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50화
“당신은 비켜. 내가 직접 하겠소.”
“못 비켜요.”
백작이 으르렁거렸다.
“비키지 못해? 감히……!”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나는 눈을 꽉 감고 다가올 아픔에 대비했다.
‘맞는다!’
그러나 손찌검은 날아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온 테오도르가 백작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백작이 버둥거리며 몸부림을 쳤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이거 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명령이다! 놔!”
“저는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카를라 님의 호위입니다. 백작님의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는 이 저택의 주인이다. 감히 내 명령을 거역해? 이런 건방진……!”
백작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의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백작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잡은 손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붙들었다. 그러면서 눈으로 나를 살피고 안도한 듯 굳어 있던 표정을 풀었다.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놔! 여긴 내 집이라고!”
“카를라 님의 방이기도 합니다.”
테오도르는 다소 강압적으로 백작을 끌고 나갔다. 그는 나가면서 내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리자는 덜덜 떨면서 일어나더니 이내 내게 다가와 물었다.
“마님, 괜찮으세요?”
나는 멍청하고 가여운 하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녀의 눈은 두려움이 아니라 연민과 동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까지 자신이 맞을 뻔했는데 말이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리자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기겁했다.
“놀라셨구나…… 혹시 모르니 얼른 의사를 불러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니, 아니야. 난 괜찮아. 그냥, 그냥…… 지금 상황이 좀 웃겨서.”
“마님, 뭐가 웃긴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도대체 내가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웃음이 나왔다. 심지어 내가 감싼 상대는 매사에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백작의 불륜 상대인데 말이다.
“넌 왜 꼼짝하지 않고 가만있어? 도망가야지. 맞고 싶었어?”
“아뇨! 맞는 건 아프니 싫어요.”
머릿수건 아래로 삐져나온 금발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럼 피해야지. 둔하긴”
내가 이죽거리자 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파란 눈동자가 빠르게 가려졌다 드러나기를 반복했다.
“어째서 피해야 하나요?”
“맞으면 아프다며.”
“하지만 백작님이 저를 때리고 싶으시다면, 당연히 맞아야죠.”
어이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그녀의 눈을 마주 보자, 리자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왜 그러셔요? 여인은 순종적이어야 하잖아요. 위대한 분을 섬기는 종처럼 말이에요.”
아주 불길한 생각이 엄습했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이전에 똑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아 쉽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부인은 순종적일수록 좋지. 신을 섬기는 종처럼 말이오.”
백작, 이 개 같은 새끼. 나는 분노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열었다.
“이전에 머리에 묻어 있던 얼룩, 피였지? 그리고…… 그 상처를 낸 건 백작이고.”
리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백작의 고함 소리가 머나먼 곳에서 시작된 메아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몸속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카를라도 그녀처럼 맞았을까? 아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내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이카루스 백작이 손을 올렸다면 어디든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다.
“백작님이 손을 자주 올리니? 아니, 제일 처음, 언제부터 이렇게 한 건지 말해 봐.”
리자는 커다란 눈만 끔뻑거릴 뿐,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재촉했다.
“대답하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야겠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때리는 건 과한 처벌이었다. 이 미친 세계에서는 보통 수위더라도,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리자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저도 모르겠어요.”
“뭐?”
“백작님은 왜 화가 나셨는지 말씀해 주지 않으시는걸요.”
“그걸 그냥 맞고만 있었다고?”
“네.”
작은 머리통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내가 왜 기함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사랑한다는 사람이 폭력을 휘두르는데 그대로 얻어맞다니, 그건 충성도 뭣도 아니었다. 리자가 다시 물었다.
“마님은 왜 제가 맞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어요? 백작님께 거스르기까지 하셨잖아요. 내버려 두셨으면 백작님이 마님께 손을 들 일도 없었을 텐데.”
화병이 날 것 같았다.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눈앞에서 사람이 맞는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어린 하녀는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얌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해 봤자 넌 모를걸.”
괜한 오지랖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밉살맞아도 온종일 나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이가 맞고 다니는 걸 확실히 알아 버린 이상 두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소설 속 여주인공 리자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나는 백작이 싫었다. 단순히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고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여서가 아니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남을 희생시키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백작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면모에 소름이 끼쳤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나 리자는 싫다기보다 한심한 쪽에 가까웠다. 사사건건 업무를 방해하는 멍청한 옆 팀 신입 같은 느낌이었다. 내 옆에 달라붙어서 쓸데없이 속을 긁기도 하고, 가끔은 간식을 사 왔다며 애교를 부리기도 하는 멍청한 여자애. 종종 백작과 묶어 던져 버리고 싶기도 했다.
아니, 지금도 이불에 돌돌 말아서 저 밖에 가져다 버리고 싶었다. 기껏 남이 구해 줬더니 ‘왜 맞게 내버려 두지 않았느냐.’ 같은 소리나 하고 말이다. 다시 생각하니 얄미운 마음이 들어 일부러 뾰족하게 말했다.
“맞으려면 안 보이는 데서 맞든가. 사람 거슬리게.”
“주의할게요.”
나는 낭창하게 웃는 리자를 흘겨보았다. 진정한 사랑은 무슨.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걸 철석같이 사랑이라고 믿는, 정말이지 얼굴 말고는 예쁜 구석이 없는 하녀였다.
문 너머에서 들리던 백작의 비명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일순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가 리자를 이용해서 아편을 먹인 걸 들키면, 얘는 더 심한 짓을 당할지도 몰라.’
나는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했다. 리자는 마냥 사랑받는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내가 빙의한 카를라가 더는 불쌍한 마님이 아니듯.
* * *
백작은 닷새를 꼬박 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테오도르에게 요란하게 제압당한 덕분이었다. 하녀들은 모이기만 하면 백작이 바닥에 꼴사납게 나뒹굴던 모습을 이야기했다. 내가 못 들은 척 그들을 스쳐 지나간 뒤로는 노골적으로 소곤거렸다.
“테이블을 걷어차고…….”
“세상에 그런…….”
“손을 올리려던 걸 성기사님이 막았대.”
“마님이 가여워…….”
말이 어떻게 돌았는지, 백작은 갑자기 나를 때리려고 하다가 테오도르에게 제압당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정말 이상한 세계였다. 내게는 불륜도 가정 폭력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전자는 그럴 수 있는 일이었고, 후자는 도무지 상종 못 할 인간쓰레기나 할 짓으로 취급했다. 물론 백작은 정말 인간쓰레기가 맞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언제나 아니꼽게 굴던 백작의 얼굴을 보지 않으니 일할 맛이 났다. 왕이 보낸 서류를 속전속결로 처리하고 있으니 회사에 밤낮없이 묶여 있던 과거가 떠올랐다.
‘이곳에 와서 딱 하나 좋은 걸 꼽으라면 억지로 해야 할 업무가 없다는 거였는데.’
서류를 한 장 한 장 검토하고 있으려니 컴퓨터가 절박했다. 카지노의 실질적인 주인은 왕이고, 나는 명의만 빌려주는 바지사장인데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게 떨어지는 수수료가 어마어마하다는 점이었다.
‘돈을 많이 받으니까 이 정도쯤은 할 만하지.’
컴퓨터만 있었다면 30분 만에 완성할 일을 반나절 동안 하고 있는 게 억울하기는 했지만, 내가 받을 정산금을 보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할 수 있었다.
원래 오픈 직전에 가장 일이 많은 법이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양이 많아서 그렇지 크게 중요한 서류는 없었다. 대부분은 공사 비용 결제 요청이었고, 머리를 써야 하는 거라고 해 봤자 자잘한 돈 계산 정도였다.
잘못 기재된 숫자를 고치고, 서류를 새로 작성하는 단순 작업은 반복적인 일이라 하기는 쉬웠으나 지루하고 힘들었다. 다행히 왕의 결재까지 끝나 서명만 하면 되는 서류가 많아 생각보다는 할 만했다. 막바지 단계에 숟가락만 얹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님, 간식 드세요.”
“고마워.”
벨이 든 쟁반에는 머핀이며 마들렌 따위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어른스러운 성격과 달리 달콤한 간식을 좋아하는 그녀는 내 핑계를 대며 주방에서 군것질거리를 조달하곤 했다.
새로 온 주방장이 제과점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는 말에 가장 반색한 것도 벨이었다. 다 먹지 못할 양을 가지고 와 내가 남긴 것을 먹겠다는, 뻔히 보이는 술수를 쓰는 것이 귀엽기 짝이 없었다.
이유야 어떻든 마침 단것이 필요했던 터라 벨이 가져온 간식거리가 반가웠다. 종일 서류만 봤더니 뇌에서 당분을 요구했다. 벨이 서류를 피해 접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마님, 서류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을까요?”
“아니, 그건 내가 다시 확인해야 해. 이쪽에 있는 쓰레기만 좀 치워 줄래?”
벨이 흥얼거리며 쓰레기를 치우고 잉크병에 잉크를 보충해 주었다.
나는 간식을 잘라 입에 넣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좋은 사용인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싹싹하며, 주인이 시키는 일을 훌륭하게 소화해 내곤 했다.
‘백작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흘린 건, 아마 벨이겠지.’
다른 하녀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리자가 소문을 냈을 리 없고, 과묵한 테오도르가 그랬을 리도 없다. 백작이 혼자 소문을 냈을 리는 더더욱 없으니, 남은 건 벨뿐이었다.
‘이유는 몰라도 그런 소문을 내 준 건 고마워.’
돈으로 고용한 사람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라는 건, 고용한 자의 오만함이다. 돈과 지위로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아무리 친밀해도 고용주는 사용인들의 윗사람일 뿐이다.
나는 웃기만 하면 사람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주인공이 아니다. 모나고 뒤틀렸으며 카리스마 같은 건 조금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러니 호의를 받으면 그만큼 돌려주어야 옳았다. 그래야 결정적인 순간,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어날 테니까.
‘휴가를 한 번 보내 줄까. 아니면 핑계를 대서 보너스를 챙겨 줄까.’
달콤한 과자를 우물거리며 마지막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잔여 화약 처리 승인 요청의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