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3화
카를라와 이본이 아래층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이카루스 백작은 위층의 특별실에서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었다.
그는 몹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손에 들린 위스키는 쉽게 맛볼 수 없는 고급품이었고, 특별실의 손님 대접은 극진하기 짝이 없었다. 이카루스 백작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한 게임 더 하시죠.”
“좋습니다.”
기분이 좋으니 돈을 쓰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이 빼앗긴 칩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칩이 장난감처럼 생긴 탓에 돈이 오가는 게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이런, 백작님의 칩이 다 떨어졌습니다.”
“문제없습니다.”
술에 취하면 게임이 제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이카루스의 앞에 쌓여 있던 칩은 금방 동이 났다. 그러나 게임을 하는 도중에도 돈을 쉽게 칩으로 바꿀 수 있기에 그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백작은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던 직원이 곧장 그에게 다가왔다.
“칩을 바꾸고 싶은데.”
“얼마나 바꾸시겠습니까?”
“아까와 똑같이. 아, 지금 당장 현금이 없는데. 어음도 가능한가?”
“네, 어음은 물론이고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물품도 칩으로 바꿔 드리고 있습니다. 다만, 다시 물건으로 바꿔 드리지는 못합니다.”
“상관없다.”
백작은 품에 넣어 둔 회중시계를 꺼냈다. 그것은 결혼 전에 구매한 것으로, 흠집이 나기는 했으나 금으로 만들어져 제법 값이 나가는 물건이었다. 직원은 조심스럽게 회중시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들고 있던 가방을 열어 칩을 꺼냈다.
“칩 백오십 개입니다.”
테이블 위로 칩이 차곡차곡 쌓였다. 열 개, 스무 개, 서른 개…… 백 개, 백오십 개.
‘칩이 하나에 얼마더라?’
이카루스 백작은 손가락을 꼽아 계산하다가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셈을 포기했다. 이미 바꾼 칩이 얼마인지 계산하는 것보다는 게임을 즐기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 빨리 다음 게임을 시작하죠.”
술에 취한 머리로는 몇 번을 이기고 졌는지도 기억하기 어려웠다. 이카루스 백작은 원래도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에게 운까지 따라 주지 않았다면 백작가는 금방 몰락했을 것이다. 카를라의 지참금을 사용하여 투자한 사업들이 연달아 성공하면서부터 그의 삶에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백작이 유일하게 노력으로 이룬 게 있다면 전 소공작이었던 카를라와 결혼한 것이었다. 아, 정말이지 그건 노력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쉬운 일이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다루기 쉽다. 특히 사내에게 추앙받은 적 없는 여자는 더더욱. 그들은 백작이 건네는 달콤한 말 몇 마디에 기쁜 얼굴로 그가 원하는 것을 척척 안겨 주었다.
‘쉽지, 쉬워.’
이카루스 백작은 자신이 꼬드겼던 여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들은 모두 그에게 애정을 갈구했고, 철석같이 그가 본인을 사랑한다고 믿었다.
백작에게는 사람을 지배하는 재능이 있었다. 타인의 자존심을 긁어내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끝없이 속삭이면 사람은 쉽게 무너진다.
왕의 시녀이자 차기 공작으로 추앙받던 카를라를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여자로 만드는 건 차를 마시는 것보다 간단했다. 돈도 지위도 필요 없다며 친구와 가족을 버리고 그의 품에 안기던 여자를 생각하자 입 안이 텁텁해졌다.
‘에잇, 괜히 생각해서는.’
백작은 혀를 찼다. 요즘 들어 카를라가 제멋대로 구는 게 생각난 탓이었다. 평소 같지 않게 모난 눈으로 질투를 하는 꼴이 귀찮기 짝이 없었다.
정부로 삼은 하녀도 부인에게 붙여 놓았더니 분수를 모르고 제법 맹랑하게 굴기 시작했다. 고분고분한 것이 귀여워 예뻐해 주었더니, 얼마 전에는 멋대로 술을 꺼내 유혹하는 바람에 합방일을 망치기까지 했다. 엄하게 혼을 내면 곧 나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백작은 잔을 비웠다.
“한 잔 더 하시겠습니까?”
“좋지요.”
어느새 다가온 시종이 백작의 잔에 얼음과 위스키를 따랐다. 이카루스는 맞은편에 앉은 사내에게 웃어 보였다.
전(前) 남작, 아틀라스. 부인에게 재산과 작위를 빼앗긴 멍청한 놈. 두꺼운 손으로 연신 땀을 닦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우스꽝스러웠다. 얼굴에 드리운 조소를 가리기 위해 백작은 잔을 들어 올렸다. 향긋한 꽃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음, 이 향긋한 냄새! 여기는 참 좋은 술을 내온단 말이지요.”
“이런 곳에서 내오는 것치고는 그럭저럭 마실 만하군요.”
아틀라스의 호평에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향긋한 꽃 냄새나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부드러움을 보아 좋은 물건일 게 분명했다. 그가 마신 위스키 값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칩을 조금 잃기는 했어도 본전은 뽑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이 위스키만 보아도 그의 부인이 얼마나 사업에 재능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비싼 술을 이렇게 잔뜩 낭비하다니, 도무지 장사에 재능이 없는 여자야. 내가 사업을 했으면 절대 이런 술은 내놓지 않지.’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마저 잔을 비웠다. 돌아가면 허투루 돈을 쓰는 부인을 매도할 생각이었다. 그는 빈 잔을 내려놓기 위해 테이블을 더듬었다. 술에 취한 백작의 손이 몇 번 허공을 짚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시계도 창문도 없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카루스는 품 안을 더듬다가 이내 손을 빼냈다. 방금 회중시계를 처분한 것을 기억해 낸 탓이다.
“한 대 태우시겠습니까?”
머쓱해서 헛기침하는 이카루스 백작을 보며 아틀라스가 물었다. 여전히 뺨이며 턱에 땀이 흥건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끈적한 손이 꺼림칙하기는 했으나, 아틀라스가 가진 시가는 일반 시가가 아니었다.
‘이것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이 멍청이와 연을 끊었을 텐데.’
이카루스 백작은 시가를 받자마자 상단부를 잘라 내고 입에 물었다. 시가 밴드는 언제나처럼 희었고, 브랜드나 원산지 따위는 적혀 있지 않았다.
손수 잎담배를 말아 피우는 사람이 종종 있어 드문 일은 아니었으나, 이카루스는 아틀라스의 시가에는 좀 더 특별한 것이 있다고 믿었다. 새카만 시가 끝에 불을 붙이자 곧 독특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달콤하고 톡 쏘는 향이 금방 밀폐된 공간을 메웠다.
“어떻습니까?”
“여전히 향미가 독특하군요.”
아틀라스가 히죽 웃었다. 이카루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열한 장사치 같으니.’
백작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혀를 찼다. 부인에게 재산과 작위를 빼앗긴 아틀라스가 아직도 귀족 사회에 발붙일 수 있는 건, 시가를 팔고 있기 때문이다. 고위 귀족들이 그가 여는 카드 모임에 꼬박꼬박 참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숨이 꿀꺽 넘어갈 정도의 돈을 제시해도 그는 시가의 비밀을 팔지 않았다. 백작은 고위 귀족들이 카드 모임에서 아틀라스를 닦달하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본 적이 있었다.
오로지 그만이 시가를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납치라도 해서 비밀을 알아내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시가의 비밀을 밝혀내고 그를 귀족 사회에서 완전히 끌어내 주리라.
이카루스 백작은 완전히 몰락하여 바닥을 나뒹구는 아틀라스의 모습을 생각하며 겨우 입가를 끌어올렸다. 남의 몰락은 상상만 해도 달콤한 법이다.
“얼맙니까?”
“글쎄요…….”
아틀라스는 시가의 값도 제멋대로 부르기 일쑤였다. 카드 모임의 사내들은 대부분 그가 판매하는 시가에 중독되어 있었다.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주기적으로 시가를 피우지 않으면 신경이 예민해지고 쉽게 잠들 수 없었다. 대신 시가를 피우면 몸이 나른해지고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은 칩으로 받겠습니다. 남은 칩의 반만 주시지요.”
“좋습니다.”
괜찮은 거래였다. 이카루스는 쌓인 칩의 절반을 뚝 잘라 그에게 밀어 주었다. 얼마인지 계산도 되지 않는 것, 어차피 푼돈일 것이다.
칩을 내어 주자 아틀라스가 품에서 시가를 몇 개 더 꺼내 이카루스에게 내밀었다. 백작은 그것을 받아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굵은 시가를 손에 쥐자 벌써 기분이 고양되었다.
한때는 시가를 얻기 위해 이본, 그 성격 나쁜 여자에게 선물을 바치고 환심을 사기 위해 애써야 했다. 카드 모임에 초대받아 아틀라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유 없이 다른 귀족의 저택에 들락거리면 의심을 받기 쉬우니, 이본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드 모임은 훌륭한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가 이본에게 선물했던 값비싼 위스키를 생각하면 지금도 목덜미가 당겼다.
‘허세나 부리는 여자가 글렌다의 맛을 알기나 할지. 아깝기 짝이 없어.’
다행히도 아틀라스가 남작가에서 쫓겨나고 나서는 쉽게 시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돈이 필요했고, 잡초가 무성한 저택이라도 건사하기 위해서는 시가를 꾸준히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말린 잎이 타들어 갔다.
‘드디어 효과가 올라오는군.’
술에 취해 몽롱해졌던 눈에 잠시 총기가 돌아왔다. 그러다 이내 동공까지 흐릿하게 풀어졌다. 백작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자니 의식이 점차 흐려졌고, 주변의 목소리가 몽롱하게 흩어지며 멀어졌다.
세상 모든 것이 제 발아래에 있는 것 같은 고양감이 느껴져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시중을 드는 직원들이 더욱 하찮게 보였다. 발등에 재가 떨어졌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연기를 들이마시면 마실수록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흐흐흐…….”
이카루스는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늘어트렸다. 눈앞의 세상이 일그러졌다.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