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7화
집으로 돌아오는 마차를 타며 침대 아래에 숨겨 놓은 지참금 목록을 떠올렸다.
카를라의 지참금 목록은 세 장이나 되었다. 이전에 돌려받은 다이아몬드 광산뿐만 아니라, 세를 놓은 땅부터 현금으로 바꾸기 쉬운 보석까지 적혀 있었다. 그러나 자잘한 액세서리나 드레스 같은 것은 적혀 있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없는 거겠거니 했겠지만, 이제는 알았다.
‘카를라는 사랑받는 딸이었으니까, 분명 적혀 있지 않은 것도 많을 거야.’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가지고 왔으니 액세서리나 드레스도 분명 상당한 양이었을 것이다. 백작이 가져간 카를라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 일단 다 뺏고 본다.’
카지노 직원이 보여 주었던 장부를 떠올려 보았다. 백작이 내놓은 현물 중에 여성용 장신구는 없었다.
‘미안, 네가 안 적어 놓은 건 되찾아 주기 어렵겠다.’
나는 속으로 카를라에게 사과했다.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음은 가벼워질 테니까. 나는 벨이 들고 있던 개인 장부를 건네받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두툼한 장부는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잘 정리하고 있구나.”
“감사합니다.”
벨에게 장부를 돌려주자 그녀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종이를 갈무리했다.
“벨, 장부를 보다가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렴.”
“당치도 않아요. 제가 어찌 마님의 물건을 탐내겠어요?”
벨이 화들짝 손을 저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햇볕에 그을린 손목이 허전해 보였다. 나는 곧장 손목에 걸치고 있던 팔찌를 끌러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손목이 허전해 보이는구나. 이거라도 차고 있으렴.”
벨은 머뭇거렸으나 내가 손을 거두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팔찌를 받았다.
“업무 처리가 마음에 들어 주는 거니,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님.”
벨은 점점 늘어나는 업무로 힘겨울 미래를 까맣게 모르는 채 활짝 웃었다.
* * *
백작이 자주 자리를 비우고 집사 또한 현금을 융통하기 위해 분주해지자, 자연스럽게 저택 안에서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새로 온 주방장은 내 취향에 맞춰 향이 강하지 않은 음식을 내놓았다. 덕분에 이카루스 백작은 종종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음식을 내놓았다며 언성을 높이곤 했다.
그는 소금과 향신료로 범벅이 된 음식이 아니면 맛을 느끼지 못했다. 아편으로 백작의 혀가 무뎌졌기 때문일 것이다. 주방 하녀들은 그가 고의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하는지, 벨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내게 저택의 분위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고하곤 했다. 덕분에 나는 가만히 앉아서 저택이 돌아가는 상황을 훤히 꿰뚫을 수 있었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 빨라지는 것과 동시에 백작가는 서서히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우선 상급 사용인들이 집사를 찾는 횟수가 늘어났다. 대부분은 백작의 횡포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는 신경이 부쩍 예민해져 자잘한 일에도 마구 트집을 잡았고, 사용인들은 그에 심리적인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하얗게 빨아 놓은 시트를 보고 얼룩이 있다고 소리를 치거나, 멀쩡한 식사에 무슨 짓을 했냐며 식탁을 엎는 주인을 모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을 많이 주면 이해해 보려고 노력이라도 할 텐데, 월급이 크게 높은 편이 아니라 불만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벨은 집사에게 장부 정리를 배우며 옆에서 보고 들은 것을 곧장 내게 전달했다. 집사가 머리 터지게 일하는 동안, 백작의 씀씀이는 더욱 커져만 갔다.
침몰하는 배에서 가장 먼저 도망가는 생물이 쥐라면, 망하는 회사에서 위기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건 돈을 세는 사람이다. 마침내 집사가 내게 와 말했다.
“마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전과 달리 아주 공손한 태도였다.
“뭔가?”
“현금을 좀 융통해 주십사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정말 재미있는 농담이야. 그대가 이렇게 실없는 농담을 할 수 있는 사람인 줄은 처음 알았어. 그래,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집사는 단기간에 십 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충혈된 눈과 늘어난 주름이 그녀의 시름이 얼마나 깊은지를 알려 주었다.
“마님, 농담이 아닙니다. 곧 하녀 하나가 그만둔다고 하여 퇴직금을 챙겨 주어야 하는데, 현금이 모자라 지급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집사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저택의 사정을 길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만둔다는 하녀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하녀들과 친한 벨이 보고할 때 언급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직금은 통상적으로 직급과 근무한 연수에 따라 정해진다. 이번에 나가는 사용인은 세탁 담당 하녀로, 꼬박 사 년을 저택에서 근무했다고 했다. 퇴직금은 그리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백작가에서 마련하지 못할 정도의 큰 금액은 아니었다. 나는 혀를 차며 집사를 타박했다.
“아니, 현금이 모자라 퇴직금을 주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그걸 왜 내게 말하는지 모르겠군. 혹시 백작님께 말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건 아닌가?”
한쪽 눈썹을 들며 집사를 몰아붙이자, 그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집사는 자신의 충성심이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투명하게 장부를 관리하는지에 대한 말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백작의 개처럼 구는 건 꼴 보기 싫었지만 돈을 착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그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의 충성심은 알겠어. 그래도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는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
가볍게 비꼬자 집사가 말을 이었다.
“백작님께서 현금이 생기기만 하면 가져가시는 바람에 저택에 보유하고 있는 현금이 전혀 없습니다. 급하게 보석을 팔아 현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백작님께서…… 주인님을 말리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마님, 부탁드립니다.”
집사는 매끄럽게 백작의 탓을 했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집사는 나와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요 몇 주 고생하느라 움푹 들어간 뺨이 보였다.
“그래, 얼마나 필요한가?”
흔쾌히 집사에게 동아줄을 내려 주었다. 집사의 얼굴에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서렸다. 제가 잡은 동아줄이 썩은 것인 줄도 모르고.
* * *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백작가의 재정 문제는 심각했다. 영지민들을 최대한 쥐어짜도 아직 추수 시기가 아니라 세금을 걷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백작은 하루의 반은 약에 취해 있고, 남은 반은 카지노에 있느라 가문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덕분에 집사가 죽어나는 걸 보는 건 즐거웠다.
나 또한 업무에 치이느라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카지노 특별실의 귀빈들이 칩으로 바꾸는 현물의 양이 점점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전에 연을 터 두었던 보석상을 통해 반지며 목걸이 따위의 귀물을 처분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정도로 그 양이 많았다.
그나마 리자가 얌전한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와 붙어 있을 시간이 적으니 신경 쓸 일도 없었다. 백작이 알아서 아편굴에 들어간 덕분에 리자를 딜러로 잠입시키려는 계획은 옛적에 휴지화해야 했다.
“마님, 편지는 어디에 둘까요?”
“화장대 위에 놔두렴. 평소처럼 중요해 보이는 건 따로 빼두고.”
“네!”
리자가 밝게 외치며 종이 다발을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여전히 목소리가 크고 눈치가 없었지만, 벨이 허리를 꼬집으며 가르친 탓인지 거슬리는 부분이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백작이 리자를 찾는 횟수가 적어진 것도 그녀의 태도에 변화를 주었다.
‘이게 미운 정인가?’
장부를 마저 검토하고 있는데, 리자가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니?”
그녀는 헤헤 웃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마님, 제가 여쭤볼 게 있는데요…….”
평소 해맑게 아무 말이나 내뱉는 리자가 머뭇거리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수상한 느낌. 소위 말하는 ‘촉’이 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뭐니? 물을 게 있으면 얼른 말하렴. 지금 바쁘니까.”
“음, 그러니까, 선박 권리서가 뭐에요?”
선박 권리서라니, 리자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이 아니었다. 나는 장부를 덮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리자는 손톱을 맞부딪히며 부끄러운 듯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걸 팔면 지금까지 잃은 걸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저도 그게 뭔지 알고 싶은데 주위에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요. 마님은 책도 많이 읽고 어려운 서류도 쓰시니까, 아시지 않을까 싶어서…….”
리자의 앞에서 그런 소리를 했을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이카루스 백작.
“그래, 좀 어려운 말이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니?”
입꼬리를 끌어당겨 부드럽게 웃자, 리자는 안심했다는 듯 마주 보고 활짝 웃었다.
“백작님께서 집무실을 온통 뒤지면서 그걸 찾고 계시더라고요! 집사님이 멍하니 서 계셔서 저라도 도와 드리고 싶었는데 그게 뭔지 몰라서 도울 수가 없었어요!”
“그랬구나.”
나는 흐트러진 리자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선박 권리서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그게 뭔지는 정확히 알려 줄 수 있었다.
“선박 권리서라는 건 말이지…….”
다음 날, 카를라의 지참금 목록 가장 위에 적혀 있던 선박 권리서가 내 손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