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1화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피데스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야?”
“아니야!”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테오도르와 나는 그저 호위와 호위 대상일 뿐이었다.
“에이, 난 또.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는 줄 알았지.”
“나, 난 결혼한 몸이고, 테오도르 경은 성기사거든! 그리고 그 사람은 그런 짓 안 해!”
“그런 게 뭐 어떻다고 그래. 성기사라고 연애를 못 하는 건 아냐. 아, 그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나? 결혼한 다음 만나면 되겠네.”
“결혼하면 더더욱 만나면 안 되지. 아니, 지금도 만나면 안 돼. 불륜이잖아.”
피데스도 역시 이 세계의 주민이었다. 그녀는 백작이 바람피우는 것에는 분노했지만 불륜이 왜 나쁜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그런 것치고는 그가 언니를 보는 눈빛이 뜨겁던데. 알았어. 그런 걸로 치자.”
“그런 걸로 치는 게 아니라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이제 누워.”
우리는 투덕거리며 자리에 누웠다. 그동안 쌓인 이야기가 많았는지 피데스는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떠들어 대었다.
후계자 교육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늘어놓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다가 나도 모르는 새 까무룩 잠들었다. 카를라의 방은 백작 부인의 방보다 훨씬 따뜻했다.
* * *
아침나절 내내 마차에 오르기 아쉬울 정도의 환대를 받았다.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공작 부부는 최선을 다해 주었다.
“자주 연락 드릴게요.”
“다음엔 오래 머물다가 가렴. 응?”
“네. 그렇게 할게요.”
테오도르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 올라탔다. 공작 부부와 피데스는 마차가 멀어져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마음이 따뜻해진 것도 잠시, 백작가에 들어서자마자 백작의 날 선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당신은 밤새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들어오는 거요?”
그렇게 말하는 그도 카드 게임 모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집사가 홀에서 그의 웃옷을 벗겨 주고 있는 것만 봐도 그랬다. 옷차림은 어제와 같았고, 숙취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눈 밑은 거뭇하게 죽어 있었다.
“공작가에 신세를 졌어요.”
“뭐?”
백작은 앞머리를 연신 위로 쓸어 넘기며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백작님이 술에 취해서 옮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남작 부군에게 부부가 모두 신세를 질 수도 없고요.”
“어이가 없군. 그럼 혼자라도 집에 돌아왔어야지.”
그는 내가 잘못했다는 듯 몰아가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집사는 얼른 백작의 옷을 들고 자리를 떴다.
“마차가 하나뿐이었으니까요. 제가 혼자서 저택으로 돌아왔다면 백작님이 돌아오실 때 곤란하지 않았겠어요?”
나는 목을 뻣뻣하게 치켜들고 그에게 쏘아붙였다.
“곤란한 상황이라 소공작님이 도와주신 것뿐이에요. 애초에 파티에서 그렇게 취하시다니, 부끄러워서 남작 부군에게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강하게 정론을 밀어붙이자 백작은 금방 태도를 바꾸었다.
“화를 낸 게 아니오. 그저 아침 내내 당신이 걱정돼서 그랬소.”
그는 헛기침하며 손바닥으로 다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 행동이 꽤 멋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으나, 안타까울 정도로 느끼했다.
“당신도 알잖소. 당신 가족들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당신과 절연했지.”
백작의 손이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여왕이 사업을 크게 벌이니 이제 와서 당신을 찾는 걸 좀 봐. 당신은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모르겠지만, 그건 좋지 않은 징조요.”
백작의 말은 교묘했다. 마치 카를라가 공작 부부와 피데스에게 이용당하다가 버려지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말하고 있었다.
얼핏 흘려들으면 마치 진짜로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였다. 그동안 카를라를 휘둘렀던 대로 나를 휘두르려고 하다니, 백 년은 일렀다.
“충고 감사해요.”
어깨를 주무르는 백작의 손을 단호히 떼어 내고 눈을 휘어 웃었다. 헛소리하는 것 정도야 들어줄 수 있었지만, 맡아 본 적 없는 이상한 냄새까지 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입가를 가리는 척 한 손으로 코를 가리고, 최대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백작님, 깊은 대화를 하기엔 아직 피로하실 거 같으니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숙취도 가라앉지 않았을 텐데.”
“그러지. 당신도 쉬면서 잘 생각해 보시오. 당신을 가장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백작은 쉽게 나를 보내 주었다. 얼른 계단을 올라가니 그제야 벨과 리자가 뒤를 따라왔다. 그에 뒤를 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주방장에게 치즈를 듬뿍 넣은 파이를 백작님 방에 올리라고 전하렴.”
“치즈요?”
“그래, 크림이 들어가면 더 좋고. 아, 버터도 듬뿍 쓰라고 전해.”
“네!”
벨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뒤를 따라왔다. 나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웠다. 풍성한 치마가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마님, 옷시중을 들까요?”
리자가 드물게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만 들어 그녀를 보니 답지 않게 고개를 푹 숙이고 손을 모으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다시 베개에 묻으며 손을 내저었다. 돌아오자마자 백작과 말을 섞었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네.”
벨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주방에 친구가 있으니 잠시 수다라도 떨고 올 게 분명했다. 적당히 게으름을 부리는 건 눈감아 줄 수 있었다.
한참 오후의 고요함을 즐기다가 문득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리자에게 말을 시키지 않아도 남작 부군의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재잘거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아하리만큼 그녀는 조용했다.
‘뭐, 리자도 사람이니까 하루 정도는 조용할 수도 있지.’
그러나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난 내 옷시중을 들면서도 필요한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켰다.
남작 부군의 저택에서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그래서 지레 겁을 먹고 위축된 것일지도 모른다. 리자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리자, 어제 그 저택에서 무슨 일 있었니?”
가볍게 묻자 리자는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낯빛은 흐렸고 반짝이던 눈에는 생기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마님.”
무서울 정도로 얌전한 모습이었다. 티 나게 눈치를 보거나 눈치 없이 밝게 구는 모습만 보아 왔던 터라 위화감이 느껴졌다.
‘뭘까?’
이렇게 숨기려고 들면 오히려 캐내고 싶은 법이었다. 백작이 허튼짓을 시켰다면 먼저 알아내서 선수를 쳐야 했다. 나는 리자를 회유하기로 했다.
“어제는 낯선 곳에서 고생했겠구나.”
“아녜요. 새로운 곳이라 신기했어요.”
“저녁은 어떻게 했니?”
“사용인 주방에서 간단하게 먹었어요.”
그러나 몇 마디를 던져도 리자는 대꾸만 할 뿐, 평소처럼 재잘거리지 않았다. 어딘가 얼이 빠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깨는 평소와 달리 처져 있었고,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통통 튀며 높낮이를 달리하던 목소리는 단조로워졌다.
‘곤란한데. 이러면 써먹을 수가 없어.’
리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벨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백작님께 파이를 드리고 왔어요.”
“수고했어. 머리를 정돈하고 싶은데.”
“네, 마님.”
벨이 머리를 정돈하는 동안 리자는 뒤에 서서 바닥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거울 너머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리자의 머릿수건 아래로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와 있는 게 보였다. 그러나 머리카락은 평소 같은 금발이 아니라 짙은 색이었는데, 뭔가 더러운 것이 묻어 엉킨 것처럼 보였다.
“리자.”
“네!”
숙이고 있던 작은 머리통이 화들짝 위로 올라왔다. 나는 검지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지저분하잖니. 좀 닦으렴.”
리자는 얼른 내 옆으로 와 이리저리 살폈다.
“깨끗한데요, 마님.”
“아니, 나 말고. 네 머리를 말한 거란다.”
그제야 리자가 제 머릿수건 근처를 더듬었다. 그녀의 손에 거뭇한 것이 묻어 나왔다. 흰 피부가 창백하게 질렸다.
“아, 그, 마님, 이게요…….”
가까이서 보니 그 부분의 머릿수건에도 이물질이 묻은 게 보였다. 동그랗게 퍼진 모양이 꼭 액체를 흘린 것 같았다. 리자가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기 전에 손을 휘저었다.
“가서 정돈하고 오렴. 종일 다른 저택에 있었으니 너도 정신이 없겠지.”
“가, 감사합니다.”
리자가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리자의 머릿수건이 자꾸 눈에 밟혀 머리를 빗던 벨에게 손짓했다.
“벨.”
“네, 마님.”
“가서 리자의 상태 좀 살피고 올래?”
“상태만 보고 오면 될까요?”
“오늘따라 멍하던데. 심하게 안 좋은 거 같으면 쉬라고 해.”
“네, 마님.”
벨을 내보내고 나서도 찝찝한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설마…… 아니겠지.’
* * *
벨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마님. 말씀대로 리자에게는 쉬라고 해 두었어요.”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좌우를 훑은 후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어요.”
허락을 구하듯 말을 더듬고 길게 늘이는 모습에 불안함이 더해졌다. 벨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자세를 바로 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은밀한 비밀을 말하듯 내 귓가에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누구한테 맞은 거 같아요.”
“무슨 말이니?”
“리자요. 여기가 이만큼 찢어져 있었어요, 마님.”
벨은 귓바퀴 위, 관자놀이에 엄지와 검지를 대어 5cm 정도의 틈을 만들어 보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심한 상처였다. 역시 머릿수건에 묻어 있던 얼룩은 핏자국이었던 게 틀림없다.
심각한 이야기에 덩달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누가 그런 건지 들었니?”
“아뇨. 아무리 캐물어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걸요.”
리자는 말하지 않았다고 했지만, 벨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찝찝해.’
손가락 마디를 주무르며 생각에 빠졌다.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고 생각하기엔 귀 위는 쉽게 다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어젯밤에는 내내 카드 모임에 가 있었으니 저택의 사용인들과 싸운 건 아닐 테고, 카드 게임 모임에서 다른 이에게 맞았다면 백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리자를 때렸을 만한 사람은 백작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되면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생긴다.
‘백작이 리자를 때릴 이유가 없잖아.’
그가 그렇게나 예뻐하는 정부에게 갑자기 손을 올릴 이유가 없었다. 술에 취해서 실수할 가능성도 생각해 봤지만, 몸을 가눌 수도 없던 사람이 그러긴 어려웠을 것 같았다.
계속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정원이나 돌아봐야겠구나.”
양귀비가 얼마나 자랐나 확인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