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6)화 (46/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6화

    * *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뭘 제대로 한 것 같지 않은데 하루가 지나 있고, 잠시 눈을 감았다 뜨니 한 주가 지나 있었다.

    리자가 한동안 도끼눈으로 나를 노려보긴 했으나, 벨이 몇 번 쥐어박자 얌전해졌다. 합방일이 다가오자 점점 신경이 예민해졌는데, 그중 가장 거슬리는 것이 음식이었다.

    주방장은 이틀 전부터 아까시나무꽃을 이용한 음식을 내왔다. 튀기거나 조리는 것은 예사고, 소스나 차에도 꽃이 둥둥 떠다녔다. 심지어는 빵에도 꽃잎이 들어갔다.

    ‘심각한데.’

    반찬 투정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틀 내내 끼니마다 아까시나무꽃이 나오는 건 이상했다. 특히 아침부터 꽃으로 만든 수프를 마시자니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아까시나무꽃이 아이를 떨어트리는 데 쓰는 약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괜히 더 신경이 쓰였다.

    “주방장, 왜 자꾸 아까시나무꽃을 내오는 거지? 불만이 있다면 이러지 않아도 들어주겠네. 이유를 말해 봐.”

    주방장을 불러 쏘아붙이자 그는 넙죽 엎드리며 말했다.

    “불만이라니요! 그럴 리가요. 백작님이 지시하신 사항입니다.”

    “백작이? 아니, 백작님이?”

    “예. 마님께서 아까시나무꽃을 좋아하시니 필히 넣으라고 백작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주방장은 ‘필히’와 ‘특별히’에 악센트를 주었다. 그는 신경이 예민한 카를라를 위해 백작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이전에도 합방일 전후에는 꼭 아까시나무꽃으로 음식을 만들었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백작이 지시했다는 말에 등에 소름이 끼쳤다. 당장이라도 그의 멱살을 잡고 무슨 꿍꿍이냐고 윽박지르고 싶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고의로 내린 지시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아. 아까시나무꽃을 합방일 전에 먹어 봤자 의미가 없으니, 백작이 효능을 알고 있는지도 불분명하고.’

    그러나 배 속에 아이가 없다는 걸 알아도, 빵을 먹다가 꽃잎을 씹는 건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백작의 지시라니 더더욱 불만스러웠다.

    “그래서 온갖 음식을 꽃 범벅으로 만들었다는 거지.”

    짜증스러운 기분에 턱을 괴고 투덜거리자 주방장은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애꿎은 사람을 괴롭힌 거 같아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손을 내저었다.

    “앞으로 식사는 평범하게 내와.”

    주방장은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애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오늘 방문하실 마리 자작 부인께 드릴 차도 아까시나무꽃으로 준비하였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리가 방문하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차가 바뀌면 다과도 바꾸어야 하고, 다과가 바뀌면 식기도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일을 지시한 게 백작인 걸 알게 된 이상, 얌전히 아까시나무꽃을 섭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꿔.”

    주방장은 숫제 목을 놓아 울 기세였다. 그때, 집사가 다가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마리 자작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초대한 손님에게 빈 찻잔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리는 아직 임신부가 아니니 괜찮을 거라 판단했다.

    “어쩔 수 없지…… 준비한 차를 내오도록 해.”

    * * *

    오랜만에 만난 마리는 여전히 신실한 신자의 모습으로, 수수한 차림새에 흰 밀짚모자를 꽃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어서 와요, 마리.”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날씨가 좋아 정원에 자리를 마련했어요.”

    정원을 소개하자 마리는 기쁜 얼굴로 연신 감탄을 뱉었다. 양귀비로 가득한 정원을 둘러보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어머나, 그때 모자를 꾸민 꽃은 정원에서 키우던 거였군요!”

    “네. 꾸민 지 얼마 안 되어 미흡한 곳이 많지만, 어여삐 봐 주세요.”

    “아니에요. 근사한걸요. 저도 정원을 이렇게 가꾸고 싶어요.”

    “마리가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네요.”

    우리는 서로 가벼운 칭찬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결혼을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며 웃는 그녀는 행복해 보였다. 다행히 그녀의 예비 남편인 자작은 마리를 매우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정부를 두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했다고 한다. 이런 세계에서도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가 있다는 사실이 기쁘게 다가왔다.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어.’

    차를 마실 테이블은 양귀비 무리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차가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마리가 자리에 앉자 벨이 찻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차를 따랐다. 미리 찻잔에 넣어 둔 꽃잎이 예쁘게 펼쳐지는 게 보였다.

    “아까시나무꽃이에요. 몇 번 튀겨 먹어 보았는데 맛이 꽤 괜찮더라고요.”

    “참 예쁘네요.”

    마리는 기쁜 듯 말하였으나 찻잔을 한 번도 들지는 않았다. 함께하는 상대와 차 마시는 속도를 맞추는 건 기본적인 예의였다. 마리는 예의에 민감한 사람이었으니, 내가 찻잔의 바닥을 볼 때까지 그녀의 차가 한 모금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알레르기가 있나요? 차가 줄어들지 않네요.”

    “아니에요. 알레르기는 없어요.”

    마리는 곤란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아직 식을 올리기도 전이지만 사실은…… 아이를 가지고 싶어서 준비하는 중이라 음식을 가리는 중이에요.”

    그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잘 알려지지도 않은 민간요법 중 하나이긴 한데, 아까시나무꽃을 달여서 마시면 얼마간 아이를 가지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있어서요.”

    마리는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굽은 어깨가 안쓰러웠다.

    “죄송해요. 너무 까다롭게 굴었지요? 이런 건 다 미신인데 말이에요.”

    그녀는 내 어깨 너머를 힐끔 바라보았는데, 아무래도 테오도르를 의식한 거 같았다. 나는 눈치 없는 테오도르가 입을 열기 전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너무 무심했어요. 마리가 곧 결혼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했어요. 다른 차를 가져오라고 할게요. 진저 티는 어때요?”

    “고마워요. 좋아하는 차예요.”

    아이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은 신경 써야 할 게 많구나. 나는 마리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벨은 금방 차를 다시 끓여 왔다. 마리의 앞에 놓인 찻잔이 바뀌자 그녀의 표정도 한결 나아졌다.

    예절에는 어긋날지 몰라도 마리가 편안하게 차를 마시는 걸 보니 마음이 놓였다. 카를라도 저랬을까, 생각하다가 이전에 보았던 책의 문장이 떠올랐다.

    [원하지 않는 아이를 얻었을 때, 생화 200송이를 구강 섭취한다. 향기도 효과가 있다.]

    그때는 이미 가진 아이를 떨어트리는 용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리의 말을 듣고 보니 피임 효과도 있는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 주방장이 했던 말도 귓가를 울렸다.

    “아까시나무꽃을 좋아하시니 필히 넣으라고 백작님께서 특별히 지시하셨습니다.”

    이전에도 카를라와의 합방일 전에 아까시나무꽃을 먹였다면, 그녀에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카를라는 자신의 부도덕함 때문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믿었으나 백작이 그렇게 만든 거였다.

    아침에는 그저 의혹이었을 뿐이었던 것이 명확해지자 소름이 끼쳤다. 백작은 고의로 카를라에게 피임약을 먹여 온 것이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지?’

    이카루스 백작은 결혼 상대를 물색하며 만나던 여러 상대 중 카를라를 선택했다. 불륜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녀와 바로 이혼하지 않은 걸 보면 더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할 이유가 있나?’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마음이 묵직했다. 다행스럽게도 마리는 자신의 결혼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어 내가 정신을 다른 곳에 빼놓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이도 얼른 아이를 가지고 싶대요. 얼른 제가 ‘진짜 안주인’이 되면 좋겠다나요?”

    “진짜 안주인이요?”

    “아, 그이의 말버릇이에요. 그러니까, 후계가 있으면 집안이 안정되고 안주인의 발언권이 좀 더 강해지잖아요. 제가 그이를 휘둘렀으면 좋겠대요. 후후, 귀엽죠?”

    “자작님이 귀여우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 분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겠어요.”

    “아이, 카를라도 참! 놀리지 말아요.”

    손사래를 치면서도 마리의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아이가 있으면 저택 내에서 발언권이 강해진다. 그렇다면 이카루스 백작은 카를라의 발언권이 강해지지 않기를 바란 게 틀림없었다.

    ‘카를라의 발언권이 약해지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으니까.’

    아이를 빌미로 카를라를 더 간절하게 만들 셈이었을 거다. 정말 치졸한 남자였다.

    결혼식 이야기를 즐겁게 떠드는 마리는 행복하냐고 묻지 않아도 정말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카를라에게도 저런 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백작을 용서할 수 없었다.

    * * *

    마리가 돌아간 후, 나는 주방장과 주방 하녀들을 모두 식당으로 불러 모았다. 그 갑작스러운 호출에 집사도 상황을 살피러 식당에 들어왔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식당에 모여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대들을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내게 독을 먹이려고 한 자를 찾기 위해서다.”

    순식간에 식당이 조용해졌다. 사용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린 하녀들은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주방장, 그대가 내게 먹인 요리에 독이 있었어.”

    “아닙니다! 마님, 제가 어찌 감히 마님을 해치려고 하겠습니까!”

    “목적이 내가 아니었으니 더 문제지.”

    최대한 우아해 보이도록 다리를 꼬고 허리를 의자 깊숙이 기대었다.

    “알고 있나? 아까시나무꽃을 자주 먹으면 아이가 떨어진다더군.”

    히익, 하고 등 뒤에서 리자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앞에 있는 이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폈다. 대부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이고 있었으나 딱 두 사람의 태도가 눈에 띄었다.

    한 사람은 집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주방장이었다. 집사는 입을 일자로 오므리고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주방장은 초조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분위기를 몰아가기 위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혼한 지 이 년이 지나도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아 백작님께 얼굴을 들 수가 없었는데…….”

    나는 잠시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어 눈을 가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을 내뱉었다.

    “누가 이런 술수를 부렸는지 기필코 밝혀낼 생각이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