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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1)화 (51/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1화

쓱 훑어보니 카지노를 만들 땅을 고를 때 쓴 화약이 아직 남아 있는데, 혹시 몰라 여태 보관하고 있던 걸 처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구구절절 말이 길지만 결론은 돈을 달라는 뜻이었다.

안전하게 화약을 처리하려면 폭발시키는 게 최고다. 하지만 그러려면 공터가 필요하고, 공터를 빌리려면 또 돈이 든다.

‘뭐든 다 돈이지.’

한 입 거리로 만든 마들렌을 입에 쏙 넣고는 우물거렸다. 바로 승인한다는 뜻으로 서명을 하려다가, 이내 손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돈 들여서 터트릴 거잖아?’

펜을 들어 서류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당이 충전되어 그런지 머리 회전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어차피 돈 들이고 시간 들여서 처리할 화약이라면, 내가 쓰고 싶었다.

* * *

카지노 사업은 국책 사업이다. 귀족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유흥 업소로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한 덫이었다.

권력은 무력과 돈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급제 사회라 신분 자체가 지니는 힘이 있긴 하나 그들도 권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카지노는 손님이 ‘무조건 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게임인 만큼 이기는 사람보다 지는 사람의 비율이 몇 배는 더 많으니, 사업이 흑자일 건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런 고로 왕은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서 오게. 그대를 이렇게 만나는 게 얼마 만이지?”

“바쁘신 분을 번거롭게 한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그럴 리가 있나. 그대가 원한다면 하루를 통째로 비울 수도 있는데.”

입바른 말을 할 정도로 그녀는 들떠 있었다.

“복도 장식을 좀 바꿔 봤는데, 어떻던가?”

오랜만에 방문한 왕궁은 이전보다 차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폐하의 안목이야 제가 감히 입 댈 곳이 있겠습니까.”

“그대에게는 꿀이 필요 없겠군. 그렇게 달콤한 혀를 가지고 있으니 말이야.”

우리는 서로 듣기 좋은 말을 건네며 웃었다. 왕은 이전처럼 가볍게 손을 흔드는 것만으로 사람을 물렸다. 응접실에는 나와 왕 그리고 테오도르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대가 보낸 서류는 깔끔해서 좋더군.”

“결재만 한 것뿐인데요.”

“그 많던 숫자를 검토한 건 그대가 아닌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별것 아닌 일인데 칭찬이라니, 무슨 꿍꿍이일까 싶었다.

“겸손하긴. 그대는 아직 카지노를 한 번도 보지 못했지?”

“네. 아쉽게도.”

“한 번 다녀오는 건 어떤가. 직접 보는 건 서류로 보는 것과 또 다른 맛이 있거든.”

그건 제안이 아니라 사실상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내부를 꾸미고 있으니, 쭉 돌아보고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말하게.”

“예, 폐하.”

어쩌겠는가. 나는 바지사장이오, 백작 부인일 뿐이니 실질적 보스인 왕이 까라면 까야 했다. 그러나 왕이 내리는 명령만 듣고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다녀오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는 미리 빼 두었던 ‘마지막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 * *

왕이 준비해 준 마차는 호화로웠다. 게다가 맞은편에 앉은 테오도르의 무릎이나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게 오히려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테오도르도 그렇게 느꼈던 것일까. 우리는 자주 눈을 마주쳤다.

“저기 보이는 곳이 그 ‘카지노’입니다, 백작 부인.”

마부가 설명하지 않아도 카지노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홀로 우뚝 서 있는 건물. 심지어 빛을 받아 번쩍거리는 것이,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눈길이 갈 만큼 존재감이 컸다.

카지노로 향하는 길은 숲 사이에 나 있었다. 운치 있다기보다는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길을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화려한 건물에 그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돈을 발라 놓은 듯한 건물이었다. 분홍색, 회색, 흰색이 섞여 오묘함을 풍겼다. 입구는 중앙의 한 곳뿐으로, 양옆에 대리석 조각이 장식되어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입구에 나와 있던 직원이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직원 교육을 누가 시켰는지 몰라도 진짜 잘 시켰다. 백작 부인이 아니라 사장님이라니. 직원의 뒤로 딸랑딸랑, 작은 종이 울리는 환각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뼉을 치자 테오도르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모르는 체하며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내부를 둘러보려고 왔는데. 그쪽이 책임자인가?”

“넵!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안내 담당, 엠폴입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그는 깍듯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내부는 외부보다 더 화려했다. 바닥은 색이 다른 대리석을 이용하여 기하학적인 문양을 만들어 놓았고, 기둥에도 음각으로 조각을 새겨 놓았다.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와 벽에 붙은 조명 덕분에 깊은 내부도 해가 뜬 바깥처럼 환했다.

둥근 홀의 중앙에는 접수처라고 적힌,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접수처입니다. 입장권을 구매하시거나 칩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카지노의 기본 공간 구조는 내가 기획한 만큼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으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접수처는 여러 직원이 상주하여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응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귀족들의 카드 게임 모임에서 돈 대신 물건을 활용하듯 이곳에선 돈을 칩으로 바꾼다. 금전 감각을 흐리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입장권을 구매할 때 돈을 칩으로 바꾸도록 구조를 짜 두었으나 내부에서도 손님이 원한다면 직원들이 곧바로 돈을 칩으로 바꾸어 줄 것이다.

접수처 뒤쪽에 아름답게 짜인 문을 열자 감탄이 나올 정도로 호화로운 게임장의 내부가 보였다.

“어떠십니까?”

“아주 잘 꾸며 놨군.”

빠르게 안쪽 공간을 훑었다. 창문이 없어 밖과 아예 단절된 느낌을 주었고, 시계를 두지 않아 시간의 흐름도 가늠할 수 없도록 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주머니 속 회중시계는 까맣게 잊고 말 테니 이 정도면 훌륭했다. 거울이나 모습을 비출 만한 것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시험 삼아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에 앉으니, 머리 위로 밝은 조명이 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테오도르가 뒤에 서 있는데도 테이블에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시대로 잘 되어 있네. 안쪽을 한번 둘러보지.”

“예. 안내하겠습니다.”

벽면에는 공연을 위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공연 시간은 매일 다르지만, 저녁 시간 이후 공연을 볼 수 있도록 배치했습니다. 각 공연 시간은 게임을 두 판 진행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잡았지?”

“너무 짧으면 재미가 없고, 너무 길면 고객들이 게임보다 공연에 집중하게 되니까요. 공연 내용은 너무 천박하지 않되 자극적인 춤과 마술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직원은 이해력이 좋았다. 금방 출세하겠군. 무대는 구경만 하러 온 귀족들을 공연을 핑계로 눌러 앉히기 위해 구성된 것이다. 식사 이후 나른한 뇌로 공연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러면 주변을 더 둘러보다 게임에 참여할 가능성이 커질 테니까.

“와인은 준비해 뒀나?”

“달콤한 종류 위주로 갖췄습니다. 몇 가지 종류를 섞어 제공할 예정입니다. 특별 귀빈분들께 드릴 위스키는 따로 준비해 두었습니다.”

직원이 몇 가지 와인의 이름을 대었지만, 술 종류를 정확히 모르는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서류에서 얼핏 금액을 본 거 같은데 거기까진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네.’

다행히 직원은 내가 만족했다고 생각했는지 설명을 이어나갔다.

갖가지 테이블을 살펴보며 한 바퀴를 도니 다리가 뻐근했다. 바닥이 푹신푹신한 카펫으로 되어 있는데도 발이 아플 정도로 넓으니, 처음 온 사람이라면 분명 다 돌아보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하게 될 것이다.

“카를라 님, 부축하겠습니다.”

테오도르가 팔을 내밀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거절해도 자꾸만 다가오는 그는 거리를 두자는 내 말을 다 잊어버린 듯했다.

“그래요.”

나는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팔만 잡았을 뿐인데 맥박이 크게 요동쳤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마저 카지노를 훑었다.

이 건물은 도박만 유도하는 곳이 아니었다. 게임을 하다가 늦은 손님을 위한 숙박 시설도 있었고, 우아하게 경치를 구경할 수 있는 식당도 있었다. 식당에는 궁궐 요리사 중 일부를 차출하여 질 높은 요리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여러 가지를 신경 쓰고 만드느라 품이 더 들기는 하였으나 굳이 이곳에 와야 하는 목적을 만들어 주어 자연스럽게 카지노로 이끌려는 속셈이었다.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그는 언제나 같은 대답을 듣는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본 테오도르는 평소보다 더 수려해 보였다. 그의 새파란 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제 특별실로 안내하겠습니다.”

특별실이란 특별 귀빈들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말이 좋아 특별실이지 사실은 돈을 많이 쓴 호구들을 모아 놓는 곳이었다.

특별 귀빈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단 한 가지. 많이 잃을 것. 하루 동안 일정 금액 이상을 잃으면 판돈을 무제한으로 올릴 수 있는 특별실로 안내받는다.

기분 나빠하지 말라는 의미로 고급 위스키를 대접하는 등의 특별 대우를 해 주는 것이다. 이제 찔끔찔끔 잃지 말고 크게 잃으라는 뜻이기도 했고.

특별실은 사 층으로, 숙박 시설의 바로 아래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바로 위층으로 올려 보내기 위해서였다. 아래층의 카지노와 같이 거울과 창문이 없고, 밝은 조명이 켜져 있는 모습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보니 개장 이후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갔다. 사람들이 북적이고 직원들이 그들을 접대하고 있는 카지노 내부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완벽했다. 내가 왕에게 제안했던 것들이 빠짐없이 구현되어 있었다.

“혹시 더 보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깍듯한 물음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상을 보고 싶은데.”

그렇게 본 옥상은, 폭죽을 쏘아 올리기 딱 좋은 환경이었다.

* * *

화려한 불꽃이 새카만 하늘을 수놓았다. 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빛이었다. 건물 옥상에서 쏘아 올린 덕분에 카지노 건물 전체가 번쩍번쩍하게 빛났다.

화약을 폭죽으로 만든 건 다시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 어차피 돈과 시간, 인력이 들어간다면 더 좋은 결과를 내는 게 낫지 않은가. 품이 들기는 했지만, 화려한 개업식에 왕은 크게 기뻐했다.

펑, 펑 터지는 폭죽 소리 사이로 왕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내일 신문의 1면을 장식하게 되겠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건물 안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도 마차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는 마차를 내려다보며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불꽃이 반사되어 반짝였다. 침을 꿀꺽 삼키자 그가 물었다.

“긴장되십니까?”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뇨. 기대되는걸요.”

테오도르가 씩 웃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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