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40화
조심스럽게 접힌 분홍빛 종이를 펼쳐 보자, 검은 잉크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의 이름을 부르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여름이 다 지나 있었습니다.]
팔뚝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다음 편지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제 마음에는 꽃밭이 있습니다. 주인은 당신입니다. 언제든 들어와 얼마든 꽃을 꺾어 가셔도 좋습니다.]
편지는 많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누가 봐도 낯이 뜨거워질 정도 입에 발린 소리와 열렬한 구애의 말들로 가득했다. 느끼한 말들에 속이 거북해질 정도였다. 필체를 보니 카를라의 것은 아니었고, 남자가 보낸 연애편지로 보였다.
쭉 살펴보니 편지지 하단에 보낸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어, 어렵지 않게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카루스 백작이 보낸 거네. 으, 소름 돋아.’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될 이야기가 있을까 싶어 편지들을 차례대로 훑어보자, 테오도르가 옆으로 다가왔다.
“찾으신 게 있으십니까?”
“아뇨. 연애편지밖에 없어요.”
종이 뭉치를 내밀었지만, 테오도르는 곧장 받지 않고 머뭇거렸다.
“왜 그래요?”
“제가 감히 읽어도 될지…….”
“뭐 어때요. 읽어도 괜찮아요.”
테오도르는 편지들을 건네받고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진중한 표정으로 종이를 넘겼는데, 커다란 남자가 분홍빛 종이를 들고 있는 모습이 아이러니해 귀여워 보였다.
‘웃으면 안 돼. 날 도와주고 있잖아.’
하지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와서 입가를 가려야 했다. 테오도르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편지를 노려보다가 내게 다시 편지를 건네주었다.
“왜 그래요?”
“이런 말들을 좋아하십니까?”
“제게 물으신 건가요?”
“예.”
테오도르는 무언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이걸 받은 건 카를라였고, 그녀가 이런 말을 좋아한다고 해서 나 또한 그래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나와 카를라를 헷갈린다는 생각에 저절로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이건 제가 받은 게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테오도르의 뺨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목덜미를 긁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편지를 유심히 보고 계시길래, 혹시 카를라 님께서는 이러한 말들을 좋아하시나 싶어……. 물론 카를라 님이 아니라 아니, 카를라 님이 받으신 건 맞지만, 제가 아는 카를라 님이라는 뜻으로…….”
그는 얼마나 당황했던지 점점 말이 꼬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시선도 내가 아니라 바닥을 향해 있었다.
‘뭐야, 나랑 카를라를 동일시한 게 아니구나?’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모습에 마음이 풀렸다. 그가 당황하는 모습은 꽤 귀여웠다. 나는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하하,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으니 그렇게 변명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나 웃음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내가 웃으면 웃을수록 테오도르의 뺨이 타오를 듯 붉게 익었다. 귀와 목덜미까지 완전히 붉어져 있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대답하지 않았는데 달칵거리며 문손잡이가 돌아가자, 테오도르가 반사적으로 검에 손을 올리는 게 보였다. 나는 그가 들고 있던 편지지를 등 뒤에 숨겼다.
“언니, 자?”
“아니. 안 자.”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피데스였다. 그녀는 흰 원피스의 편안한 차림새로 이곳까지 온 듯했다. 피데스의 나이트가운 끝자락에는 파란색 실로 나비 자수가 놓여 있어 좀 더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입은 걸 보니 기사처럼 딱딱하게 굴던 그녀가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아이처럼 보였다.
테오도르는 피데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정자세를 취했다.
“뭐 하고 있었어?”
그녀의 말에 별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테오도르 경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단다.”
“그럼 이제 나랑 놀자. 호위는 나가라고 해.”
방을 좀 더 뒤지려고 했기에 난데없는 피데스의 어리광이 당황스러웠다.
“다음에는 언제 자고 갈지 모르잖아. 오랜만에 언니랑 같이 자고 싶어.”
피데스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무래도 내게 투정을 부릴 때의 습관인 거 같았다.
‘귀여워라.’
팔자에 없는 동생이 생긴 탓인지, 그녀에게는 계속 무르게 굴게 되었다. 방을 뒤지는 거야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터였다. 어차피 아직은 뭘 찾아야 할지도 정확히 모르니까.
공작과 화해도 했으니, 이런저런 핑계를 만든다면 공작가에는 앞으로도 출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래. 그럼 오늘은 같이 잘까, 요 어리광쟁이야.”
“좋아!”
피데스가 팔짱을 껴 오는 틈을 타 은근슬쩍 서랍을 열고 편지 뭉치를 대충 던져 넣었다. 그녀는 테오도르를 본다고 내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궁상맞게 문 앞을 지키고 있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언니 호위는 왜 저렇게 딱딱한지 모르겠네. 가서 쉬시오. 집사가 손님방을 안내해 줄 거요.”
“그래요, 오늘은 손님으로 왔으니 편히 쉬어요.”
“하지만 저는…….”
테오도르는 자신이 왜 방을 지켜야 하는지를 토로하려 했으나 피데스가 강경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태도는 뭔가. 지금 소공작이 제 언니를 해치기라도 할까 봐 의심하는 건가?”
그녀는 아예 테오도르를 떠밀어 방 밖으로 내보냈다. 문밖에는 이미 집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상냥하게 웃으며 안내라는 명목으로 테오도르를 끌고 갔다. 무서울 정도로 철저한 모습에 팔뚝을 문질렀다.
“추워?”
“아니.”
“지금까지 옷도 안 갈아입고 뭐 했어? 유모를 부를까? 하녀들도 정신이 없어서 잊은 모양이야.”
“번거롭게 부를 필요가 뭐 있니.”
나는 밤이 늦었으니 시중은 괜찮다고 말하며 탁상 위에 준비된 천 뭉치를 들어 보았다. 피데스와 똑같은 흰 원피스였다. 욕실로 들어가 대충 화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었다.
욕실에서 나오니 피데스는 이미 침대 위에 앉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떻게 놀아 줘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솔직히 말해 봐.”
“뭘?”
“백작이랑 이혼할 거야?”
그녀의 말에 놀라 숨을 들이켰다. 그러는 바람에 횡격막이 갑자기 수축했는지 작게 딸꾹질이 나기 시작했다.
“어, 딸꾹, 무슨 말, 딸꾹!”
“발뺌하지 마. 언니 하는 거 보니까 뻔하잖아.”
피데스가 나를 몰아세웠지만, 제 몸집만 한 베개를 끌어안고 있는 모습으로는 영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딸꾹질을 멈추기 위해 가슴팍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아무리 집안에서 반대한 결혼을 해서 시집을 갔어도 언니는 공작가의 장녀야. 난 소공작으로서 언니를 보호할 의무가 있어.”
그녀는 내 등을 조심스럽게 두드려 주었다. 딸꾹질은 금방 멎었다. 나를 보호해 주겠다는 말은 무척 든든했지만, 지금은 이혼할 수 없었다.
“이혼은 안 해.”
카를라의 지참금을 대부분 백작이 가지고 있으니 이대로 이혼하면 그에게 좋은 일만 시켜 주는 꼴이다. 그 점을 이야기하자 피데스가 못마땅하게 대꾸했다.
“카지노가 잘되면 그만큼은 다시 벌 수 있을 거야. 차라리 얼른 이혼하고 공작가에 돌아와.”
“싫어. 지는 거 같잖아.”
막 빙의한 직후였다면 덥석 그 제안을 받아들였겠지만, 나는 백작에게 원한이 많이 쌓인 상태였다. 눈을 마주치기만 하면 비아냥거리고,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유분수지. 직장 상사도 아니면서 내 행동을 지적하고 사소한 것 하나하나 간섭하며 명령하는 꼴이 생각만 해도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부모님이 마련한 지참금이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드레스 한 벌 마음대로 못 입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녀의 말에 머리에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그래, 카를라는 어마어마한 지참금을 가지고 백작과 결혼했다. 그녀는 버림받았다고 계속 되뇌었지만, 정말 공작가가 카를라를 버렸다면 지참금 목록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쉽게 다시 받아들여 주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백작에 대한 분노가 다시 끓어올랐다. 그는 내게도 공작가가 카를라를 얼마나 냉대했는지 거듭 이야기하곤 했다.
“이대로 물러서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위대한 분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어. 순순히 이혼해 줄 수는 없지.”
고집부리지 말라고 한 소리를 들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피데스는 손뼉을 쳤다.
“이제야 우리 언니 같네. 자존심 빼면 카를라가 아니지.”
그녀는 침대에 눕더니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었다. 내려다본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뀐 거야?”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는 피데스를 보자니 백작의 불륜을 목격했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목이 콱 막혔다. 피데스가 카를라의 치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카를라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카를라의 침대 위에서 백작이 하녀와 뒹굴고 있던 걸 보았다고 어떻게 말해?’
이 세계는 불륜이 공공연한 곳이니 피데스도 당연한 일처럼 취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을 틀어막은 것의 정체는 무서움이었다. 나는 고작 두 번 본 카를라의 동생이 그녀를 바보 같다고 생각할까 봐 무서워하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피데스가 불안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설마…… 백작이 때려?”
“아니.”
“그 자식이 손을 올리는 시늉이라도 하면 내게 말해. 다시는 그 손을 쓰지 못하도록 뼈를 으스러트릴 테니까.”
피데스가 이를 갈았다.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동생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입을 열었다.
“하녀와 바람피우는 걸 봤어.”
“뭐?”
“외출하고 돌아왔더니, 내 침대 위에서 둘이 끌어안고 있더라.”
피데스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나와 이혼하고 정부를 백작 부인으로 만들겠다고 하길래 말해 줬지, 이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그때를 떠올리자 두려움 대신 분노가 내 목소리를 타고 흘렀다.
“지참금을 모두 돌려받고, 백작의 재산을 모두 빼앗은 다음 쫓아낼 거야. 카지노에 내 명의를 빌려주는 것도 그 때문에 하는 일이야. 그때까지 이혼은 없어.”
비밀 같지도 않은 비밀을 뱉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저절로 조소가 나왔다.
“고작 남편이 정부를 들였다고 이런 큰일을 벌이다니, 우습지?”
그러나 피데스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꽉 말아 쥔 주먹은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등에 핏줄까지 팽팽하게 서 있었다.
“멍청한 남자랑 결혼하더니 언니도 멍청해졌어? 하나도 안 웃겨.”
피데스가 나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 편이야.”
허리에 둘린 팔 힘이 얼마나 강한지 갈비뼈가 부서질 거 같았다. 겨우 그녀에게서 벗어나 어깨까지 닿는 새카만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겨 주었다.
“언니, 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
“우리가 언제 그런 걸 허락받고 물어보던 사이였던가.”
카드 모임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피데스가 킬킬 웃었다. 카를라와 꼭 닮은 앳된 얼굴이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호위 기사랑 그렇고 그런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