가장 힘이 강한 이는 정원사였는데, 그는 커다란 테이블이며 소파를 번쩍번쩍 들어 올렸다. 그건 어떤 의미로는 묘기에 가까웠다.
“와아, 소파를 그렇게 번쩍 드는 건 처음 봤어요!”
“대단하네요.”
리자와 벨이 감탄을 뱉자 하인들의 경쟁의식에 불이 붙었다. 그들은 하녀들을 힐금거리며 팔뚝을 걷기 시작했다.
“마님, 의자는 어디에 놓을까요?”
“테이블 바로 옆에 놔둬.”
“이 의자는 다리가 부러졌는데 어떻게 할까요?”
“버려야겠군. 버릴 것은 정원에 내놓고 한 번에 처리하자.”
사용인들을 통솔하는 것도 일이었다. 하녀들은 가구를 치운 자리에 쌓인 먼지를 쓸고 닦았다. 촛대 같은 자잘한 장식품을 갈아 치우는 것도 일이었다. 한바탕 바지런을 떨자 저택의 내부가 이전보다 그럴싸해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응접실의 서랍 하나였는데,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밝은 옥색으로 칠해져 있어 다른 가구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쓸모가 있는 것도 아니라 과감히 그것을 버리기로 했다.
“이건 밖에 내놔야겠구나.”
하인 한 명이 서랍 아래를 잡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서랍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도 못 드냐, 비켜봐. 이건 이렇게 드는 거야.”
정원사가 그를 비웃으며 밀어냈다. 그러고는 서랍의 다리 부분을 쥐고 헛, 소리를 내며 힘을 주었다. 그러나 이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서랍을 내려놓고 말았다. 바닥에 부딪히는 육중한 소리로 보아 서랍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처참한 실패에 정원사는 변명을 웅얼거렸다.
“무거운 걸 너무 많이 들었더니 힘이 빠져서…….”
다른 하인들이 돌아가며 서랍을 들어보았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들썩거리기는 했지만, 완전히 들리지는 않아 옮길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마님.”
어떻게 하기는, 당연히 여럿이 들어 올리면 될 일이었다. 다들 오랜 청소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그렇게 명령하려고 할 때였다.
“제가 들어 봐도 되겠습니까?”
테오도르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는 어느새 제복 재킷을 벗고 셔츠를 팔꿈치까지 둘둘 말아 걷어 올린 채였다.
‘남자들은 왜 이렇게 힘자랑을 하는 걸 좋아할까.’
나는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테오도르는 서랍 아래의 틈에 양손을 넣곤 그대로 들어 올렸다.
“어머!”
리자가 감탄 소리를 뱉으며 입을 손으로 가렸다. 테오도르의 팔뚝에는 힘줄이 불뚝 튀어나와 있어 얼마나 힘을 준 건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조금도 무겁지 않다는 듯 서랍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곧 안정적인 자세로 가만히 섰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고 있자 테오도르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밖에 내놓으면 되겠습니까?”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뇨. 손수레로 옮기는 게 좋겠어요.”
눈치 빠른 하인이 얼른 손수레를 가져와 그의 앞에 놓았다. 그때까지 테오도르는 서랍을 들고 서 있었는데, 무거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와…… 성기사님이라 뭐가 다르긴 다르네요.”
“그러게요……. 저거 진짜 무거운데.”
사용인들은 테오도르의 근력에 놀란 듯 입을 떡 벌리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당황해 잠시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테오도르는 드물게 한쪽 눈썹을 까닥였는데, 우쭐거리는 것이 확실했다. 그는 티 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나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리자가 웃음소리를 듣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내부 단장에 집중했다.
* * *
크게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이것저것 지시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쭉 빠졌다. 이전보다 운동량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체력이 좋아진 건 아닌 모양이다.
해가 저무는 것이 보였다. 리자에게 응접실의 촛대에 양초를 꽂아 놓으라고 명령한 뒤, 나는 잠시 쉬기로 했다.
“마님, 쉬시는 동안 차를 가져올까요?”
“응. 간단한 주전부리도 함께 가져와 줄래?”
나는 벨의 말에 대답한 후 완전히 달라진 응접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음식을 대접할지 정한 후, 초대장을 보내고…… 피데스에게 넌지시 도움을 구해 볼까? 이본을 위해 도수가 낮은 술도 준비해 둬야겠어. 마리는 아직 신혼이라 바쁠 테니 꼭 오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이고…….’
생각이 끝없이 몰아쳤다. 내부 단장을 끝마쳤다고 해서 바로 손님을 초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손님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마시고 먹을 것들을 준비해야 했다. 후자는 어렵지 않았지만, 손님을 초대하는 건 퍽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귀족 사회는 폐쇄적인 사회였고, 그런 곳에는 늘 암묵적인 규칙이 있기 마련이다. 파벌이 갈린 사람들이나 이익으로 등지고 있는 사람을 함께 초대하면 분위기가 나빠지니, 적당히 사이가 좋은 사람들을 골라 초대해야 했다.
‘카를라가 어떤 파벌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야.’
어설프게 만들어진 걸 고치는 것보다 아예 없는 상태에서 쌓아 올리는 게 쉬운 법이었다. 카를라는 원래도 그리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는데, 결혼을 계기로 깊게 교류하던 친구들이 없어졌으니. 덕분에 쉽게 여러 사람과 친해질 수 있었으나 모두 표면적인 친분일 뿐이었다.
‘무조건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해. 카지노가 커질수록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이 생길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사교계에서 고립되었다고 왕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을 거야.’
문득 백작이 카지노를 빼앗으려고 경영 능력을 들먹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지금은 아편이며 도박에 빠져 정신이 없지만 내 계획이 순조롭게 이어져 모든 것을 잃게 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무서울 것도 없는 법이니까. 카를라의 모든 지참금을 되찾고 그를 파산시키기 전까지 나를 방해하는 것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껏 백작이 카를라를 하찮게 대할 수 있었던 건, 그녀에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만찬회를 시작으로 나는 확실한 내 편을 늘려갈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표면적인 관계만 쌓아 왔으니 이제는 내실을 쌓아 둘 차례였다.
‘파벌…… 파벌까진 아니더라도 나랑 친한 사람들이 서로 친목을 다지게 만들면 결속력이 강해지겠지.’
일반적인 파티나 다과회가 아닌 만찬회를 열기로 한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사람은 식사할 때 어느 정도 긴장이 풀어지기 마련이니, 서로 마음을 터놓기 쉬워질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이본과 피데스만 초대하여 단출히 식사하고 싶었지만, 조금 더 욕심을 부리기로 했다.
‘이 기회에 이본의 오해도 풀어 주고 싶어.’
이본은 좋은 사람이었다. 친하지도 않은 카를라를 걱정해 주는 마음씨도 그렇지만, 함께 있으면 유쾌하고 즐거웠다. 그런 좋은 점을 다른 사람도 알아 주었으면 했다.
나는 고심 끝에 안면이 있는 사람 중 세 명 정도를 더 초대하기로 마음먹었다.
결정을 내리고 눈을 뜨자,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져 있었다.
‘오래 생각한 것 같지는 않은데.’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옆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그림자가 사라지며 창밖으로 저물고 있는 햇빛이 뺨에 닿았다.
마침 벨이 돌아왔다. 그녀는 차 말고도 자두 케이크와 머핀, 쿠키를 줄지어 내려놓았다.
“이건 다 뭐니?”
“곧 만찬회를 여시잖아요. 주방장이 완전히 들떠서는, 마님께서 자랑할 수 있는 디저트를 만들어 보이겠다고 연습을 하고 있더라고요.”
“별걸 다 연습하는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꺼운 일이었다. 어쨌든 내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니까. 나는 허리를 세워 자세를 바르게 했다. 뺨에 닿던 햇빛이 눈을 찔렀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시네. 리자, 커튼을 좀 치렴.”
“네, 마님.”
리자는 쪼르르 창가로 향했다. 그녀가 창문 앞에 서자 그림자가 내 몸을 가렸다.
‘어?’
나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눈이 부시지 않도록 그가 일부러 그림자를 만들어 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를 보며 웃는 얼굴을 보자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말을 삼켜버렸다. 그의 옆에 있으면 왜 이렇게 말을 아끼게 되는지 모르겠다. 리자가 커튼을 치자 얼굴을 비추던 햇빛은 감쪽같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