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6화
* * *
내가 뭐라 할 처지는 아니지만 소공작도 번번이 게임에서 이기지 못했다. 그녀가 짜증스럽게 또 졌다며 카드를 내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운이 없다며 카드를 찢었던 기억의 주인공은 카를라가 아니라 피데스 소공작 쪽인 것 같았다.
그녀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걸 보고도 모른 체하며 자세를 고쳐 앉자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비아냥거림이 멋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자신만만하게 말씀하신 것치고는 화를 많이 내시더군요. 얼마나 목소리가 크던지 여기까지 다 들렸어요.”
“게임을 15판이나 했는데 내내 지면 보통 뭔가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운이 없으셨나 보죠.”
“동생을 너무 못 믿으시네요.”
“흥.”
피데스 소공작과 티격태격 대화하는 건 신경을 써야 하기는 했으나 어색하지 않았다. 어쩐지 평생 싸우며 지낸 친구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보는 사람인데 말이다.
나는 마지막 카드를 엎었다. 기사 한 장도 없는 카드 패를 보며 아틀라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게임은 즐기는 거죠. 이런, 방금 그런 말을 하고선 제가 이겼네요.”
그는 즐거운 듯 카드를 내려놓았는데, 이것으로 아틀라스가 다섯 판 중 네 판을 내리 이긴 셈이었다.
초심자의 행운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나를 떠보기 위해 져 준 건지 알 수 없는 첫판만이 유일하게 내가 승리한 게임이었다.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머리 장식 두 개가 남작의 남편에게 넘어갔으나 그리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백작의 돈으로 산 거니까.
“많이 배웠으니 수업료라고 생각하겠어요.”
“게임을 직접 하시는 거 말고도 즐기는 방법은 많습니다.”
그는 내가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했는지 손수건을 꺼내 손바닥을 닦았다.
“어떤 게 있나요?”
“사람에게 거는 거지요. 누가 이기는 데 걸어도 좋고 지는 데 걸어도 재미있을 겁니다.”
“어머나, 어렵지 않을까요?”
“몇 번 해 보시면 금방 감을 잡으실 겁니다.”
남에게 거는 것이라면 내가 직접 게임을 하는 것보다 훨씬 승률이 높을 거 같았다.
뒤에 서 있던 피데스 소공작이 팔짱을 풀고 나를 보더니 한 손을 높게 들었다. 저에게 돈을 걸라는 의미 같았다. 방금까지 줄곧 졌으면서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
“지는 쪽에 걸어도 된다고 했죠?”
“그럼요.”
의자에 앉아 그대로 소공작을 턱짓해 보였다. 다소 건방져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그녀는 카를라의 동생이니 다른 이들도 이해할 거였다.
“그럼 다음 게임은 무조건 소공작님이 진다는 거에 걸게요.”
“좀 봐주십시오, 언니.”
“승률이 높은 곳에 투자하는 것뿐이에요.”
“게임은 모험을 하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닌데요.”
우리가 투덕거리자 아틀라스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우애가 정말 깊으시군요.”
“그렇게 보인다니 다행이에요.”
“하, 하하…… 소공작님께서 평소엔 저렇게 심하게 지지 않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긴장하신 모양입니다.”
그는 이본 남작에게 들었던 것과 달리 소심하고 눈치를 많이 보았다. 아마 이본 남작이 해 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그저 마음이 유약한 남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도 실력이죠.”
“제게 너무 냉정하신 거 아닙니까? 평소엔 이것보다 더 많이 이깁니다.”
“오늘 소공작님이 진 것 역시 실력이니 이만 받아들이세요.”
“백작 부인께서 게임을 못 하시는 것처럼요?”
아틀라스는 피데스 소공작의 말투에 점점 날이 서자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슬그머니 허리를 뒤로 뺐다.
“음, 저는 이만 다른 게임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하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그가 멀어지자마자 피데스 소공작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짓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소공작님과 관련 없는 일이죠.”
피데스 소공작은 입을 삐죽거렸는데, 그런 표정을 짓자마자 그녀가 전처럼 어리게 느껴졌다. 문득 어느 정도는 말해 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실행하려고 했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이본 남작의 일은 쏙 빼고.
피데스 소공작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카드 게임으로 아틀라스와 친분을 쌓으려고 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소공작님이 방해하지 않았어도 좀 더 친해졌을 거예요.”
“언니답지 않게 멍청한 생각이었어. 친해지기 전에 파산했을걸.”
“그건 부정할 수 없네요.”
몇 판을 내리 지고 나니 동감하는 바였다.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더니, 그녀는 삐죽거리던 입을 다시 넣고 진지하게 말했다.
“저 돼지는 위험해.”
“돼지?”
“언니를 초대한 놈 말이야. 강한 사람한테는 꼼짝도 못 하면서 약한 사람한테는 아주 멋대로 굴거든. 언니 남편보다 질이 더 나빠. 저런 사람이랑 어울리지 말고 다른 파티를 찾아봐.”
“그건 소공작님이 참견하실 일이 아녜요.”
이번에는 내가 입을 삐죽였다. 그녀의 말처럼 진짜로 아틀라스와 친해질 생각 따위 조금도 없었지만, 동생에게 충고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는 소공작님은 계속 잃는 게임만 반복하시고 있…….”
말하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여기가 드라마나 영화도 아니고.’
허무맹랑한 상상을 부정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열다섯 판을 내리 지고, 그걸 과하게 어필하던 모습은 부자연스러웠다.
손가락을 까딱이자 소공작이 상체를 가볍게 기울여 귀를 대어 주었다. 카를라보다 몇 센티밖에 크지 않으면서 그보다 한참 작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얄미운 마음을 삼키고 생각한 것을 귀에 속삭였다.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니까.”
피데스 소공작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계획, 조금 수정해 줄 수 있어요?”
여기에 돈을 벌려고 온 건 아니었지만, 괜찮은 기회가 있는데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틀라스가 어떤 사람인지는 얼추 파악했으니, 남은 시간 동안 주머니를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틀라스와 친해지는 건 급할 게 없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소공작의 귀에 다시 속삭이기 시작했다.
“좋아. 나만 믿어.”
소공작이 짓궂게 웃었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이 거울에서 내내 보았던 카를라의 것과 닮아 있었다.
* * *
다른 사람에게 거는 방법은 간단했다. 각 테이블을 담당하는 사용인에게 말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들은 게임마다 누가 얼마나, 누구에게 거는지를 기록했다.
“소공작님께서 지는 데 걸겠어.”
“소공작님께서 지는 쪽에 말씀입니까?”
그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몇 판을 내리 같은 말을 듣자 곧 익숙해졌다.
“지는 쪽에.”
누가 지는지 말하지 않아도 냉큼 받아 적는 모습이 흐뭇했다.
“다음 판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역시 똑같이.”
“언니, 날 못 믿습니까?”
“네.”
“이번엔 다를 겁니다. 귀여운 동생을 믿어 주시죠.”
테이블에 앉아 짜증스럽게 카드를 만지던 소공작이 내게 항의하자, 주변 귀족들이 킥킥 웃었다.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한 번 정도는 편을 들어 주시죠.”
“어머나, 승패는 냉정한 법 아니던가요.”
아틀라스가 히죽거리며 나를 부추겼다. 나와 소공작을 좋은 봉으로 보는 게 틀림없었다.
피데스는 과장되게 투덜거리며 게임을 계속 진행했다. 역시나 처참하게 지자, 그녀는 손을 모으고 외쳤다.
“위대한 분이시여, 종을 도우소서.”
고상한 동작이었으나, 게임 테이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피데스 소공작이 보내는 신호였다.
‘믿어도 될까?’
이성은 소공작을 완전히 믿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지만, 본능은 그녀를 믿어 보라고 속삭였다. 나는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승패를 기록하는 사용인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번에는 소공작님이 이기는 데 지금까지 건 금액의 전부를 합친 만큼 걸지.”
사용인은 빠르게 금액을 계산했다. 조금씩 걸긴 했지만, 모으면 상당한 양이 되었다. 사용인이 기록을 마치는 걸 확인한 아틀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번에는 이기는 데에 거셨습니까? 소공작님이 좋아하시겠군요.”
이본 남작의 남편은 나쁜 의미로 붙임성이 좋았다. 그는 기회가 생기면 끝없이 말을 걸었다.
“저렇게 우는소리를 하니 언니로서 내버려 둘 수가 없네요.”
“우애가 좋으시군요.”
그의 입이 귀에까지 걸렸다. 소공작이 처참하게 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건 두고 봐야 할 일이었다.
* * *
피데스 소공작은 게임을 오래 끌고 갔다. 신경전이 오가고, 카드가 쉴 새 없이 뒤집히고 버려졌다. 이렇게 게임을 오래하는 일은 잘 없는지, 다른 테이블에서 게임을 끝낸 귀족들이 조금씩 모여들어 테이블 주위가 북적북적해졌다.
“지금 카드를 내려놓으면 후회할 텐데.”
“소공작님, 그런 허세는 통하지 않습니다.”
소공작의 패는 누가 보아도 좋은 패가 아니었다. 완성하면 가장 강력한 족보가 되겠지만 귀족이 없어서 족보를 완성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게임 상대의 패는 아주 약하기는 했으나 이미 족보가 완성되어 있었다.
“저는 카드를 내려놓겠습니다. 대신 뒤집어서요.”
“호의는 감사히 받죠.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시고.”
피데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카드를 한 장 집었다. 순간 주변 귀족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나 술렁거리는 분위기는 바꿀 수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어떻게 딱 이 타이밍에 그 카드가 나오지?’
피데스 소공작이 뽑은 카드는 다이아몬드 귀족이었다. 그녀는 족보를 완성해 테이블 위에 엎어 놓았다. 주변의 분위기로 승패가 확연하게 갈렸다는 걸 눈치챈 상대방이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렸다.
“기회를 드리죠. 포기하셔도 괜찮습니다.”
“호의를 받는 건 한 번으로 족해서요.”
둘은 동시에 카드를 뒤집었다. 그제야 주변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축하해요.”
“세상에, 운이 얼마나 좋으신지!”
“정말 위대하신 분께서 도우셨군요!”
소공작은 주변의 축하 인사를 받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뻐겼다. 카를라와 닮은 얼굴인데도 어린애처럼 구는 모습을 보니 퍽 귀엽게 느껴졌다.
“보셨죠? 이게 제 실력입니다.”
“위대한 분께서 보시다 못해 도와주신 게 아닐까요?”
우리는 사람들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은 곧 운 좋은 자매에게서 관심을 돌리고 다른 게임을 구경하러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