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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5)화 (45/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5화

“너무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 넘기면 되니까 못 하겠거든 언제든지 말하렴.”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님.”

워낙 야무진 터라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벨이 힘들어하면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굳이 벨을 집사에게 붙여 장부 관리를 가르치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선물뿐만 아니라 카지노로 번 돈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

지금은 가진 돈이 없어 자금을 운용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금액이 커지면 나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을 거다. 거기다가 곧 카드 게임 모임에서 번 패물들이 도착할 테니 그 전에 벨을 집사에게 붙여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없애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백작은 탐욕스러운 작자였다. 내게 큰 금액이 들어오는 걸 알면 욕심을 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집사가 내 지갑 사정을 눈치채면 백작에게 쪼르르 가서 이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집사를 통하지 않고 선물을 관리할 필요가 있어.’

그런 계산을 모르는 벨을 이용하는 게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그녀에게는 돈으로 보상하기로 생각해 두었다.

“적당히 착복하는 것 정도는 봐줄 테니 열심히 해 보렴.”

“당치도 않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농담이야. 그래도 그만큼의 수당은 따로 챙겨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웃으며 벨을 놀리다 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게도 뭔가 떨어지는 게 있으면 하는 속셈이 빤히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하찮고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어깨를 과장되게 주무르며 하품을 했다.

“돌아다녀서 그런지 피곤하네.”

그러자 벨이 눈치 빠르게 물었다.

“홍차를 타 올까요?”

“응. 그리고 주방에 가서 뭐든 좋으니 차와 어울리는 가벼운 간식을 곁들여 달라고 전해 줘.”

“네, 마님.”

벨을 주방으로 보내고 리자에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속삭였다.

“리자, 네게 부탁할 게 있어.”

“네, 마님. 뭐든 시켜 주세요.”

리자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저번처럼 백작님의 집무실에서 술을 한 병 가져올 수 있을까?”

그녀는 눈을 깜빡이더니 금방 가슴을 치며 활기차게 말했다.

“그럼요. 물론이죠!”

내 명령에 한 점의 의심도 하지 않는 하녀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리자는 자신에게도 일을 주는 게 마냥 좋은지 들뜬 티를 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벨이 차를 가져오기 전에 얼른 다녀올게요!”

“백작님이 계시면 무리해서 가져올 필요는 없어.”

“네!”

해맑게 웃으며 방을 나서는 모습에 죄책감으로 가슴이 따끔거렸다. 벨과 리자가 나간 직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그머니 방문을 열었다. 인기척이 크지 않았을 텐데도 테오도르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테오도르 경, 이전에 맡겼던 물건을 돌려주실 수 있을까요?”

“예.”

그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제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화장품 병을 꺼내 주었다.

병 안에 든 아편은 마지막에 본 그대로 뭉쳐져 있었다. 나는 손바닥에 병을 감추고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내가 다시 문을 닫으려고 하자 테오도르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카를라 님.”

“네, 테오도르 경.”

우리는 문틈 사이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항상 올라가 있던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침울한 듯 내려가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쉽게 말을 뱉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위대한 분이 카를라 님의 길을 인도해 주시길.”

축복의 말에 차마 대꾸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의 시선은 한 번도 내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손바닥의 반도 가리지 못하는 화장품 병이 무겁게 느껴졌다.

* * *

벨보다 리자가 먼저 방으로 돌아왔다. 주방에서 주전부리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녀는 우쭐거리며 병을 내밀었다.

“지난번에 가져왔던 가짜 글렌다를 가져왔어요!”

리자가 가져온 병의 내용물은 이전에 보았을 때와 달리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업적을 자랑했다.

“가장 안쪽 서랍에 넣어서 자물쇠까지 걸어 뒀지만, 이 괴도 리자에게 걸리면 순식간이죠!”

벨의 말대로 리자는 하녀가 아니었다면 좀도둑 혹은 노름꾼이 되었을 터였다. 잔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자물쇠가 걸린 서랍 바로 위의 서랍을 통째로 꺼내 술을 훔쳐 왔다고 한다. 위아래로 칸막이가 없는 서랍이라 쉬웠다며 떠드는 리자를 보니 이쯤 되면 그녀가 똑똑한 게 아니라 백작이 멍청한 것이었다.

“잘했어.”

대충 치하의 말을 던지고 술 뚜껑에 술을 따랐다. 이전과 또 다른 술을 채워 놓았는지 지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너도 마실래?”

“네!”

술 뚜껑을 건네자 리자는 단번에 술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크으, 하고 이상한 소리까지 내는 걸 보니 어지간히 독한 술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독한 술이라면 아편을 넣어도 크게 맛의 변화가 없을 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쓴맛을 감출 절호의 기회였다. 리자가 헤실헤실 웃으며 다시 술 뚜껑을 내밀었다. 나는 순순히 그녀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고작 두 잔을 마셨을 뿐인데 리자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술병의 주둥아리에 묻은 액체를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니, 화한 기분과 함께 금방 기화되는 게 보였다. 불을 붙이면 그대로 타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나게 독한 술이네. 이런 술은 아편의 효과가 어느 정도로 나올지 가늠하기가 힘들어.’

백작이 아편을 섭취하지 않아도 이 술만 마신다면 다음 날 아침까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서랍에 숨겨 놓기까지 한 술이니 합방일에 이걸 마시게 유도하기도 어려울 게 분명했다.

어차피 어떤 술을 가져오건 상관없었다. 내겐 더 확실한 방법이 있으니까.

해맑은 리자의 얼굴을 보자니 죄책감이 들었지만, 예전에 그녀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분노를 끌어올리려 애썼다.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요.’

그 낭창한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자니 생겨났던 죄책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분노가 뒤덮었다. 아무리 예쁘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하고 있었어도 카를라에게 리자는 어마어마한 쌍년이었다. 나는 감춰 두었던 도자기 병을 꺼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이게 뭔지 아니?”

“아뇨!”

나는 도자기 병을 기울여 손바닥에 아편 덩어리를 올려놓았다.

“이건 사랑…… 의 묘약이야.”

낯부끄러운 소리에 말을 조금 더듬기는 했지만, 리자를 속여 넘기기엔 충분했던 모양이다. 리자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아편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사랑의 묘약이라면, 소설에 나오는…… 마음을 조종하는 약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 비슷한 거.”

다시 아편 덩어리를 도자기 병에 넣고 흔들자, 도자기 벽에 부딪힌 아편 덩어리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양심이 흔들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걸 술에 탈 거야.”

“마님!”

“네가 백작님의 침대를 덥히고 있다고는 해도, 그의 부인은 나잖니?”

리자를 도발하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동공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백작님의 마음을 내게 돌리려고.”

“어, 어떻게 제게 그러실 수 있어요?”

“못 할 건 또 뭐니.”

정부와 본부인 사이였다. 원래라면 머리채를 쥐고 뺨을 때려도 시원치 않을 일인데, 이 머리가 꽃밭인 아가씨는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코웃음을 치자 리자가 주먹을 꽉 쥐고 대거리했다.

“배, 백작님께 말씀드리겠어요.”

“그러렴. 그럼 술을 누가 훔쳤는지도 말해야 할 텐데. 백작님이 널 봐주실까? 이게 처음도 아니잖아.”

백작이 리자에게 무르다고는 해도, 사용인이 서재 서랍을 뒤진다는 건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단지 내 명령에 따랐을 뿐이지만 백작이 나를 질책하려면 리자 또한 질책해야 했다. 그렇다면 백작 부인인 나보다는 리자에게 더 큰 벌이 내려질 게 뻔했다. 나는 그녀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이게 독도 아니고, 부인이 남편에게 사랑의 묘약을 마시게 하는 건, 크게 문제 될 게 아니란다.”

어느 변호사가 수많은 범죄자를 무죄로 만들어 준 비법 중엔 이런 게 있다고 했다. 자신의 말이 옳다고 믿을 것. 뻔뻔하게 말할 것. 나는 되지도 않는 궤변을 태연하게 지껄였다.

“그리고 그냥 마시기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닌걸. 마시고 나서 가장 처음 관계를 맺은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거니까.”

그런 편리한 게 있다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로워졌을 거다. 그러나 바보 같은 리자는 내 말에 홀랑 넘어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런…… 그런 짓은 신께서 용서치 않으실 거예요.”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술을 마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흔들기는 쉬웠다. 감정이 격해진 그녀는 합방에 관한 얘기를 듣지도 못했으면서 술을 마신 백작이 나와 밤을 보낼 거라 생각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런 보장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나는 거한 아량을 베푸는 척 말을 이었다.

“가여운 것. 내가 뭘 할지 궁금하니?”

“…….”

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도자기 병을 흔들어 소리를 내며 말했다.

“다음 주의 마지막 날, 나는 합방 전에 백작님께 이 약을 먹일 거란다. 그날 밤이 지나면 그분은 평생 나만을 사랑하게 되겠지.”

스치듯이 본 리자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충분히 계산할 시간을 주었다. 그래야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것이므로.

마침내 가느다란 손가락이 치맛자락을 쥐었다. 그녀의 눈이 나를 똑바로 쏘아보았다.

“마님은 정말 불쌍하신 분이에요.”

“내가?”

“진정한 사랑을 모르시니까 이런 짓을 하실 수 있는 거예요.”

언제 들어도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어쩌면 그녀의 머릿속에는 뇌 대신 꽃밭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닐까.

‘그 진정한 사랑, 둘이서 실컷 해라.’

나는 화장대 가장 위의 서랍을 열고 도자기 병을 넣어 두었다. 그러곤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리자에게 웃으며 명령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아까 있던 자리에 돌려놓고 오렴.”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으나 알 바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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