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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7)화 (37/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7화

    “진짜 이길 줄은 몰랐는데.”

    “날 믿었던 거 아니었어?”

    “반만 믿었죠.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의 계획은 이랬다. 우선 피데스가 연패를 거듭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게 만든다. 나 또한 피데스의 반대편에 선 사람이 이기는 데 돈을 걸며 바람잡이를 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돈을 거는 사람이 줄어들면, 내가 큰돈을 피데스에게 걸어 한몫 단단히 벌어들이는 것이다.

    소공작은 원래 마지막 판의 판돈을 올려 혼자 한몫 챙길 모양이었으나, 그런 노골적인 짓보다는 공범이 있는 편이 모양새가 좋아 보인다는 말로 그녀를 설득했다. 빤히 보이는 속셈이었는데도 피데스는 순순히 계획을 수정해 주었다.

    그녀가 정말 이길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기는 했으나, 결과가 좋으니 믿길 잘한 셈이었다. 사실, 피데스가 지면 네 탓이니 물어내라고 할 생각이기는 했다.

    “그래서 많이 벌었어?”

    “무서울 정도로요.”

    나와 그녀는 사기꾼이나 할 법한 짓을 하고서 킬킬 웃었다. 벌어들인 수익이 누가 알면 자매 전문 사기단이 아니냐고 놀랄 정도로 많았다.

    ‘분위기를 살피려고 온 건데 피데스랑 놀기만 했네.’

    잠시 현실을 자각했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군자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근데 그 망할 존댓말은 언제 그만둘 거야?”

    “소공작님께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아, 좀!”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짜증을 감추지 않았는데, 어리광을 부리는 동생 같아 놀리는 맛이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꽁해 있을 거야?”

    “꽁한 적 없어요.”

    “우리 이런 사이 아니었잖아.”

    원래 둘이 무슨 사이였는지 내가 알 게 뭔가. 한평생 외동으로 살아와서 오래전에 싸운 동생과 화해하는 법 따위는 몰랐다.

    “됐어. 그럼 그냥 계속 삐져 있어. 유치하긴.”

    “안 그래도 그렇게 할 거랍니다.”

    어깨를 으쓱이자 피데스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녀의 표정은 이전보다 편해 보였는데, 어쩌면 이게 자매들이 화해하는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천천히 자리를 옮기며 테이블을 구경했다. 여러 번 게임을 훑어보니 어느 정도 누가 이길지 가늠이 되었다.

    “이번엔 오른쪽 사람이 이길 거 같네요.”

    “텔리아 경? 그러게. 게임은 잘 못해도 신경전을 잘하니까. 기사라 그런가, 표정 관리를 잘해.”

    피데스는 내가 짚은 사람을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언니는 사람 보는 눈이 좋은가 봐.”

    왕은 카를라에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했는데, 동생은 정반대의 평가를 내놓았다. 카를라와 친했던 두 사람의 상반된 평가를 들으니 괜한 웃음이 나왔다. 평가의 대상이 두 명이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위대한 분께서 불쌍한 언니에게 이제야 사람 보는 눈을 주셨든지.”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카를라와 화해할 생각은 있어도 백작과의 결혼은 아직도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내가 카를라라 맞장구를 칠 수도 없었다.

    듣지 못한 척 다른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이왕 생각난 김에 백작이 어디에서 놀고 있나 한번 확인할 심산이었다.

    ‘어라?’

    그러나 백작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홀을 전부 훑어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자 테오도르가 조용히 물었다.

    “찾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백작님이 보이지 않아서요.”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테오도르가 주변을 훑어보았다.

    “홀 안에는 안 계십니다.”

    테오도르는 시력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백작이 홀 안에 없다니, 혼자 가 버린 건 아니겠지.

    마차를 한 대만 가지고 온 터라 그가 먼저 가 버리면 저택에 돌아갈 방법이 요원했다. 팔짱을 끼고 고심하고 있자 테오도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모시고 올까요?”

    “누구를요?”

    “백작님을 찾고 계셨지 않습니까?”

    “굳이 경이 데려올 필요는 없어요.”

    코웃음을 치며 대꾸하자 테오도르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전할 말이 있어서 찾으신 게 아니십니까? 제가 모셔오겠습니다.”

    그가 귀찮은 일을 자처하며 물었다. 자상한 성격인 테오도르가 백작을 걱정하고 있나 싶어 조금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뱉었다.

    “그럴 리가요. 먼저 돌아갔으면 어쩌지 싶어서 살핀 것뿐이에요. 마차가 한 대밖에 없으니까요.”

    쌀쌀맞게 대꾸하고는 다시 피데스에게 눈을 돌렸다. 그녀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히죽거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백작이 먼저 돌아갔으면 내 마차로 태워다 줄게. 도착지가 어딘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것참 듣던 중 고마운 말이군요.”

    피데스의 농담에 같이 웃다가 다시 게임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게임들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고, 대부분 내가 예상한 대로 승패가 갈리고 있었다.

    피데스는 재미가 없다는 듯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조금씩 뒷걸음질을 쳐서 사람들과 적당히 떨어진 후, 목소리를 낮춰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보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언제부터 그런 걸 말하고 물었다고.”

    피데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아까 마지막 판을 이겼잖아요. 어떻게 이긴 거죠? 정말 운이 좋았던 건가요?”

    피데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카드 순서를 다 외운 거지.”

    “뭐?”

    믿을 수 없는 말에 깜짝 놀라니 피데스는 대수롭지 않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카드가 다 없어지면 하인이 몇 번 섞고 다시 내려놓잖아. 그런데 완전히 무작위로 섞어 버리지는 않더라고. 일정한 패턴이 있으니까 기본적으로 카드 순서는 버린 순서랑 비슷해.”

    카드 순서를 모두 외우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트럼프는 52장이나 되고, 열 장씩 나눠 가진다고 해도 상당한 양이었다.

    “그걸 다 외웠단 말이에요?”

    “왜 그렇게 놀라?”

    그녀는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언니가 가르쳐 준 거잖아.”

    카를라가 그런 방법을 가르쳐 줬다는 것에 놀라야 할까, 아니면 그런 방법을 그대로 해낸 피데스에게 놀라야 할까. 입을 다물고 눈만 끔뻑이고 있자 그녀가 허탈하게 말했다.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는 걸 들킬까 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친구였던 왕도 내 목에 칼을 들이밀었는데, 가족이 알게 되면 어떻게 나올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기억도 안 나지? 아무튼, 언니가 말해 준 거야. 운이 없으면 그런 방법도 있다고.”

    그러나 다행히도 피데스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큰돈 따게 도와줬으니까 여기에 온 ‘진짜’ 이유나 말해 봐.”

    “이미 말씀 드렸는데요.”

    “거짓말인 게 뻔한데 뭐. 아틀라스는 친해져 봤자 도움이 안 되는 부류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녀는 비아냥거리며 의도를 캐내려고 애썼다. 그래도 이본 남작의 치부를 함부로 말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피데스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혹시 백작이 품위 유지비를 적게 줘?”

    다른 사람이 얼마나 받는지 모르겠지만, 카를라는 그 품위 유지비를 아껴 다시 백작에게 돌려주고는 했다. 그러니 적게 주는 것과 다름없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피데스가 입을 벌렸다.

    “맙소사…… 지참금은?”

    이건 전적으로 카를라의 잘못이었다. 광산 하나는 되찾아 왔지만, 나머지 지참금은 아직도 백작의 손에 있었다. 내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자 그녀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신음했다.

    “어쩐지, 그딴 옷을 입고 다니더라.”

    카를라의 명예를 위해 변명하자면, 내 안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옷감도 좋은 것으로 썼고, 디자인도 최대한 유행에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피데스의 눈에는 영 차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매는 고래수염으로 만든 건데.”

    어설프게 변명하자 피데스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 못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는 나를 몰아붙였다.

    “언니가 가르쳐 준 건데 왜 모르는 척해? 파티에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떤 색이 우호의 표현인지! 사교계는 숨 쉬는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라고 가르쳤잖아!”

    피데스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나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고 눈치를 줬다. 주변에 있던 사람 몇 명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게 보였다.

    “너무 흥분하셨어요, 소공작님.”

    “흥분 안 하게 생겼어? 결혼하기 전까지 언니는 완벽했는데, 지금은 멍청이처럼 굴잖아.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한데 나한테는 말도 안 해 주고.”

    아무래도 피데스는 제 언니를, 카를라를 매우 좋아했던 모양이었다. 화를 내는 도중에도 추켜세우니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언니는 항상 이런 기분을 맛보는 걸까.

    그녀는 입을 삐죽이며 자신이 배운 것들에 대해 늘어놓았다. 감색은 ‘피곤하니 사교적 행동은 자제해 달라’는 표현이라고 했다. 어쩐지 말을 거는 사람이 없더라니. 덧붙여 노란색은 행복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단다.

    ‘옷 색깔에도 그런 의미가 있다니,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책 속 세계라고는 해도 확고한 규칙과 질서가 있었다. 특히나 카를라가 속해 있는 곳은 귀족 사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계의 지식이 부족하다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사교계와 상관없는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소공작님 눈에 차지 않는 것도 당연해요.”

    그러나 여기서 피데스에게 휘말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소공작님, 저는 백작 부인이고, 남편의 말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걸요. 자유로우신 소공작님과는 달라요.”

    은근슬쩍 백작을 내세우며 내가 멍청하게 굴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피데스가 카를라를 대단한 사람으로 본다면, 그 환상을 부숴서 얕보일 필요는 없었다. 단번에 피데스의 눈에 불이 붙었다.

    “어쩐지, 저번에 봤을 때도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언니가 손님을 맞이할 때 그렇게 초라하게 입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이게 다 그 멍청한 백작 때문이라 이거지.”

    그녀는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다. 피데스의 험악한 표정 때문인지 우리 곁을 맴돌던 귀족들이 조심스럽게 멀어져 가는 게 보였다.

    “그 자식이 언니랑 결혼한다고 했을 때 목을 따 버려야 했어. 찢어 죽일 자식! 당장 결투를 신청하겠어.”

    피데스는 분노에 차 화를 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카를라 님, 말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내버려 둬요. 저러다 말겠죠.”

    “피데스 소공작은 상당한 실력자입니다. 예정대로 성기사단에 입단했다면 좋은 상대가 되었을 텐데…….”

    백작을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피데스와 겨룰 수 없어 아쉬워하는 건지 모호한 태도였다. 나는 소공작이 어디로 튀어 나가지 못하도록 그녀의 팔꿈치를 쥐고 잡아당겼다.

    “그만두세요, 저기 아틀라스 경이 오고 있어요.”

    피데스는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금세 태도를 바꾸었다. 언제 열을 냈냐는 듯 말쑥한 표정을 덮어쓴 소공작은 위엄 있는 귀족 자제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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