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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9)화 (49/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9화

    창문으로 넘어오던 희미한 빛마저 사라지고, 촛불의 불빛으로 방을 밝힐 때가 되어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도르 경.”

    문을 열어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자를 부르자, 그는 복잡미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네, 카를라 님.”

    “잠시 갈 곳이 있어요. 따라와 줄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다른 사용인도 불러올까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미 사용인들은 평소보다 빠르게 일을 마감하고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언제든 부르면 바로 나올 수 있게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있겠지만, 지금 이 꼴을 일부러 보일 필요는 없었다.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어두운 밤중이라 위험하실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인지 알려 주시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이건 내가 직접 확인해야 할 일이에요. 그동안 주변을 살펴봐 주셨으면 해요.”

    테오도르는 무슨 대단한 각오를 다진 것처럼 예를 갖춰 팔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단단한 팔에 손을 올리려다가 이내 거두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정도는 아니에요.”

    우리는 저택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조용한 복도에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려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밤의 복도는 묘하게 낮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 이질적인 공간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백작의 집무실로 향하는 동안 테오도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내 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집무실의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그와 함께 두 연인의 달콤한 밀어도 흘러나왔다.

    “이번만큼은 안 돼, 리자. 널 두고 가는 건 슬프지만, 가지 않으면 그 여자가 패악을 부릴지도 모르고…….”

    “가여운 백작님, 그분은 진실한 사랑을 모르셔서 그래요. 전 두렵지 않아요.”

    얼씨구. 둘이서 아주 세기의 로맨스를 찍고 있었다.

    열린 서재의 문틈 사이로 엿본 두 사람은 애절한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처럼 보였다. 이렇게 보니 머릿수건을 쓰지 않은 금발의 미인과 키는 작아도 꽤나 탄탄한 몸매를 가진 백작이 그럭저럭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책상 위로 낯익은 도자기 병이 보였다. 리자는 백작에게 등을 돌리고, 술이 담긴 잔에 아편 덩어리를 띄웠다. 아편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리자는 술잔에 든 술을 입에 머금고 몸을 돌려 백작에게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몸을 낮추자, 큰 손이 내 눈을 가렸다. 뒤를 돌아보자, 테오도르가 미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해하지 말아요.’

    나는 입을 뻐끔거려 말을 전하고는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여름날이라도 쌀쌀한 밤인데, 테오도르의 손은 뜨거웠다.

    내가 보지 못한 사이 입맞춤이 끝났는지,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상대를 열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밤은 제 옆에 있어 주세요.”

    “리자, 내 종달새, 오늘따라 고집을, 윽……!”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백작은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휘청이며 주저앉았다. 그에게 기대고 있던 리자도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책상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둘은 한참 동안 바닥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 백작은 내 방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 * *

    저택은 고요했다. 백작이 정해진 합방일에 백작 부인을 바람맞혔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침대 시트가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들었어? 어젯밤에…….”

    “주인님도 너무하시지…….”

    하녀들은 모이기만 하면 수군거리다가, 내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입을 다물었다. 벨은 사색이 된 얼굴로 내 표정을 살폈다. 리자만이 평소처럼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이 너무 잘 풀리니까 오히려 불안할 지경인데.’

    느지막이 일어나 식당으로 향하자, 새로 온 주방장이 공손하게 음식을 내왔다.

    집사가 아는 사람을 데려오겠다는 걸, 내가 지원자 한 명 한 명 직접 면접을 보아 뽑은 사내였다. 새 주방장은 제법 말쑥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고기 요리가 특기로, 생선 요리는 영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가 내민 추천장을 보니 그렇게 대단한 곳에서 일한 건 아니었지만, 먹여 살릴 가족도 없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일한 탓에 여러 약초나 식물에 대해서도 빠삭하다는 점이 가산점을 줄만 했다.

    그는 솜씨가 퍽 좋았다. 합방한 다음 날인 만큼 식탁에 놓인 것은 모두 먹기 쉽게 만든 것뿐이었다. 콩소메 수프와 으깬 감자, 한입 크기로 자른 샐러드와 오트밀 죽, 그나마 씹을 건더기가 있는 건 파이였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고기도 잘게 다진 것이었다.

    새로 온 주방장도 마음에 들었으나 최근 바뀐 사용인들의 태도도 딱 내가 의도한 대로였다. 그들은 내가 백작에게 청한 덕분에 전 주방장이 목숨을 부지한 채 저택 밖으로 쫓겨났다는 걸 알고 이전보다도 더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식기를 들었다.

    먹기 쉬운 것들이었으나 하나하나가 깊은 맛을 가지고 있어 식사는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콩소메 수프는 말할 것도 없고, 으깬 감자는 치즈를 넣었는지 부드럽고 쫀득했다. 샐러드는 갖가지 소스가 어우러져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퍼졌다.

    승리에 맛이 있다면 분명 이런 맛일 게 분명했다.

    * * *

    백작은 해가 질쯤에야 얼굴을 내밀었다. 방에서 느긋하게 책을 읽는 중이었는데 문을 거칠게 두들기는 소리가 집중력을 흐트러트렸다. 내 허락에 리자가 문을 열자마자 백작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카를라, 할 말이 있소.”

    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약속된 합방일도 지키지 않은 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한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보는 얼굴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저건 양심이라는 게 없는 걸까? 아니면 혹시 양심이 아니라 뇌 자체가 없는 건가?’

    차가 식어 벨을 주방으로 보낸 것이 다행이었다. 이런 요란한 꼴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되었으니.

    나는 눈에 힘을 주고 턱을 들어 올렸다.

    “무슨 일이시죠?”

    “결코, 결단코 당신을 서운하게 할 생각은 없었소.”

    “그런가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면 듣겠어요.”

    “믿어 주는 거요?”

    “글쎄요. 믿는 것과 듣는 건 별개의 일이니까요.”

    이카루스 백작은 옆에 있는 리자를 한 번 보더니 이를 악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에 나도 테이블 위에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는 사과 대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그럴 일이 있었소. 어차피 당신은 이해하기 힘든 얘기이니, 이해해 주길 바라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제대로 말씀해 주지도 않고 무조건 이해하라고만 하시다니요. 저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어요.”

    당연히 백작은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정부와 즐기는 게 자연스러운 세계라지만 부인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정부와 밤을 보낸 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다른 날을 잡고 싶어서 온 거요. 너무 화내지 마시오. 응? 당신이 좋아하는 날로 잡으면 어떻소? 합방일은 중요한 날이니까 말이오.”

    온종일 숨어 있던 주제에 이제 와서 하는 말이 다시 날을 잡자는 거라니. 내가 정말 그를 사랑했더라면 머리통을 책으로 실컷 두들겼을 것이다.

    카를라였다면 입술을 깨물며 순순히 이해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자존심이 상해 밤새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면서도 백작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백작님, 말씀하신 대로 합방일은 중요한 날이죠. 하지만 제가 마음을 추스르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요. 그러니 다음에 이야기하시죠.”

    강하게 축객령을 내렸지만, 백작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손을 잘게 떨고 있었다. 눈 밑은 퀭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밋밋한 얼굴이 더욱 초라해 보였다.

    거기다가 이전에 맡아 본 적 있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양귀비를 으깼을 때와 비슷한 냄새였으나, 그보다 더 독하고 역겨웠다.

    ‘아편을 먹으면 이런 냄새가 나나? 아니면 술이 덜 깬 걸까?’

    그는 연신 입술을 핥으며 무엇을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뭔가 마실 것 없소?”

    “마침 차를 다시 끓여 오라고 하녀를 내려보낸 참이라.”

    백작은 도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자 나는 목소리를 높여 다시 축객령을 내렸다.

    “백작님, 저는 지금 몹시 피곤하고 지쳐 있답니다. 중요한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이만 나가 주세요.”

    “당신이 좋은 날로 다시 합방일을 잡자고 말하지 않았소? 내가 이렇게까지 애원하는데 그냥 넘어가면 될 것을!”

    “피곤하다고 재차 말씀드렸어요.”

    나는 짜증스럽게 뱉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뒤에 서 있던 리자가 백작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백작님, 이러지 마세요! 저만을 사랑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리자의 말에 백작의 눈이 커졌다. 나는 이 흥미로운 상황을 말없이 지켜보기로 했다.

    “아니, 내가 언제……!”

    “어젯밤에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영원히 함께할 사람은 저뿐이라고!”

    그녀는 사랑의 묘약이 가진 효과를 맹신하고 있는 모양이다. 덕분에 계획을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리자가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간 내가 저지른 일이 탄로 날 수도 있다.

    그녀를 저지하려고 입을 떼는 순간, 강한 바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백작이 한 손을 강하게 휘두른 것이었다.

    리자는 그 손에 어깨를 맞고 뒤로 쓰러졌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바닥에 테이블과 책이 나뒹굴었다. 백작은 무슨 생각인지 넘어진 자세 그대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하녀 주제에 건방지게!”

    그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해칠 것같이 흉흉했다. 만약 이대로 그를 내버려 두면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너만 오지 않았…….”

    백작이 말을 마저 끝내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작은 그녀에게 더 다가가지는 않았지만, 대신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행패죠?”

    “비키시오.”

    “갑자기 왜 이러시는지 도통 모르겠군요.”

    “감히 주인 내외의 말을 끊었잖소.”

    이 상황은 어딘가 이상했다. 리자는 그의 정부였고, 매번 헛기침과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그녀가 건방지고 앞뒤 못 가리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끊었다고 이렇게 난폭하게 굴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어쩌면 이건 제 정부를 괴롭히는 걸 내게 보여 주며 제가 한 짓을 정당화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대신 벌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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