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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9)화 (39/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9화

    집사는 계단 안쪽으로 걸어가며 연신 내게 말을 걸었다. 많이 마른 거 같다, 혹시 내일 아침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느냐, 방은 쓰던 방을 그대로 쓰면 된다……. 피데스가 오른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소곤거렸다.

    “집사가 엄청나게 들떴다, 그치.”

    역시 그는 집사가 맞았다. 피데스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평소에는 과묵한 편인 듯했다.

    “그러게.”

    응접실은 그리 멀지 않았다. 방은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고,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테이블 위에는 두꺼운 책이 올려져 있었는데, 척 보아도 손을 많이 탄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지 표지를 덮은 가죽이 반들반들했다. 인구수 대비 십자가가 가장 많은 나라에서 자란 나는 한눈에 그게 성경임을 알 수 있었다.

    카를라의 부모는 성경을 사이에 두고 손을 모으고 있었다. 집사가 열린 방문을 다시 두드려 인기척을 내었다.

    “큰 아가씨가 돌아오셨습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새카만 눈 두 쌍에 눈물이 고이는 게 보였다. 공작 부인, 그러니까 카를라의 엄마가 몸을 일으켜 내게 달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나를 끌어안지도, 차마 오열하지도 못했다.

    그녀의 동공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들의 감정에 동화된 걸까.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요, 어머니.”

    “카를라, 내 아가, 너니?”

    “네. 저예요.”

    얼마나 카를라를 기다렸을까 싶어 저절로 코끝이 찡해졌다. 눈물이 나오지 않도록 꾹 참았다. 문득 엄마와 한바탕 싸우고 무작정 문밖을 뛰쳐나갔던 날이 떠올랐다.

    엄마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다고 했다. 아파트 계단에 앉아 있던 날 보고서는 혼내지도 못하고 달려와 이렇게 널 잃어버리는 줄 알았다고도 했다. 물론 다음 날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나기는 했지만. 엄마가 보고 싶었다. 카를라의 복수가 끝나면 나도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카를라가 하지 못했다면, 적어도 내가 해야 한다.

    “제가 잘못했어요.”

    내 말에 공작 부인의 몸이 무너졌다. 카를라와 똑 닮은 여자의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여 주었다.

    공작은 그런 우리를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몇 번이나 올리고 내렸다가, 이내 제자리에 서서 입을 열었다.

    “죽기 전에는 오지 않겠다더니.”

    카를라가 얼마나 사랑에 눈이 멀었는지 알 수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백작이 좋아도 그렇지, 그녀는 부모한테 자식으로서 못 할 말을 한 거다.

    나는 공작 부인을 끌어안은 그대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피데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억지로 데려온 겁니다. 보고 싶어 하셨잖아요.”

    “내가 보고 싶어 한 건 공작가의 후계자였지, 백작 부인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얼핏 보아서는 매우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촉촉하게 젖은 눈가나 꾹 다문 입술을 보건대, 카를라에게 분노한 게 아니라 자존심을 세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부모를 앞에 두고 표정을 분석하는 딸이 어디에 있을까만은, 나는 그들의 얼굴을 꼼꼼하게 훑어야 했다. 그들이 앞으로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는 오롯하게 내 대답에 달려 있었다.

    ‘이렇게 태평하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내가 카를라가 아니기 때문이겠지.’

    공작은 후계 자리를 포기한 첫째 딸을 싫어하지 않는다. 피데스는 장난스럽게 굴긴 해도 거짓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진정으로 부모에게 이기려고 들어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 나는 공작 부인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공작가의 후계자였던 이도 아니고 백작 부인도 아닌, 그저 카를라로 찾아왔어요, 아버지.”

    그제야 공작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커다란 손으로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은 내가 아니라 집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 하고 있나?”

    “예?”

    집사가 얼빠진 소리를 내자 공작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큰 애가 손님을 모셔 왔지 않나. 얼른 손님방으로 안내하지 않고 뭘 하나?”

    그제야 집사는 문 근처에 서 있던 테오도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무래도 나와 공작 부인의 재회가 강렬했던 나머지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집사는 화들짝 놀라며 사과했다.

    “지금 바로 손님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손님이 아니니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카를라 님의 호위입니다.”

    “카를라의 호위요? 혹시…….”

    공작 부인은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입가를 가리고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테오도르는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테오도르라고 불러 주십시오. 신전 소속 성기사로, 폐하의 명으로 카를라 님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어머나, 하고 공작 부인이 입을 벌렸다.

    “여보, 들었어요? 테오도르 경이래요.”

    “들었소, 성기사라고.”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공작 부인은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바닥에 무너져 울었냐는 듯, 그녀는 안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위대하신 분께서는 항상 계획을 세우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분의 계획을 한낱 미물인 저희가 알 수는 없으나…….”

    “다만 준비한 길을 걸을 뿐.”

    그들은 내가 알 수 없는 말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위대한 분이 어쩌고, 하는 것을 듣자 하니 신앙에 관한 이야기인 듯했다. 집사마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슬금슬금 피데스의 옆으로 향했다.

    “내가 소공작이 되는 바람에 서임이 취소됐잖아. 그 뒤로 성기사만 보면 저러셔. 내색은 안 해도 서임식을 기대하셨던 거 같아.”

    때마침 피데스가 그들의 기행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시선 또한 테오도르에게 향해 있었다.

    카를라가 나간 덕분에 소공작이 되었으니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녀는 소공작보다 성기사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기사처럼 보이는 그녀의 복장도 아쉬움의 표현처럼 느껴졌다.

    나는 피데스에게 깊은 연민과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갑자기 원치 않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었음에도 차마 카를라를 미워하지 못하고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까지 했다. 카를라가 사과해야 하는 사람은 부모뿐만이 아니었다.

    “미안해.”

    “뭐가?”

    “그냥. 형편없는 언니였구나 싶어서.”

    “새삼스럽긴.”

    피데스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은데, 어떻게 할래?”

    그녀는 턱을 들어 올려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는 세 명을 가리켰다. 피데스의 말대로 그들은 좀처럼 이야기를 끝내지 않을 거 같았다.

    그러나 공작과 공작 부인은 테오도르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곁눈질로 자꾸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런 그들을 두고 자리를 뜨고 싶지는 않았다.

    “좀 더 있다가 들어가지 뭐.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니까 좋다.”

    “언니가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피데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흘겨보았다.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지만, 이내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속삭이는 그녀 덕분에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진짜 보고 싶었어.”

    수줍음을 타는 동생을 끌어안아 주었다. 피데스는 몇 번 버둥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나를 꼭 껴안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카를라도 이 사랑스러운 가족이 보고 싶었을 게 분명했다.

    * * *

    공작과 공작 부인 그리고 테오도르의 이상한 대화는 위대한 분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끝났다.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었건만 그들은 내가 아주 오랜 시간 서 있었던 것처럼 굴었다.

    “이야기가 길어졌구나. 피곤하지는 않으냐?”

    “내 정신 좀 봐. 너무 기뻐서 그랬단다. 위대하신 분이 너를 다시 돌려주신 거야.”

    공작은 이마에, 공작 부인은 뺨에 입을 맞췄다. 다정한 애정 표현에 또 코끝이 찡해졌다.

    그들은 나를 직접 카를라의 방까지 데려다주고도 아쉬운 듯 자꾸만 손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늦었어요. 주무셔야죠.”

    “그래. 푹 쉬어라.”

    “시중이 필요하면 유모를 부르렴.”

    “위대한 분이 너를 보호하시길.”

    공작 내외는 아쉽게 돌아섰다. 그제야 들어선 카를라의 방은 먼지 한 톨 없었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리된 방은 급하게 치웠다기보다 꾸준히 관리해 온 듯했다. 나는 복도를 슬쩍 살핀 뒤, 문을 닫기 전 테오도르에게 손짓했다.

    “테오도르 경, 잠시 들어와 봐요.”

    그는 머뭇거리기는 했으나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카를라의 방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백작가에 있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나 혼자 뒤지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었다.

    “숨겨 둔 일기장 같은 걸 찾아야 해요.”

    “일기장 말씀입니까?”

    “꼭 일기장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뭐든 좋아요.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찾고 싶어요.”

    두루뭉술한 말이었으나 나조차도 정확히 뭘 찾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라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뭐가 도움이 될지 모르니 답답했다.

    게임처럼 이 아이템이 중요합니다, 이 정보가 중요합니다, 설명해 주는 시스템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테오도르는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책장을 살펴봐 줄래요?”

    테오도르가 책장을 찾는 동안 나는 화장대 주변을 뒤지기로 했다. 카를라의 화장대 서랍은 백작가에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귀걸이는 아예 없었고, 반지나 팔찌 몇 점만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장 아래에 있는 서랍에는 편지 뭉치가 들어 있었는데, 언뜻 보기엔 깔끔해 보였으나 오래된 건지 가장자리가 해져 있었다.

    ‘누가 보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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