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7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주방장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제 죄를 무지로 덮고 용서를 구할 뿐 저번처럼 백작을 언급하진 않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마님. 제가 무지한 탓입니다.”
“마님, 저희는 정말 몰랐어요.”
“그런 무서운 짓은 감히 꿈에도 생각지 않았어요.”
백작가의 사용인들은 사교 활동을 크게 하지 않는 조용한 안주인보다 백작에게 더욱 충성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 중 카를라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 노력하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텐데 주방장이 백작의 명을 조용히 따른 것만 봐도 그랬다.
사용인은 고용인의 명령이 부당한 것이더라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니 웬만한 일로 그들을 처벌할 생각은 없었는데…….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만드는 사용인들이 백작의 손아귀 안에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을 순순히 넘어가면 다음번엔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을 테니, 그 전에 확실히 사용인들의 주도권을 잡아야 했다.
한참 동안 대꾸하지 않자, 결국 집사가 입을 열었다.
“마님…… 진정하시고 심호흡을…….”
“내가 진정하게 생겼는가?”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집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용기를 내 다시 한번 도전했다.
“마님, 무슨 오해를 하신 게 아닐지…….”
“위대한 분이시여, 당신의 은혜로 간사하고 교활한 악의를 밝힐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고…….”
기도하는 척 그녀의 말을 무시하자 집사는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흐느끼는 척도 했다.
“마님, 저희는 정말 몰랐어요!”
“그럼 어째서 합방일 전에 꼭 이 꽃을 내 식사에 섞어 올렸지? 아아, 사악한 자들이 내 주방에 도사리고 있었구나!”
“아이고, 백작님이 꽃을 쓰라고 해서 쓴 것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백작님이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냐? 주인에게 제 죄를 덮어씌우다니! 위대한 분이시여, 제가 무슨 죄를 지었나이까…….”
나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몸을 가볍게 들썩였다.
‘이렇게 요란하게 굴면 백작이 일부러 나에게 아까시나무꽃을 먹였다는 의심도 심어 둘 수 있겠지.’
아까시나무꽃과 관련된 민간요법을 들어 보지 못한 자들도 이번 소란을 이야기하며 백작에 관한 의심을 증폭시킬 것이다.
집사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다가, 이내 슬그머니 문밖으로 도망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족치고 싶었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백작이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뒤로 집사가 덜덜 떨며 따라 들어왔다. 나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씩 웃었다.
백작은 소란스러운 식당을 훑어보고는 의자에 앉은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단번에 혈압이 올랐으나,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깊게 했다.
‘난 지금 사용인들에게 배신당해서 매우 힘든 상태의 백작 부인이다. 진정하자. 백작이 자백하든 하지 않든, 내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야 해.’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고 백작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도무지 정숙하지를 못해. 쯧.”
백작은 이야기도 듣지 않고 나를 몰아세웠다. 카를라에게도 그랬겠지. 당당했던 그녀가 위축될 만도 했다. 모든 이를 등지고 선택한 제 남편이 자신의 편을 들긴커녕 매번 이렇게 그녀를 깔아뭉갰을 테니 말이다.
“사용인들이 제게 독을 먹이고 있었어요.”
“무슨 소리요?”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주방장이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막는 음식을 먹였더군요.”
일부러 연기하지 않아도 저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심지어 백작님이 시켰다며 모함하기까지…….”
백작은 표정을 가다듬으려 노력했으나 눈을 자꾸 깜빡이고 입술을 혀로 핥는 등, 초조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나는 그가 다른 생각을 하기 전에 몰아붙였다.
“정말 백작님이 그런 짓을 시키셨나요?”
“아니! 그럴 리가!”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부정부터 하게 되어 있다. 백작도 훌륭하게 내 말을 부정했다. 주방장의 배신감 어린 얼굴이 그를 향했다.
“큼, 나는 아까시나무꽃에 그런 효능이 있는 줄도 몰랐소.”
그는 당황한 나머지 말실수까지 했다. 아까시나무꽃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걸 입 밖으로 냈다는 건,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알아차린 집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걸 깨닫지 못한 백작은 쩔쩔매며 나를 달래려고 애썼다. 우스운 꼴이었다.
“몸에 독이 되는 음식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상에 올려? 그런 주제에 감히 주인을 모욕하고 백작가의 후계를 노리다니!”
그는 과하게 화를 내며 주방장을 탓했다. 주방장이 눈물 지으며 무어라 항변하려 했으나,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메마른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백작은 그런 나를 힐끔 보더니 목소리를 더욱 높여 외쳤다.
“저 몹쓸 자의 혀와 손을 자르고, 채찍으로 엄히 벌하도록! 반항하면 죽여 버려도 좋다.”
소름 끼칠 정도로 잔인한 말이었다.
‘도둑질만 해도 손을 자르는 세상이라고 해서 엄하게 굴 건 예상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더 과하게 구는군.’
내가 노린 건 두 가지였다. 그중 첫 번째는 백작이 눈치를 보게 만드는 것이었다. 불륜은 흔한 일이라 그가 고개를 뻣뻣하게 들 수 있었지만,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뒷공작을 한 걸 들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는 이 소란이 지나가고 백작이 혹시나 자신의 비도덕적인 행동이 알려질까 두려워하며 갑갑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백작님, 진정하세요.”
“내가 진정할 수 있겠소?”
“저는 젊으니 얼마든 아이를 가질 수 있는걸요.”
그리고 두 번째는 백작가에서의 내 입지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우선은 내 입에 들어가는 음식을 백작이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주방장을 내 사람으로 채워 넣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른 주방 하녀들에게도 내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새겨 주어야 했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쫓아내는 것으로 용서해 주세요. 위대하신 분도 피를 보는 것은 좋아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백작이 내 핑계를 대며 과한 벌을 내리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저는 오히려 백작님이 아이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무척 기뻐요.”
카를라가 되어서 알게 된 점 중 하나는, 나는 생각보다 더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이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았는데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좋아. 그럼 다른 주방장을 찾으면 당장 내쫓아 버리겠소.”
“백작님은 역시 상냥하세요. 벌써 저희의 합방일이 기대되어요.”
등 뒤에서 아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리자는 정말이지 내 도발에 잘도 걸려들었다.
* * *
마음의 상처를 쇼핑으로 달래겠다는 말에 평소라면 투덜거렸을 백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선심 쓰듯 사인한 수표장을 건네주었다. 이본 남작과의 약속인데도 핀잔을 주지 않는 걸 보니, 적어도 일주일은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 같았다.
집사에게 장부 정리를 배우는 벨 대신 리자를 데리고 마차에 올랐다. 약속 장소인 백화점은 수도에서 가장 큰 상점이라는 소문처럼 거대했다. 왕성만큼이나 화려했고, 번쩍거리는 장식으로 눈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카를라!”
이본은 그런 곳에서도 눈에 띄는 화려함을 자랑했다.
“오래간만이에요!”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아요. 어머나, 당신 하녀도 금발이군요? 예쁘기도 하지.”
“이본 남작님, 저는 백화점이 처음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니 안내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본은 리자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이본의 전담 하녀 또한 그녀와 안면이 없는 눈치였다. 리자는 이본의 말에 바짝 굳었다가, 내가 모르는 척 말을 돌리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백화점이 처음이라고요?”
“네.”
“왜 여길 아직도 안 와 봤어요? 작년에 지어진 후로 얼마나 유난이었는데요.”
작년에 지어졌다면 분명 카를라도 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백작에게 예산을 돌려주기 위해 아끼느라 수중에 돈이 없었을 테니까. 거기다가 가슴앓이를 하느라 저택 밖을 돌아다니지 않았으니, 와 보았을 확률은 매우 낮았다. 이본은 나를 놀라게 해 주겠다며 한껏 들떴다.
“당신도 좋아할 게 틀림없어요. 난 여기 개점하자마자 일주일 내내 찾아왔거든요.”
그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백화점 안은 화려했다. 이본의 저택처럼 넓은 중앙 광장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늘어져 있었고, 유리인지 수정인지 모를 것들이 빛을 반사해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백화점 내부는 한국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없어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사치품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재미있는 법이었다.
새끼 양의 가죽으로 만든 장갑, 비단으로 만든 부채, 자그마한 손가방과 작은 조각으로 장식한 브로치……. 예쁜 것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거기다가 각 가게의 벽이 어떻게 꾸며져 있는지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특히나 잎담배를 파는 곳은 눈을 내리깔고 술과 담배를 즐기는 미인이, 술을 판매하는 곳에는 탐스러운 포도를 든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게 대비되어 참 인상 깊었다.
“카를라, 여기가 제 단골 보석점이랍니다.”
이본의 단골 가게는 백화점의 안쪽에 있었는데, 가게 세 개 정도의 크기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유리 장식장 안에 반짝이는 보석들이 즐비했다. 한쪽에는 원석이, 한쪽에는 액세서리로 가공된 보석이 줄지어 장식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본 남작님.”
점원은 이본의 얼굴을 보자마자 노란 보석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전부 비슷비슷하게 보였지만, 그녀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어머, 저 토파즈의 색 좀 봐. 황금처럼 진한 노란색이라니, 너무 예쁘다.”
“알이 크고 예쁘니 반지로 만들면 정말 잘 어울리실 겁니다.”
“좋아. 우선 그걸로 하나 줘요.”
이본의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자 다른 점원이 나와 응대하기 시작했다. 그는 꽤 높은 직위의 사람인 것 같았는데, 말이 아주 청산유수였다.
“마님의 눈처럼 빛나는 보석은 어떠신가요? 흔하지 않은 검은 오팔입니다.”
“괜찮아요. 얼마 전에 선물받은 게 있어서. 검은 보석이란 보석은 다 가지고 있는 거 같아요.”
“저희는 다양한 보석을 취급하고 있으니 새로운 종류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직원이 집요하게 물었다. 나는 왕이 선물한 보석들을 떠올렸다.
“아마 검은색 보석은 거의 다 가지고 있을걸요? 비취, 토르말린, 다이아몬드, 스피넬이랑 사파이어도 있었던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