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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2)화 (52/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2화

    개업식은 화려하게 진행되었다. 순서는 한국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돼지머리는 없어도 건물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신에게 사업의 안녕을 비는 것까지 개업 고사와 비슷해 다시 한번 여기가 소설 속이라는 걸 느끼게 했다.

    모든 식이 끝나자 개업식을 구경하던 귀족들은 빠르게 카지노로 들어갔다. 옥상은 나와 왕, 그리고 시종들만이 남았다.

    바람이 크게 불자, 왕이 걸친 망토가 바람에 펄럭였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이 위엄 있어 보였다. 왕은 마차에서 내리는 자들을 보며 말했다.

    “개미 같구나.”

    시종들이 남은 폭죽에 마저 불을 붙였다. 조롱박처럼 생긴 폭죽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왕은 마지막 폭죽이 터지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 나도 그녀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우리 뒤로 수많은 시녀와 시종들이 뒤따라왔다. 벨과 리자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사람들이 줄을 서 입장권을 구매하는 모습이 보였다.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이네.’

    왕에게 잘난 척 이론을 늘어놓기는 했으나, 책으로 본 지식일 뿐 실제로 카지노를 가 본 적은 없었다. 한국의 카지노도 이런 모양일까.

    “수도 내의 귀족은 다 모인 것 같군.”

    왕이 작게 미소 지었다. 입장권을 사지 않고 빠르게 들어가는 사람들은 미리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첫날만 쓸 수 있는 초대장이라고 못을 박아 두었으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

    “첫날이니까요. 게임을 하러 왔다기보단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방문한 사람이 더 많겠죠.”

    나는 줄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그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 여러 개의 덫을 설치한 게 바로 그대지 않나.”

    “덫이라고 말씀하시면 섭섭해요. 적어도 상술이라고 해 주지 않으시겠어요?”

    “백작 부인이 아니었다면 거상이 되었을 인재야, 그대는.”

    왕은 농담을 던지고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홀에 모인 귀족들이 그녀를 보고는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왕은 손을 내저었다.

    “아아,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나도 오늘은 즐기러 왔으니.”

    그 말에 귀족들은 고개를 들었으나, 왕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왕이 시종과 함께 입장하려 하자, 입구에 서 있던 직원이 그들을 막아섰다.

    “카지노 안에는 시종을 대동하실 수 없습니다.”

    “왜인가?”

    “건네주신 초대장은 폐하 한 분을 위한 것입니다. 시종을 대동하시려면 입장권을 한 장 더 구매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내 앞길을 가로막는 건가?”

    직원은 몸을 떨고 있었으나, 교육받은 대로 착실히 대답했다.

    “즐겁게 즐기기 위해서는 규칙을 존중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지켜야지.”

    귀족들은 금방 이해할 것이다. 카지노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왕이 지키는 규칙을 어기는 자는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니.

    ‘돌려 말하는 걸 참 좋아하신다니까.’

    한두 번이면 몰라도 시종을 위해 계속 비싼 입장료를 낼 귀족은 없을 것이다. 마차의 대기 시간도 두 시간으로 제한해 두었으니, 게임에 푹 빠져 늦은 밤이 되면 저택으로 돌아가기보다 위층에 방을 잡게 될 것이다.

    마차의 대기 시간을 제한하는 건 왕의 아이디어였다. 술에 취해 장시간 뇌를 혹사한 후에는 쉬고 싶을 테니, 바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면 자연스럽게 숙소를 이용하게 될 것이라고. 그 뒤엔 숙소 값이 쏠쏠할 것이라는 농담도 덧붙였다.

    왕이 홀로 게임장에 들어가려고 하길래 내가 뒤에 따라붙었다. 그러자 그녀가 손을 내저었다.

    “혼자 즐기고 싶으니 가서 일 보게. 그대도 할 일이 많잖나. 내가 붙들어 놓으면 미안하지.”

    왕은 짓궂은 미소를 짓고는 쌩하니 카지노 안으로 들어갔다. 붙들어 놓는 게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 아닐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정치판에서 구르다 보면 저렇게 되는 걸까.

    나는 혀를 내두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전에 신전에서 보았던 귀족들이 보였다. 그들은 각각 무리를 지어서 모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입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들이 카지노를 선전하는 데 일조했음이 분명했다.

    나는 귀족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훑어보아도 백작은 보이지 않았다.

    “테오도르 경.”

    “네.”

    “혹시 백작이 보이나요?”

    테오도르도 주변을 훑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하네. 안 왔나?”

    일부러 백작의 주변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집사를 통해 백작에게도 초대장 몇 장을 전달했는데 오지 않았다니.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뒤로 돌았다.

    “벨, 리자.”

    “네.”

    “너희도 초대장 하나씩 줄 테니 함께 들어가자.”

    “그래도 되나요?”

    리자가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그녀는 신기한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은지 기쁜 얼굴이었다.

    “칩도 사 주시나요?”

    “그래.”

    게임을 시켜 보려고 데려온 것이니 응당 그럴 생각이었다.

    리자와 달리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벨은 머뭇거리다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그렇지만 마님께서 주신 칩을 다 잃으면 어쩌죠?”

    “다 잃어도 괜찮아. 해 보고, 느낀 점을 말해 주렴. 손님에게 직접 물어볼 순 없는 노릇이잖니.”

    적당히 이유를 붙여서 달래자 벨의 안색이 다시 환해졌다.

    ‘거참, 상사 노릇 하기도 힘들다.’

    집사에게 받아 온 돈을 전부 칩으로 바꿔 삼등분했다. 내 칩을 바라보는 리자의 눈빛이 불손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게임 운이 안 좋아도 이 정도면 열 판 정도는 참여할 수 있겠지.’

    그리고 오늘은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카지노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바꿨으니 금방 잃지만 않도록 주의하면 될 것이다.

    “들어가자.”

    가방에 넣어 두었던 초대장을 네 개 꺼내 들었다. 입구의 직원은 초대장을 확인한 뒤 곧바로 우리를 통과시켜 주었다.

    * * *

    게임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입구 근처의 게임은 배팅액이 낮은 대신 난도가 낮았다. 소게임에서 이긴 이들의 환호성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자 룰렛이나 주사위를 하는 사람이 보였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카드가 쉴 새 없이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마님, 저는 카드 게임을 하고 싶어요!”

    “그래. 다녀와. 벨, 너도 하고 싶은 게임이 있으면 편하게 다녀오렴.”

    “마님의 근처에 있어야 필요할 때 부르시기 편할 거예요.”

    “내가 뭣 하러 널 부르겠니. 여기 널린 게 직원이란다. 그리고 우린 폐장까지 여기 있을 거야.”

    어차피 일해야 할 거, 쉬는 시간 줄 때 가서 놀라는 말이었다. 역시나 벨은 철석같이 말뜻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녀는 몇 번이고 내가 있는 쪽을 힐끔거리다가, 이내 룰렛이 돌아가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도 천천히 자리를 옮겼다. 한 테이블에서 금발의 미인이 웃으며 사람들의 칩을 착착 빼앗고 있었다. 능숙하게 귀족을 상대하는 모습이나 외양을 보니 확인하지 않아도 이본 남작의 시종인 게 틀림없었다.

    “백작 부인,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렇게 뵙는군요.”

    “멋진 곳입니다.”

    게임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면 어김없이 반갑다는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웃는 낯으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내가 낄 만한 곳은 없었다. 다들 밥을 먹고 게임만 했는지,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끼면 순식간에 칩을 털릴 게 분명했다. 차라리 나보다 테오도르의 승률이 높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오도르 경, 경도 해 볼래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제가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그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주의가 흐트러지면 카를라 님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이런 곳에 와서도 머릿속에 호위할 생각만 가득하다니,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초대장을 받고 온 귀족들인데 뭐가 그렇게 위험하겠는가.

    “사람들이 많은 곳이니 뒤에 있는 것보다 옆에 있는 게 더 든든할 거 같군요.”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라 님의 뜻이 그렇다면.”

    “좋아요.”

    내가 그의 손바닥 위에 칩을 떨어트리자, 그가 화사하게 웃었다. 순간 귓가에 쿵 하는 소리가 들려 얼른 시선을 내리고 말을 돌렸다.

    “어디로 갈 건가요?”

    “저쪽의 카드 게임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사의 감인가요?”

    “아니요. 저분에게 걸면 무조건 이길 수 있을 듯합니다.”

    테오도르가 손으로 어딘가를 정중하게 가리켰다. 거기에는 타오를 듯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녀가 샛노란 드레스를 입은 채로 앉아 있었다. 이본 남작이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자 이본 남작의 앞에 놓인 칩이 보였다. 산처럼 쌓인 칩은 혼자 딴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양이 어마어마했다.

    “여전히 게임에 강하시군요, 이본 남작님.”

    내가 말을 걸자 이본이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바로 카드 패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게임에서 패배를 선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끌어안았다.

    “카를라!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여기 정말 재미있게 잘 만들어 놓은 거 있죠. 봐요,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즐기다 보니 어느새 칩을 이만큼이나 땄다니까요.”

    이본은 조금 들떠 있었다. 그녀는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마구 말을 쏟아 냈다.

    “그런데 왜 혼자 있어요? 폐하와 함께 있지 않길래, 백작님과 있겠거니 했는데.”

    “백작님과 함께 오지 않아서 저도 그를 찾는 중이었어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봐요.”

    이본이 손사래를 쳤다. 그녀는 누군가의 험담을 할 때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아니에요. 아까 내 남편이랑 같이 나갔는걸요. 들어오자마자 거의 바로 나갔죠.”

    “네?”

    “특별 귀빈이라나? 특별실로 간다고 했어요.”

    믿기 힘든 말이었다. 백작을 찾을 수 없던 이유가 이 짧은 시간 안에 큰돈을 잃고 특별실로 갔기 때문이었다니. 그는 생각보다 더 자제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이 쉬워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 나는 갈 수 없다는 거 있죠.”

    호구 시스템을 모르는 이본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특별실로 가는 기준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들어오자마자 나가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카를라, 당신은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에요.”

    가만히 듣던 이본이 깔깔 웃었다. 뜬금없는 칭찬에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카를라, 나랑 같이 놀래요?”

    “그러려고 왔는걸요.”

    이본은 우리를 비어 있는 테이블로 이끌었다. 내가 이본의 옆에 앉아 테오도르에게 짧게 눈짓하자 그도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셋은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카드 게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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