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8화
남작의 남편, 아틀라스가 뒤뚱뒤뚱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땀을 폭포처럼 흘리고 있었는데, 얼마나 양이 많은지 손수건으로 열심히 닦는 보람이 없어 보였다.
“여기 계셨군요, 하하.”
“어머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땀을 이리…….”
“큼, 그게…….”
그는 손을 연신 비벼 대다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부군께서, 큼, 그러니 이카루스 백작께서…….”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
혹시 싸움이 벌어져 실컷 두들겨 맞았다거나, 넘어져 머리를 부딪쳤다는 소식은 아닐까, 들뜬 기색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아쉽게도 아틀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하하, 기분이 좋으셨는지 술을 좀, 과하게 드셔서 말입니다.”
“이런, 언니의 남편은 술버릇도 좋지 못한가 봅니다.”
소공작이 비아냥거렸다. 아틀라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피데스가 역으로 내 팔뚝을 쥐었다.
“사랑스러운 부인을 두고 술에 취한 남자는 내버려 두시죠.”
그녀가 차갑게 일갈했다.
“술에서 깨면 알아서 오지 않을까요?”
“그게 말입니다. 아예 잠들어 버리셨지 뭡니까.”
흠뻑 젖은 손수건을 쥔 아틀라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잠시 고민해야 했다.
테오도르라면 의식을 잃은 남성도 쉽게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차를 태워 저택에 도착하면 사용인들이 알아서 그의 옷을 갈아입히고 수발을 들어 주겠지. 그러니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되었다.
지금 내가 고민하는 건 다른 일이었다. 그저 뭐가 예쁘다고 술에 취한 놈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버리고 가고 싶은데.’
하지만 남의 눈이 있는 곳이니 멋대로 굴면 곤란했다. 적어도 지금은 ‘백작을 사랑하는 카를라’처럼 보여야 했다. 태도가 천천히 바뀌어야 사교계의 여론을 내 편으로 만들기 쉬울 터였다. 곤란한 척 눈을 깜빡이고만 있자 피데스가 입을 열었다.
“제 마차로 태워 드리겠습니다. 타고 오신 마차는 백작에게 양보하시죠.”
그녀는 호쾌하게 말했다.
“아틀라스 남작 부군은 마음이 넓은 사람이니, 백작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잘 보살펴 줄 겁니다.”
“하지만…….”
“남편이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오랜만에 보는 동생에게도 신경을 써 주시죠, 언니.”
“하, 하하, 맞습니다, 부인. 백작님은 걱정하시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한 겁니다!”
피데스의 말에 순식간에 아틀라스의 말이 바뀌었다. 그는 이마를 연신 손수건으로 훔치며 웃었다.
“그렇다네요. 오랜만에 언니와 돈독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 같아 기쁩니다.”
피데스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요염한 미소였다.
* * *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는 화려했다. 백작의 마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붕에는 책 모양의 문양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었고, 문은 금색의 장미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마차는 지붕부터 바퀴의 축까지 온통 흰색이었는데, 마차를 끄는 네 마리 말의 털도 흰빛이었다.
백작이 정신을 차리면 같이 오라고 리자를 내버려 두고 온 게 정답이었다. 그녀였다면 이렇게 화려한 마차는 처음 타 본다며 방방 뛰었을 게 분명했다.
“자, 타시죠.”
어깨를 으쓱이는 피데스를 뒤로하고 테오도르의 팔을 잡았다. 그는 능숙하게 나를 마차 위로 올려 주었다.
그 뒤로 마차에 탄 피데스는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테오도르가 내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마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피데스는 다리를 꼬고 앉아 나를 보고만 있었고, 테오도르는 원래 과묵했다. 나도 입을 다물고 창밖만 바라봤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졸았던 모양이다. 부스스하게 눈을 뜨니 피데스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지?’
침이라도 흘렸나 싶어 입가를 만졌지만, 얼굴은 습기 하나 없이 뽀송뽀송했다.
“큽, 큭…… 잘 잤어?”
“피곤해서 잠시 눈을 붙였을 뿐이에요.”
새침하게 대꾸하며 몸을 바로 세웠다.
‘잠깐. 내가 어디에 기대어 있던 거지?’
화들짝 놀라 내 머리가 기대고 있던 곳을 보니 테오도르가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테오도르의 어깨에 기대어 잔 모양이었다. 단번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테오도르 경, 죄송해요. 어쩜 좋지. 무거우셨을 텐데.”
“아닙니다! 무겁지 않았습니다!”
테오도르는 기계처럼 뻣뻣하게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아무도 없는 의자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민망했다.
얼마나 테오도르에게 기대고 있었는지 가늠하기 위해 창밖을 보았으나 어째서인지 전혀 모르는 길이 보였다. 아무리 지리에 어둡다고 해도, 올 때 보았던 풍경과는 다르다는 걸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집으로 가는 거 맞나요?”
“응.”
피데스가 능청맞게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백작가로 가는 길이 아닌 거 같은데요.”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보통 그런 예감은 잘 맞는 편이다.
“집에 가자고 했잖아. 우리 집은 여기지.”
* * *
여기가 소설 속이라면, 아니 이미 소설 속이기는 했지만, 이딴 전개가 말이 되냐고 책을 집어 던졌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공작의 저택으로 납치당하다니, 복선은 몰라도 의미심장한 대사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이다. 물론 소공작이 나를 해칠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어이가 없는 건 없는 거였다.
“미쳤어?”
“아니. 안 미쳤는데?”
피데스는 아예 나를 놀리기로 마음먹었는지, 꼬고 있던 다리를 쭉 펴고는 내 발을 툭툭 건들기 시작했다.
“안 미쳤는데, 완전 제정신인데. 쥐구멍 같은 집보다 우리 집에서 편하게 쉬는 게 낫지.”
“소공작님, 횡포도 정도가 있는 거예요.”
“아니지, 아니야. 이건 동생의 어리광이라고 하는 거야.”
그녀는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기가 막혔다. 소공작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굳어 있는 테오도르에게도 화를 냈다.
“이상한 곳으로 가면 말렸어야죠!”
“죄송합니다.”
테오도르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양심이 따끔거렸다. 그래, 내가 졸아 놓고 남 탓을 하는 건 옹졸하고 치졸한 짓이었다. 나는 다시 모든 일의 원흉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이 만행은 없던 일로 하겠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싶은데?”
“이미 도착했어. 이걸 어쩌나!”
피데스 소공작이 얄밉게 웃었다. 세상 모든 동생이 이런 걸까? 낄낄거리는 입을 두 대만 때리면 원이 없을 거 같았다.
마차 밖으로 보이는 저택은 크고 웅장했다. 회반죽을 바른 것처럼 흰 벽에는 얼룩 하나 없었다. 화려한 장식은커녕 조그마한 꾸밈조차 없어 밋밋해 보였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긴 저택이라기보다는 수도원처럼 보여.’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내리시죠.”
소공작은 문을 열고 마차 아래로 껑충 뛰어내렸다. 그런 다음 테오도르가 내려 내가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었다.
문 앞에는 여러 명의 사용인이 서 있었는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앞치마로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는 늙은 여인이었다.
‘카를라의 유모인가?’
목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카를라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 떨어진 거다. 아니, 혼자는 아니었다.
‘만약의 경우엔 테오도르가 지켜 줄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아주 조금 자신감이 생겼다. 사용인들은 늦은 시간인데도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내게 공손히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아가씨.”
이미 결혼한 사람에게 마님도 아니고 아가씨라니, 백작을 얼마나 탐탁잖게 여기고 있는지 느껴졌다.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피데스가 독촉했다.
“언니, 대답해 줘야지.”
머리는 지극히 이성적으로, 그들에게 한마디 쏘아붙여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감히 사용인들이 백작 부인을 무시하냐고 화를 내야 했다. 적어도 소공작인 피데스에게는 손님 접대를 이따위로 하느냐고 비아냥거리는 게 맞았다.
그러나 이 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카를라를 마치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아가씨처럼 대하는 그들에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사용인들은 내가 대답하기 전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는 듯, 하나같이 허리를 깊게 숙이고 있었다.
괜히 먹먹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왔어.”
그러자 그들이 일제히 허리를 들어 올렸다. 사용인들은 활짝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피데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왕궁처럼 넓은 홀이 펼쳐졌다. 벽과 바닥은 물론이고 양쪽으로 둥글게 펼쳐진 계단마저 흰색이었다.
‘흰색 못 써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기가 질릴 정도로 색이 없는 집이었으나, 다행히도 장식물은 알록달록한 것들이 많았다. 피데스는 집사처럼 보이는 늙은 남자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주무시고 계시나?”
“응접실에 계십니다.”
“아버지는?”
“역시 응접실에 계십니다. 큰 아가씨가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둘의 대화를 듣자 나를 데려온 게 미리 계획된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감쪽같이 속은 기분이었다. 내가 눈을 부라리자 피데스가 시선을 피하며 어물어물 변명했다.
“아니, 뭐, 백작이 취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 온 거잖아.”
의심스러운 태도였다. 백작은 분명 다른 사람과 게임을 하겠다며 내 곁을 떠났다. 피데스는 그와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한 거지? 다른 사람을 사주해서 약이라도 먹인 걸까? 그녀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소공작님이라면 충분히 하실 수 있으시겠죠.”
“왜 사람을 의심하고 그래?”
“의심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요, 소공작님.”
“존댓말 하고 있잖아.”
“당연한 예의일 뿐이에요.”
우리가 말싸움을 하는데도 사용인들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집사는 아이들 싸움을 보듯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아가씨, 방에 드시기 전에 응접실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턱을 치켜들며 새침하게 대꾸하자 피데스가 뛸 듯이 기뻐했다.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