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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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는 솜씨가 좋았다. 정원의 반을 차지한 양귀비는 아주 탐스럽게 자라 있었다. 손을 쭉 뻗어 꽃 위를 훑자 부드러운 꽃잎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열매가 맺히려면 얼마나 있어야 하지?’
인터넷에 검색하면 금방 나올 텐데, 핸드폰이 없으니 이럴 때 새삼스럽게 불편함이 느껴졌다. 꽃을 구경하는 척 안쪽을 뒤적거리니 몇 송이는 꽃이 아니라 열매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동글동글하게 생겨 꽃봉오리로 착각했지만, 만져 보니 약간 딱딱한 감이 있는 게, 열매가 확실했다.
손톱으로 열매의 겉에 흠집을 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표면에 말간 액체가 몽글몽글 맺혔다.
손가락 끝에 묻은 즙에 인상을 찌푸리자, 옆에서 누군가 불쑥 손수건을 내밀었다. 테오도르였다.
“사용하시겠습니까?”
“감사히 받을게요.”
흰 손수건이라 그런지 손을 닦자 진한 얼룩이 남았다. 손수건은 부드럽고 마감이 깔끔하게 되어 있어, 고급품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이걸 그대로 돌려주는 게 마음에 걸려 미간만 찌푸리고 있자 테오도르가 무릎을 굽히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손수건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아뇨. 풀물을 빨리 지우지 않으면 스며들어 지워지지 않을 거 같아서요. 금방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바람이 불어와 양귀비꽃이 흔들거리며 무릎 아래를 간지럽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의 새파란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눈을 마주치자 테오도르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폈다. 내가 곤란할 때마다 그는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도움을 주었다. 소설 속의 남자주인공처럼. 계속 이렇게 호의를 받다가는 착각할 거 같았다.
나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 아니었다. 달콤한 두근거림은 지금 가장 필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테오도르와는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사랑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감출 수가 없는 일이니까. 잘못하다가는 도리어 내 손만 찔릴 거 같았다.
아직 백작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 주지도 못한 데다가, 그는 왕과의 사업에도 발을 들이밀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직 사교계의 입지도 백작보다 약하니 괜히 책잡힐 일을 만들어선 안 되었다.
“테오도르 경은 자상하시네요.”
“그렇습니까?”
“네. 항상 제가 곤란할 때마다 가장 먼저 도와주시잖아요.”
턱을 들어 올려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웬만한 사내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커서, 나는 금세 시선을 조금 내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른 성기사님들도 이렇게 상냥하신가요?”
테오도르의 입술 사이로 혀가 나와 아랫입술을 적시고 다시 제자리로 들어갔다. 그도 내 경고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렇다고 대답해. 여기서 선을 그으란 말이야.’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고 벨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벨은 한창 꽃을 꺾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시선을 이용한 속임수였다.
‘기사가 이래도 돼?’
다시 테오도르를 바라보았을 때 그는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호위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듣고 싶던 말을 들었는데도 개운하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쉬고는 나도 벨을 따라 꽃을 꺾는 척, 열매를 뜯어냈다. 덕분에 손이 또 엉망이 됐지만, 신경 쓰지 않고 주머니에 열매를 쑤셔 넣었다.
“이만 꺾고 올라가자꾸나. 너도 가지고 싶거든 몇 송이 가지렴.”
“감사합니다, 마님.”
나는 멀리 떨어져 꽃을 꺾던 벨을 불렀다. 벨은 얼마나 열심히 꽃을 꺾었는지, 품에 양귀비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손수건을 빨아 오라는 핑계로 벨을 내보내고, 조심스럽게 열매를 화장대 위에 올려놓았다.
비슷한 크기의 열매 다섯 개를 일렬로 늘어놓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동글동글한 공 위에 레이스를 묶어 둔 것 같은 모양새가 귀엽게 느껴졌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굴려 보자 데굴데굴 구르다가 곧 멈춰 섰다.
‘얼마나 익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 정도 상태면 충분한 걸까?’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는 어차피 순도 높은 마약을 만들 수 없으니 덜 익은 열매를 사용하거나 양이 좀 많다고 해서 큰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이왕 만드는 거 많이 만들어 두는 편이 낫다.
‘좋아. 우선 이 정도면 양이 얼마나 나오는지 확인해 보자.’
표면을 긁을 도구가 필요했다. 나는 온 화장대 서랍을 다 뒤져 가짜 진주가 달린 머리핀을 찾아냈다. 방에서 구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뾰족한 물건이었다. 끝을 조금 간 다음 열매를 긁으면 될 거 같았다.
‘즙을 담을 통이 필요한데…….’
쓸 만한 통이 없는 게 문제였다. 카를라는 방 안에 쓸모없는 물건을 쌓아 두지 않는 편이었고, 내게도 뭘 모으는 취미가 없었다. 덕분에 방은 살풍경했다.
다행히도 화장대를 쓱 훑어보다가 화장품이 담긴 통을 뜯어 쓰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중에서도 입술연지가 담긴 약간 기다란 통이 가장 쉽게 분리되었다.
두 겹으로 갈라진 통의 겉면은 도자기고 안쪽은 금속이었다. 화장품이 담긴 금속은 다시 서랍 안에 넣어 두고, 도자기만 쓰기로 했다. 마침 도자기는 열매 하나가 딱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준비는 다 되었으니 슬슬 작업을 시작해 볼까.’
오랜만에 직접 무언가를 할 생각을 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머리핀의 끝을 책상에 문질러 날카롭게 갈아 낸 후, 열매 표면을 살살 긁어 흠집을 냈다. 최대한 많은 흠집을 낸 후 도자기 안에 넣어 놓자 금방 아래에 뽀얀 액체가 고이는 게 보였다.
‘생각보다 더 잘 되는데?’
핀으로 열매를 쿡쿡 찔러 가며 이리저리 굴리자 오래 지나지 않아 액체가 눈에 띌 만큼 고였다.
열매의 옆면을 꾹꾹 눌러서 짜내고 건져 냈다. 한번 해 보니 다음은 더 쉬웠다. 핀 두 개를 이용해 손에 아무것도 묻히지 않고 열매를 짜냈다. 열매의 표면이 으스러지며 흰 액체가 벽을 타고 흐르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걸 빤히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엄마가 떠올랐다. 내가 이런 걸 만들고 있다는 걸 알면 놀라서 기절할지도 모른다. 아빠는 끊었다는 담배를 피울 수도 있다. 코끝이 시큰해지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은 백작의 돈을 뺏는 것만 생각하자. 한 번에 하나씩 해결하는 거야. 지금은 감상에 잠겨 봤자 도움이 안 돼.’
아마도 카를라의 부모님을 보고 와서 조금 감성적이게 된 모양이다. 나는 양손으로 뺨을 쳤다.
소설의 마지막을 본 후에도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은 세계다. 답이 없는 문제를 더 생각하기보다 지금은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 운다고 해서 당장 엄마한테 돌아갈 방법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부지런하게 손을 놀리자 금방 다섯 개의 열매를 다 짜낼 수 있었다.
끝까지 짜낸 것도 아닌데 손바닥만 한 도자기 병의 절반이 찼다.
“이제 이걸 말리기만 하면 되는데…….”
말릴 곳이 마땅치 않았다. 벨과 리자가 발견하면 쓰레기라고 생각해서 치울 수도 있고, 그렇다고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자니 계획이 새어 나갈 염려가 있었다.
방에 숨길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숨기는 건 불안했다. 나는 손바닥의 반도 되지 않는 크기의 도자기 병을 흔들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내 시야에 잘 들어오면서도 남이 쉽게 건들 수 없는 곳…….’
지금 바로 생각나는 건 딱 하나였다.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선을 긋자고 그런 말을 해 놓고 바로 부탁을 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양심이 없는 짓이긴 한데.’
하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냥 물어나 보는 거야. 테오도르가 거절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되잖아.’
나는 빠르게 자기합리화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테오도르 경, 부탁이 있어요.”
그는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부탁이 뭔지 듣지도 않고 흔쾌히 수락하다니, 좋은 사람인지 호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못된 짓을 시키면 어쩌려고?’
그러나 도와준다는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받을 땐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것도 이상했다. 나는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복도가 한산한 걸 확인한 후 그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 손수건을 완전히 말린 후 풀을 먹이라고 해 두었으니 벨은 한참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화장대 위에 올려진 양귀비 열매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프신 곳이 있으십니까? 의사를 부를까요?”
이마를 찌푸린 그가 내게 성큼 다가와 물었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이전에 오피온을 어디에 쓸지 말씀드린다고 했었죠.”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입가를 끌어올렸다. 이상하게 들리지 않으면 좋겠는데.
“백작에게 쓸 거예요.”
태연하게 말을 뱉고는 테오도르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묻지 않으시네요. 왜 그러는지.”
“카를라 님께서 하고 싶으신 일을 제가 말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처음 나를 보고 인사했을 때처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건 몇 번을 반복해서 봐도 좋을 정도로 근사한 몸짓이었다.
“저는 카를라 님의 호위이니, 편하실 대로 쓰십시오. 무슨 명령이든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테오도르가 그렇게 말하자 내가 아주 높은 사람이라도 된 거 같았다. 그는 간혹 이런 식으로 소설에나 나올 법한 말을 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쓸모없는 고양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런 기분에 취하기 전에 그렇게까지 비장할 필요는 없는 일이라는 걸 알려 주는 게 먼저였다.
“그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요. 경에게 나쁜 짓을 시킬 생각도 없고요.”
손바닥에 감추고 있던 병을 들어 올렸다. 새하얀 도자기 병을 본 테오도르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손바닥을 위로 향해 내게 내밀었다.
“그냥 가지고 있어 줬으면 좋겠어요.”
내민 손바닥에 병을 떨어트리듯 쥐여 주자, 테오도르는 그것이 귀중품이라도 되는 듯이 소중하게 움켜쥐었다.
“예.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그냥 보관만 잘해 주면 돼요. 방에 숨길 수는 없고,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테오도르 경밖에 없어서요.”
아몬드 모양의 눈이 갸름하게 접혔다. 새파란 눈동자 위에 속눈썹의 그림자가 졌다. 테오도르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몄다.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