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3)화 (43/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3화

    당장 거울을 본다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만 같았다. 귓불이 홧홧해 귓바퀴를 만지는 척 뺨을 쓸어 보았다. 다행히도 얼굴은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부탁은 그게 끝이에요. 큼, 나가 봐도 좋아요.”

    “네.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다가, 화장대 위를 보며 입을 열었다.

    “카를라 님, 저것도 제게 주시면 처리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처리할 수 있어요.”

    나는 얼른 창문을 열어 밖을 살폈다.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열매를 집어 문으로 향하자 테오도르가 내 앞을 막아섰다.

    “역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가 정중히 내민 손 위에 차마 열매를 쥐여 줄 수가 없었다. 내가 망설이자 그는 조심스럽게 내 손을 그러쥐어 쥐고 있던 열매를 가져갔다.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제 제복 주머니에 열매를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찡그리자, 그가 화들짝 손을 거뒀다.

    “아프셨습니까?”

    “아뇨. 돌려주세요. 제가 만든 것이니 제가 처리하는 게 옳아요.”

    “저택에 마님을 주목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 아닙니까?”

    테오도르의 말이 옳았다. 왜 이 남자 앞에서는 제대로 된 생각이 힘든 걸까. 평소라면 더 교묘하게 처리할 방법을 생각했을 텐데.

    대답하지 않자 그가 말을 이었다.

    “저택과 멀리 떨어진 곳에 묻겠습니다.”

    “만진 후에는 최대한 손을 깨끗하게 씻으세요. 얼굴에 닿게 하지 말고요.”

    “예.”

    “이만 나가 봐도 좋아요.”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렀다. 테오도르는 그 모습을 보다가 이내 방을 나섰다.

    테오도르가 나가자마자 교대하듯 벨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흰 손수건이 들려 있었는데, 전보다 더 하얘진 것 같았다. 풀을 얼마나 먹였는지 칼같이 접힌 가장자리가 빳빳했다.

    “다녀왔습니다, 마님.”

    “수고했어.”

    손수건을 받기는 했지만, 곧바로 테오도르에게 돌려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곱게 접힌 손수건을 한참 동안 만지작거리다가 화장대 서랍 맨 위 칸에 넣어 두었다. 귓불은 좀처럼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그 뒤로 일정한 주기를 두고 정원 산책을 핑계 삼아 열매를 따고 액체를 모으길 반복했다. 이 주가 지나지 않아 단단하게 뭉친 아편 덩어리를 얻을 수 있었다.

    테오도르에게 주어야 할 손수건은 아직도 화장대 서랍 안에 고이 놓여 있었다. 도자기를 맡길 때 함께 건네면 되는 것뿐인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마리와 함께 신전에 가니, 그때 기회를 봐서 돌려주자.’

    마리와는 버너 후작의 파티에서 만난 이후, 계속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리는 결혼 준비를 앞둔 터라 시간이 이래저래 맞지 않아 함께 신전에 가자는 약속을 이제야 지키게 되었다.

    ‘신앙심은 무채색이었던가. 아무래도 검은색은 너무 우울해 보이니…….’

    나는 최대한 흰색에 가까운 베이지색의 옷을 입고, 리본으로 장식한 보닛을 썼다. 레이스로 짠 양산까지 들까 하다가 그건 너무 화려해 보일 거 같아 그만두었다. 최대한 수수해 보이면서도 꾸민 태가 나야 했다.

    작은 가방에 테오도르에게 돌려줄 손수건까지 챙기니 금방 나갈 시간이 되었다. 마차 바퀴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왔나 보다. 내려가자.”

    “네, 마님.”

    리자와 벨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원래는 벨과 테오도르만 동행할 예정이었으나, 신전에는 전담 하녀들이 모두 따라가는 게 암묵적인 예의라고 한다.

    사용인들은 신전에 따로 가기 어려우니 시중을 들며 겸사겸사 들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며 고용인들의 관용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다나.

    계단을 내려가자 미리 마차 앞에 대기하고 있는 테오도르가 보였다. 그는 아주 희고 반짝이는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부분부분 금실로 장식되어 있어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어깨에 붙은 견장이며 가슴팍에 늘어트린 훈장이 아니더라도 각 잡힌 자세가 그가 유능한 기사라는 걸 알려 주었다.

    “성기사단 제복 진짜 멋있다…….”

    요즘 들어 얌전해졌다 싶었던 리자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호들갑을 떨었다. 벨도 따로 말을 하지 않을 뿐, 발을 가볍게 동동거리고 있었다.

    튀어나온 잔머리 없이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넘긴 덕분에 반듯한 이마가 더 잘 보였고, 그 아래로 움푹하게 들어간 눈과 오뚝한 콧날이 돋보였다. 거기에다가 번듯한 제복까지 입고 있으니 근사하기는 정말 근사했다.

    ‘제복은 반칙이지.’

    괜히 두근거림을 느끼지 않으려고 시선을 저 멀리 두고 마차에 올라탔다. 맞은편 의자에 벨과 리자가 앉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테오도르가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테오도르의 팔뚝에 어깨가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단단한 팔에 몸이 닿을 때마다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덕분에 창밖의 풍경도 제대로 즐길 수가 없었다.

    내가 평정을 찾은 건 마리와 만난 이후였다. 신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차를 두고 걸어가기로 한 게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테오도르와 멀어질 수 있었고, 마리가 나를 보자마자 열광적으로 반겨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신전이었다면 단번에 쫓겨날 정도였다.

    “보고 싶었어요, 카를라.”

    “마리, 오랜만이에요.”

    그녀는 인사하는 동안 티가 날 정도로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챙이 넓은 밀짚모자는 장미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모자가 예쁘네요.”

    모자에 대한 칭찬을 바랄까 싶어 살며시 운을 띄우자, 그녀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알아봐 주시니 기뻐요. 이전에 카를라가 꾸몄던 모자가 너무 예뻐 보여서요. 저도 한번 따라 해 봤어요.”

    “그렇군요. 화사한 게 마리랑 잘 어울려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잘 어울렸다. 마리는 칭찬이 기쁜 듯 뺨을 붉게 물들였다.

    멀리 보이는 흰 건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마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 카를라가 화를 내면 어쩌나 했거든요. 물론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요.”

    “제가 왜 화를 내겠어요?”

    “그게…….”

    그녀는 잠시 자신의 하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걸음을 늦춰 우리와 거리를 벌렸다. 벨과 리자 또한 몇 걸음 더 거리를 두었다. 마리는 부끄러운 듯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속삭였다.

    “후작님의 파티에서 들꽃을 왜 꽂았냐는 짓궂은 질문을 받으셨잖아요?”

    파티에서 나를 시험하는 말을 던진 늙은 여인이 생각났다. 필사적으로 그럴싸한 말을 생각해 내느라 머리에 쥐가 났던 기억도 떠올랐다.

    “대답이 너무 멋져서…… 다른 파티에 갈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녀가 주변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랬더니 그게 유행이 돼 버렸지 뭐예요.”

    그녀의 말대로 주위를 둘러보니, 신전으로 향하는 여자들이 하나같이 커다란 챙이 있는 밀짚모자에 꽃을 달고 있었다. 대부분은 장미였으나 이름 모를 꽃도 가끔 보였다.

    그들은 곁눈질로 나를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기도 전에 화들짝 고개를 돌렸다. 다시 고개를 돌려 마리를 보니 그녀는 여전히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수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은 카를라일지도 몰라요.”

    “마리…… 너무 놀리지 말아요.”

    “놀리는 게 아니에요. 그때 카를라는 정말 멋졌는걸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마리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신전으로 향할수록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변하는 게 느껴졌다. 애써 시선을 무시하며 신전을 올려다보았다.

    신전은 말 그대로 흰 건물이었다. 약간 흰 상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입구 또한 흰색으로, 문을 닫으면 이음매가 완벽히 사라져 그 또한 벽의 일부처럼 보였다. 문을 통과해 들어간 신전 내부도 역시 온통 흰 벽이었다. 장식물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창문은커녕 조그마한 구멍 하나 없는 내부는 무서울 정도였다.

    벽을 따라 늘어진 촛불만이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게 신전이구나.’

    신전은 보기만 해도 저절로 신앙심이 생길 거 같은 엄숙함이 있었다. 장식 하나, 얼룩 하나 없는 것이 공작의 저택과 비슷한 모양이기는 하나, 웅장함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카를라 님, 제가 신전을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테오도르는 드물게 들뜬 목소리였다. 이전에 직접 신전을 안내해 주고 싶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그는 꽤 적극적이었다.

    “부탁드려요.”

    처음 방문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덤덤하게 대답하자, 마리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성기사님이 직접 안내를 해 주시다니, 다녀오세요, 카를라.”

    “무슨 말이에요, 마리. 함께 가야죠.”

    “정말요? 제가 함께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너무 기뻐요. 고마워요!”

    우리의 대화를 듣던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성기사님의 안내를 받다니, 부러워라…….”

    “자작 부인은 백작 부인과 어떻게 친해진 걸까요?”

    “오늘은 ‘그 모자’를 쓰지 않았네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평의 대상이 된다는 건, 무서우면서도 우쭐한 기분이 들게 했다. 성기사가 직접 신전을 안내하는 건 드문 일인지,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또한 움직였다.

    신전 내부는 마치 평범한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층마다 다양한 읽을거리가 놓여 있어 원한다면 어디서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위대한 분께서는 세계를 ‘글’로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에 전달하고자 하는 말이 있으면 ‘글’의 형태로 내려오십니다.”

    나를 위한 것이라 아주 기초적인 설명이었으나, 마리는 불평 한번 없이 진지한 태도였다. 덕분에 어색하지 않게 이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짐작대로 이 세계는 책 속의 세계가 맞았다. 책과 필기구는 십자가 같은 역할로, 신실한 신도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구석에서 열심히 종이와 씨름하고 있는 사제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제들은 글로써 위대한 분과 소통합니다. 소설이나 시일 때도 있지만 간혹 일기일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글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사제들은 책을 펼쳐 놓고 필사를 하고 있었다. 입으로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끝없이 글을 옮겨 적는 모습이 현대의 입시생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사제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히 방을 지나쳤다.

    “위대한 분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성경은 그럴싸한 말로 포장되어 있기는 하나, 근본이 19금 연애 소설인 만큼 얼기설기 기운 티가 났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도 된다는 말이 성경에 적혀 있을 정도니까.

    ‘이 세계 사람들의 도덕관념이 이상한 이유가 여기 있었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