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4)화 (54/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4화

이본은 여전히 카드 게임을 잘했다. 심지어 룰렛이며 미니 경마에도 재능이 있는지 연승을 이어 갔다. 테오도르는 눈치껏 그녀와 같은 곳에 배팅하여 짭짤한 수익을 냈다.

‘대단하다.’

나는 속으로 감탄을 뱉으며 칩을 쓸어 담는 그들의 모습을 뒤에서 구경했다.

직원들의 솜씨도 나쁘지 않았으나, 이본은 너무 강한 상대였다. 이런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으면 카지노는 순식간에 파산할 것이다. 아예 방문을 금지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지게 만드는 대처법을 생각해 두었지만 이본에게 그런 수를 쓰기는 싫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적당히 할 거니까.”

이본이 친근하게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런 표정이라뇨?”

“아, 귀여워. 걱정하고 있잖아요. 내가 게임을 너무 잘해서.”

그녀는 킬킬거리며 나를 놀렸다. 티가 날 정도로 심각한 얼굴이었나 싶어 표정을 갈무리하니 아예 박장대소를 했다. 주변 사람들이 힐끔 이쪽을 바라보았다가 웃음소리의 주인을 확인하고서는 시선을 돌렸다.

“제 표정이 그렇게 읽기 쉽나요?”

“음, 글쎄요.”

이본이 눈을 가늘게 떴다.

“원래 관심 있는 사람의 표정은 눈에 딱 보이는 법이잖아요.”

그녀는 장난스럽게 옆자리를 눈짓했다. 그 시선을 따라 반사적으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무슨 뜻이지?’

그 순간,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그는 내가 무엇을 요청하든 당장이라도 대령할 것처럼 말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빠르게 고개를 돌려 이본을 바라보자, 그녀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웃지 말라는 뜻으로 밉지 않게 눈을 흘겼지만, 그녀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연달아 게임을 했더니 머리에 열이 몰려 어지러웠다. 눈이 침침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르자마자 테오도르가 물었다.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말하지 않았는데도 내 상태를 알아차려 놀랐지만, 속으로만 작게 감탄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도르가 직원에게 칩을 맡아 달라고 하는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잠깐 밖에 나갔다 올 건데, 이본은요?”

“음, 이제 슬슬 잃어 줄 때가 된 것 같아서 몇 판만 더 하고 가려고요.”

이본은 킥킥거리며 칩을 따기만 하면 딜러들에게 미움받을지도 모른다고 농을 던졌다. 타이밍이 엇갈려 그녀와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미리 인사를 건넸다.

“남작님께서 가시기 전에 인사해야겠네요. 오늘 재미있었어요.”

“나도 정말 재미있었어요.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이본과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가는 내내 테오도르는 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둥근 홀을 지나 밖으로 나가자, 서늘한 바람이 뺨에 닿았다.

하늘은 약간 어슴푸레한 빛을 띠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시계를 보지 않아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국과 달리 도시의 불빛 대신 환한 달빛이 밖을 비췄다.

여름의 밤은 그리 춥지 않았으나, 밀폐된 공간에 있다가 나온 탓인지 밖의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맑은 새벽 공기가 폐를 찔렀다. 하아, 깊게 숨을 내뱉자 테오도르가 물었다.

“춥지 않으십니까?”

“버틸 만해요.”

“몸이 약하시니 걱정이 되어.”

“그렇게 약하지는 않은데요.”

뒤를 돌아 테오도르를 바라보니, 그는 진지한 얼굴로 제복 재킷을 벗고 있었다.

‘뭐야, 갑자기 옷을 왜 벗어.’

당황스러워 눈을 깜빡이자, 그가 조심스럽게 재킷을 내게 건넸다. 걸치라는 뜻일까. 얇은 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그에게 선뜻 옷을 받기가 뭐해 머뭇거리자, 테오도르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른 기사들도 모시는 레이디가 추운 곳에 계신다면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부디 사용해 주십시오.”

그의 긴 변명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이전에 한 말을 잊어버린 게 아니었나 보다. 과한 호의가 아니라는 걸 이렇게까지 어필하니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보는 눈이 많지도 않으니 굳이 그의 호의를 거절해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테오도르의 재킷은 품이 커서 어깨에 걸치자 내 무릎까지 내려왔다. 꼭 어른 옷을 훔쳐 입은 아이 꼴이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그의 재킷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땅을 보는 척 슬쩍 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아 보고 이것이 매우 익숙한 냄새라는 걸 알아차렸다. 옅은 향기의 정체는 세탁 하녀들이 쓰는 비누 냄새였다.

‘분명 내 옷에서도 같은 냄새가 날 텐데.’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나는 것도, 그 익숙함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카지노 건물 근처를 서성거렸다. 입구를 지키는 직원들이 힐끔거리기는 하였으나 금방 관심을 거두었다. 맑은 공기를 쐬며 걷자 두통은 금방 사라졌다.

‘앞으로 사람이 많은 곳에는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되겠어.’

다시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재킷을 벗어 테오도르에게 돌려주었다.

“잘 썼어요.”

셔츠 하나만 입고 있는 그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푸른 빛을 띠어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경, 춥지 않았어요?”

“예. 괜찮습니다.”

“옷이 그렇게 얇은데도요.”

“하나도 춥지 않았습니다.”

내가 건넨 재킷을 받는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테오도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그의 입술은 희미하게 올라가 있었고, 눈빛은 한없이 다정했다. 나는 숨을 삼켰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선을 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행동이 자꾸만 나를 흔들어 놓았다.

“…….”

“…….”

우리는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밤하늘 아래, 보이는 것이라고는 테오도르와 그를 비추는 달빛밖에 없었다. 그의 새파란 눈에 내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시선을 피하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불어오는 바람에 새카만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마침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만 들어가시죠.”

“……그래요.”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뒤에 닿는 시선이 뜨거워, 밖에 나와 열을 식힌 보람이 없었다.

* * *

다시 카지노 안으로 들어가자, 아까보다 사람들이 많이 빠진 것이 보였다. 천천히 안을 둘러보며 리자와 벨을 찾았다.

벨도 나를 찾고 있었는지 금방 옆으로 다가왔다.

“마님, 다녀왔습니다.”

“재밌었니?”

“네!”

벨은 활짝 웃으며 이전보다 많아진 칩을 자랑했다. 두 배로 불렸다며 자랑하는 얼굴의 주근깨가 평소보다 더 발그스름하게 보였다.

“실력이 있는 모양이구나.”

“감사합니다.”

“리자는?”

“안쪽에 있어요, 마님.”

벨이 가장 깊은 곳을 가리켰다. 고개를 돌리자 과연 눈에 띄는 금발 머리가 보였다. 리자는 옆에 어마어마한 양의 칩을 쌓아 놓고 있었는데, 뭘 하면 저렇게 칩을 불릴 수 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근처에서 게임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니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저거 언니네 하녀지?”

피데스였다. 그녀는 나와 똑같이 팔짱을 끼고 흥미롭다는 얼굴로 리자를 보고 있었다.

“언제 왔니?”

“온 지는 좀 됐지. 얼굴만 비추고 가려고 했는데 구경하는 게 생각보다 재밌더라고.”

그녀는 턱짓으로 리자를 가리켰다.

“눈치도 빠르고 과감해. 적당히 치고 빠질 줄도 알고. 딜러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던데. 카지노 전용 종자로 삼고 싶어질 정도야.”

“그렇게 괜찮은 애면 여태 하녀로 있지는 않겠지.”

피데스 소공작은 내가 한 말이 농담이라 생각하는지 작게 웃었다. 손님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직원들이 게임이 끝난 테이블을 치웠다.

첫날이라 이르게 폐장하기로 했더니, 예상했던 대로 나가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왕은 조용히 자리를 떴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게임에 열을 올리고 있는 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적당히 하고 가자꾸나.”

“앗! 네, 마님!”

리자가 벌떡 일어났다. 산처럼 쌓인 칩을 허둥지둥 정리하는 모습을 뒤로하고 소공작에게 인사를 했다.

“소공작님, 저는 이만 먼저 자리를 떠야겠어요. 백작님과 함께 돌아가야 해서요.”

올 때는 왕과 함께 왔지만, 돌아갈 때는 백작과 같은 마차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다. 마차가 한 대밖에 없는 건 이럴 때 불편했다.

‘돈 많이 벌어서 마차나 한 대 더 사야지.’

피데스는 인사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이카루스 백작은 아까 돼지, 아니 아틀라스 경과 특별실이라는 곳에 갔다던데.”

“네, 특별실로 올라가셨죠. 소공작님은 항상 제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시네요.”

“아는 귀족들이 아틀라스가 특별실로 갔다고 따라가고 싶어 하더라고.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냐고 묻던데?”

나는 그녀에게 특별실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피데스는 내 말을 듣자마자 박장대소했다.

“으하하, 머리 좋네. 다른 사람들한테 소문내지 않을게. 어차피 다들 알게 될 텐데 미리 말해 줄 필요는 없지.”

피데스 소공작은 손뼉을 치며 웃다가 아차, 하고는 입을 가렸다.

“큼, 백작이 아직 안 내려왔으면 먼저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마차가 하나뿐이라 그러는 거라면 내 마차로 데려다줄게. 백작은 놓고 가. 놀다가 지치면 알아서 집에 가겠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피데스 소공작은 능청스럽게 웃었으나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명확하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전에 그녀가 나를 공작저로 데려갔을 때와 같은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때는 피데스가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 몸을 사렸으나, 같이 자고 싶다고 어리광을 피우던 모습까지 본 후로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역시 백작님을 찾으러 가야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