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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4)화 (44/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4화

나는 그의 설명을 절반쯤 흘려들으며 신전을 살폈다. 온통 흰 공간이라 특별한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슬금슬금 우리 주변을 맴돌며 테오도르의 설명을 엿들으려 애썼다. 그중에는 나와 눈을 마주치면 어떻게든 말을 걸어 보려고 애쓰는 무리도 있었다. 테오도르가 잠시 설명을 멈춘 틈을 타서 살며시 다가온 여인들이 그 예였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후작님의 파티에 저도 참석했답니다.”

“이전 카드 게임 모임에서 부인을 뵈었어요. 그때는 인사드리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그들의 지위나 나이는 제각각이었으나 모두 짠 듯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속내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나와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의 파티에서는 소개받지 않으면 말을 쉽게 섞기 어렵지만, 신전이라면 달라진다는 거군.’

신전에서 우연히 만나 말을 텄다는 건 남들이 보기에도 그럴싸한 핑계였다.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건 나도 동감하는 바이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걸 보니 귀엽기까지 했다. 뺨을 끌어당겨 웃었다.

“이렇게 뵌 것도 인연인데 함께 신전을 둘러보시겠어요? 마리,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마리의 허락도 받았겠다, 테오도르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의 이들과 달리 그들은 테오도르의 말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주로 내 옆에 딱 붙어서 자리에 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차피 신전을 다 둘러본 터라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으나 불쾌한 태도인 것은 확실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남들에게 우쭐거릴 수 있는 작은 이야깃거리가 필요해 내게 말을 건 거였다. 그렇다면 역으로 그들을 이용하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겠지. 헤어지기 전 그들에게 그럴싸한 말을 던졌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곧 개장할 카지노에 여러분들을 초대하고 싶어요.”

“어머나, 카지노를요.”

“폐하께서 후원하신다는 그 사업인가요?”

“맞아요. 아주 즐거울 거랍니다.”

특히 내가. 주어를 꿀꺽 삼키고 다시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내 영향력이 얼마나 클지 확인할 요량이었다.

그들과 헤어지자마자 마리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카를라, 주제넘은 말이지만, 저분들과 친한 사이인가요?”

“아뇨. 오늘 처음 뵙는걸요.”

그녀는 불안한 얼굴로 사람들이 드문 곳으로 이끌었다. 그 모습은 이본 남작을 조심하라고 할 때와 같아서,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저는 정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이에요. 카를라는 정말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이 다 카를라처럼 올바른 건 아니에요.”

마리는 이본 남작과 친해지지 말라는 말을 할 때처럼 몇 번이고 말을 골랐다.

“특히 입이 가벼운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답니다. 위대한 분이 카를라를 보호하기를.”

아무래도 나는 사람 보는 눈 하나는 타고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더 큰 월척이었다.

* * *

뜻밖의 수확에 신이 나 테오도르에게 손수건을 건네준다는 결심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도중에야 가방에 들어 있는 손수건이 떠올랐다.

‘줄 타이밍이 도무지 안 보여.’

내 옆에는 항상 마리가 붙어 있었고,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울 때도 벨과 리자가 있어 테오도르에게 쉽게 손수건을 돌려줄 수가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인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되도록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떠 오른쪽을 둘러보자 마리와 하녀들은 눈을 꼭 감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테오도르를 찾기 위해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쳐 소리를 지를 뻔했다.

간신히 입을 막고 소리를 삼키자 테오도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가까이서 보는 그의 얼굴은 파괴력이 강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가 몸을 조금 숙여 가까이 다가왔다.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습관처럼 손을 내저으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밖에 나가고 싶어요.”

“하녀를 부를까요?”

“아니, 괜찮아요. 아주 잠깐이면 돼요.”

“동행하겠습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실을 나왔다. 기도실 밖은 한산했다. 그는 내가 단순히 속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했는지, 사람이 없는 뒤편 계단으로 날 데려갔다. 덕분에 찬 공기를 마시며 진정할 수 있었다.

“테오도르 경.”

“네.”

“손수건을 돌려드릴게요.”

작은 가방 안에 고이 넣어 둔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연애편지를 주는 것도 아닌데 손이 떨렸다. 벽에 비친 손 그림자가 조금씩 흔들렸다.

아, 하고 그가 작게 감탄을 뱉었다.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럴 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 삐죽하게 튀어 나갔다.

“원하신다면 새것으로 사 드리겠어요.”

테오도르는 손수건을 받아 윗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그 위를 누르며 웃어 보였다.

“아니요. 이것이 좋습니다.”

어쩌면 성기사들은 신전에서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성스러운 미소에 어떻게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을 놓아 버렸으니 말이다.

* * *

얼마나 정신을 빼놓고 있었는지 집사의 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내가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쉴 틈도 없이 집사가 다다다 말을 뱉은 탓이기도 했다.

“마님,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다시 말해 줄래?”

집사가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노련한 사용인이었으나 간혹 이렇게 카를라를 편하게 여기는 면모를 보이곤 했다. 업신여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았다. 저택을 오래 관리했으니 백작에게 휘둘리는 카를라가 우습게 보일 만도 했다.

‘저택을 빼앗으면 집사부터 바꿔야겠어.’

그런 내 생각을 읽지 못하는 집사는 찡그린 표정을 풀지 않고 말을 반복했다.

“백작님께서 합방을 요청하셨습니다. 다음 주 중으로 날짜를 정해 달라고 하셔서, 가장 빠른 날로 진행해도 되겠냐고 여쭌 참이었습니다.”

“그래?”

태평하게 대꾸했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합방을 요구하다니, 이대로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계획을 세워 놓기는 했지만, 동침이라는 말만 들어도 끔찍했다.

백작에게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저쪽이 요구하는 대로 휘둘릴 생각도 없었다.

“다음 주에 모임이 없는 날이 있었나? 벨, 기억하니?”

갑작스러운 호명이었을 텐데도 벨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다음 주의 첫날은 마리 자작 부인께 차를 대접하기로 하셨고, 그다음 날에는 이본 남작과 보석을 구경하러 가기로 하셨어요.”

그녀는 그 외에도 세 개의 약속을 읊었다. 나는 거만하게 집사를 내려다보았다.

“모두 중요한 약속뿐이네. 어쩔 수 없지, 다음 주 가장 늦은 날밖에 비지 않으니 그날로 하겠다고 전해.”

절대 취소할 수 없는 일정인 척 혀를 놀렸다. 백작이 정한 날짜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을 뿐이었지만. 혹시라도 사교 모임을 취소하라고 하면 내 쪽에서 트집을 잡을 생각이었다.

“그럼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집사는 입을 씰룩거리기는 했으나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집사.”

부르는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한쪽 눈썹을 치켜세운 채 나를 바라보는 그 얼굴은 몇 번을 보아도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벨에게 장부를 쓰는 법을 가르쳤으면 해.”

“이유를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건방지게 대꾸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집사가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알고 있어 말을 삼켰다. 장부를 쓰는 건 특권이나 다름없었다.

돈의 흐름을 알 수 있다는 것은 큰 권력이었고, 그것은 곧 집사의 권위와 연결되는 일이었다. 집주인이 얼마나 그를 신뢰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했다. 그걸 남과 나누고 싶은 집사는 없을 것이다.

“저택 일을 맡기려는 건 아니야.”

“마님, 혹시 제가 실수한 게 있다면…….”

“없어.”

집사는 눈치를 보며 절절매었다. 아무래도 이전에 저질렀던 일이 있던 터라 마냥 당당하게 굴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열쇠 관리를 못 한 집사는 잘려도 할 말이 없긴 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벨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집사의 일을 벨에게 맡기려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아직 어린 하녀였고, 집사가 해야 할 일을 맡기는 건 과한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 뻔했다.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 줄 필요는 없지만.’

일의 분배와는 별개로, 집사가 내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걸 봐줄 생각 또한 없었다. 합방일 때문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아 있었는데 잘 걸렸다 싶기도 했다.

“집사.”

“네, 마님.”

나는 목소리를 낮추고, 언짢은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일일이 그대에게 설명해야 하나?”

“아닙니다.”

집사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안주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좋은 태도였으나, 이렇게 에둘러 말했는데도 재차 묻는 건 월권행위나 다름없었다.

“까다롭게 굴고 싶지 않아서 눈감고는 있지만, 자네의 방만함까지 관대하게 넘어갈 생각은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집사는 쉽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나가 봐.”

집사가 나가고 나서도 방은 한참 조용했다. 한참 후에야 리자가 세탁한 옷들을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혹여 그녀가 합방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까 싶어 표정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평소처럼 맹한 얼굴이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구나.”

리자는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이내 벨과 함께 내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눈치가 빠른 벨은 그렇다고 쳐도 리자마저 분위기를 파악할 줄 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마님. 장부 정리를 배우라는 말씀 말인데요…….”

“저택 일을 맡길 생각은 아니니 안심하렴. 곧 카지노를 열 텐데 이래저래 들어오는 선물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래.”

과중한 업무를 맡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그녀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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