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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5)화 (55/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5화

    피데스 소공작은 내 뒤를 따라오면서 나를 회유하려고 애썼다.

    “언니, 굳이 백작을 찾아야 할까? 그가 꼭 필요한 건 아니잖아?”

    “마차는 한 대뿐이니까요.”

    “내 마차 빌려준다니까?”

    “소공작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죠.”

    피데스 소공작을 따돌리려 최대한 빠르게 발을 놀렸지만, 그녀는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금방 나를 따라잡았다.

    “어차피 거기 가 봤자 좋은 꼴은 못 볼 텐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기는 하군요.”

    중얼거리던 피데스가 앗, 하고 입을 벌렸다. 특별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확실했다. 피데스는 내가 그것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거고.

    “그게…… 음, 백작이랑 노는 귀족들이 좀, 지저분하다고 해야 할까, 뻔하거든. 그렇다고 언니가 직접 가 볼 필요는 없어. 분명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테니까.”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계속 계단을 올랐다. 피데스뿐만 아니라 테오도르와 벨, 리자까지 붙어 움직이자 이목이 쏠렸다. 계단 중간중간에 서 있던 직원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장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이전에 한 번 보았던 직원이 황급하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특별실로 가는 것뿐이네.”

    “아, 아……. 네, 넵. 안내하겠습니다.”

    운동은커녕 정원에도 잘 나가지 않는 몸이라 그런지 사 층까지 빠르게 걸어 올라가자 숨이 차올랐다. 헉헉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니 직원이 몸을 바짝 긴장시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특별실로 걸어갔다.

    아름답게 조각한 문 앞에 서자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톡 쏘는 것 같으면서도 기분 나쁘게 달짝지근한 냄새. 백작에게서 풍기던 그 냄새지만 한층 더 진한 것 같았다. 직원이 문을 열려고 하자 피데스와 테오도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카를라 님, 뒤로 물러서십시오.”

    “네?”

    직원이 눈을 꽉 감고 문을 열자 피데스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바닥까지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방은 뿌연 연기로 차 있어, 안의 상황을 단번에 파악하기 어려웠다. 복도에 퍼지는 연기 사이로 이상한 냄새가 풍겼다. 풀을 태운 것 같은 매캐한 냄새였다.

    연기가 어느 정도 빠지자 서서히 방 안의 윤곽이 드러났다. 몇 사람이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그들은 좀비처럼 으으, 하는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코를 막고 팔을 휘젓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수, 술을 마시다 보면 담배를 과하게 피우는 분들이 계십니다. 얼른 정리하겠습니다.”

    직원이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방 안을 훑어보았다. 이카루스 백작과 아틀라스, 그리고 얼핏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들이 늘어져 있었다. 그건 결코 술에 취한 모습이 아니었다.

    ‘담배? 아니, 이건…… 마약이야.’

    그들은 하나같이 눈에 초점이 없고 몽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딜러를 맡은 직원과 시종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들 사이에 카지노 유니폼을 입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카를라 님, 조심하십시오. 이건 일반적인 담배 연기가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테오도르가 팔로 나를 저지하고는 손수건을 내밀었다. 새하얀 손수건은 이전에 세탁해 돌려주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입과 코를 막았다.

    “그러네요.”

    예전에 TV와 책으로 본 적이 있었다. 초점이 없는 눈, 흐리멍덩한 표정, 의자에 거꾸로 누워 몸을 늘어트리고 있는 모습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까지, 어떻게 보아도 정상은 아니었다. 헛구역질하거나 힘들어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아서는 하루 이틀 마약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아틀라스가 초대한 카드 게임 모임에서 이카루스 백작이 홀에서 없어졌던 건, 마약을 하기 위해서였다. 피데스 소공작은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그 기회를 이용해 나를 공작가로 데려간 것이다.

    나는 연기를 피해 뒷걸음질을 치며 피데스 소공작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당황하며 고개를 돌리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숨기려던 게 이건가요?”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언니가 했던 말을 잊은 건 아니야. 하지만 막상 이런 모습을 보면 속상해할 것 같았어. 보다시피, 좋은 꼴이 아니니…….”

    “그래요, 나중에 이야기하죠.”

    그녀를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피데스가 이런 행동을 한 건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변했더라도, 이전에 좋아했던 사람의 바닥을 보게 되면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나는 카를라가 아니었고, 충격을 받기보다는 생각을 정리하기 바빴다.

    이카루스 백작이 이미 마약에 중독된 상태라면, 카드 게임 모임에서 저택으로 돌아온 후 내게 보였던 신경질적인 태도나 가끔 리자에게 폭력적으로 군 이유가 무엇인지 명백했다.

    ‘이전에 내가 맡았던 냄새는 아편 냄새였군.’

    아편 중독의 부작용이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폭력적으로 변하는 것. 나는 리자를 바라보았다.

    ‘얘는 알고 있었을까?’

    그녀는 방 안을 보고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전혀 모르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래. 아는 게 더 신기하겠다.’

    다시 고개를 돌려 직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예의 바른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가지런히 모은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특별실의 손님을 똑바로 관리하지 못한 것에 ‘일 났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훤히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는 손을 꽉 쥐었다 폈다. 손수건을 얼굴에서 내린 후, 차분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명령했다.

    “우선 이대로 문을 열어 두어 방을 환기하고, 여기 있는 이분들은 위층으로 모시도록. 몸에 좋지 않은 연기이니 직원들이 들이키지 않게 유의하게. 귀빈들이 정신을 차리면 방금 있던 일은 언급하지 말고 적당히 대접해서 보내.”

    “넵!”

    “그리고 이 방에 있던 귀빈들 명단을 작성해서 보고하도록 해.”

    직원은 재빠르게 다른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방에서 멀리 떨어졌으나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자 연기가 더 빠른 속도로 복도에 퍼졌다. 얼굴에 닿기 전에 손을 휘저어 흐트러트렸지만, 작게 기침이 나왔다.

    “콜록…….”

    “카를라 님!”

    테오도르가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전에 본 적 없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연기에 섞인 담뱃재가 얼굴에 묻었을 수 있습니다. 서둘러 닦아 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손수건으로 막고 있었으니 괜찮아요. 저보다는 테오도르 경과 소공작님이…….”

    나보다 더 앞에 있던 테오도르와 피데스도 멀쩡한데 괜히 소란을 떨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젓자 피데스가 얼른 테오도르의 말을 받았다.

    “나랑 저 기사는 괜찮아. 그의 말대로 언니는 몸이 약하니까 얼른 한번 씻어 내는 게 좋겠어.”

    “마님, 위층 숙소에 빈방이 있다고 합니다.”

    벨이 넌지시 장소를 제안했다. 뒤쪽에 있어 몰랐는데 그사이에 직원에게 빈방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평소 대화를 끊거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그녀가 끼어들다니…… 못 이기는 척 따라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 그리로 가자꾸나. 너희도 가서 손이랑 얼굴을 씻고 오렴.”

    “네, 마님.”

    “뒤처리는 내가 맡을게. 언니는 먼저 올라가 있어.”

    피데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해요.”

    * * *

    숙소의 방은 크지도 작지도 않아 하룻밤 머물기에 딱 적당했다. 잠시 묵었다 가는 곳이라지만 벽지나 등불, 배치된 가구들이 화려해 귀족들의 심미안을 만족시킬 만했다.

    벨과 리자는 금방 물을 가져왔다. 서둘러 가져오느라 물이 미지근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세숫물로 얼굴과 손을 씻어 내면서도 머리가 복잡했다.

    ‘왜 남의 업장에서 마약을 하지? 제정신인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 막 개업한 곳에서 마약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벨이 건넨 수건에 얼굴을 묻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생각이라는 게 있으면 마약을 아예 안 하겠지.’

    이해할 수 없는 것에 계속 몰두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게 내 심신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예를 들면 마약을 누가 퍼트렸는지 찾아내는 일 말이다.

    ‘이카루스 백작은 아니야.’

    그가 아편으로 시가를 만들었다면, 정원에 피어 있는 양귀비를 보자마자 내 의도를 의심했을 것이다. 게다가 백작은 그가 합방일에 아편을 먹은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누구지?’

    누굴까. 마약을 시가로 만들어 피우게 한 사람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특별실에서 보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하나같이 아틀라스가 초대한 카드 게임에서 보았던 얼굴이었다. 얼핏 본 것이라 확신할 순 없으나, 그중 몇 명은 내가 돈을 걸었던 사람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카드 게임 모임이 열렸던 저택의 조잡한 정원이 떠올랐다. 제멋대로 자라난 잡초 사이로 보이던 붉은 꽃.

    ‘그때는 스치듯 봐서 확신할 수 없었는데, 양귀비가 맞았나 보군.’

    마약을 만들고 유통하는데 아틀라스가 연관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카루스 백작이 술에 취해 잠들었다고 변명하던 남작 부군을 떠올렸다.

    ‘몰래 숨어서 하는 걸 보면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일 수 없는 거야.’

    게다가 테오도르와 피데스가 ‘독’이라며 나를 감싼 것을 보면, 마약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한참 수건에 얼굴을 묻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불쑥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흡이 곤란하거나 머리가 어지러우시다면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자 시선이 마주쳤다. 테오도르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얼마나 수건에 얼굴을 묻고 있었던 걸까. 고개를 돌리자 벨과 리자도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게 보였다.

    “괜찮아요.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벨이 얼른 다가와 수건을 받으며 물었다.

    “차를 가져올까요?”

    “아냐. 첫날이니 제대로 정리했는지 보러 가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언니, 접니다, 피데스.”

    “리자, 문을 열어 드리렴.”

    리자가 문을 열자 피데스가 방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녀는 직원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를 밀치듯 놓아 주었다. 끌려온 직원은 엉거주춤하게 방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이 녀석이 특별실 담당 딜러라는군. 언니가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데려왔어.”

    피데스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직원은 굳은 얼굴로 방을 힐끔 훑어보았다. 긴장한 테가 역력했다. 하긴, 누구라도 잘못한 게 있는 상황에서 사장에게 끌려오면 그런 얼굴을 할 터였다. 바짝 얼어붙은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사, 사장님. 트, 특별 귀빈을 모시는 전담 딜러 이반입니다…….”

    특별실을 담당하는 딜러의 머리카락은 금발이었다. 이본 남작의 부탁으로 들인 시종 중 한 명일 게 분명했다.

    내가 그와 눈을 마주치며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직원의 얼굴이 단번에 하얗게 질렸다.

    “안 그래도 듣고 싶던 이야기가 있던 참이었는데, 잘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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