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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5)화 (35/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5화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하는 건방진 짓거리는 신전에서 배운 건가?”

백작은 신에 대한 모욕도 서슴지 않으며 빈정거렸다. 찻잔을 다 비우지도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기분이 단단히 상했는지, 리자와 늘 주고받던 헛기침도 하지 않고 빠르게 식당을 나갔다.

나는 백작이 떠나든 말든 찻잔을 마저 비우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끔 테오도르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런 말을 해 놓고 혼자 아무렇지 않다니 얄밉기까지 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예?”

“내가 꾸미든 꾸미지 않든 예쁘다고요?”

눈을 가볍게 흘기자 테오도르의 귓바퀴가 붉게 물드는 게 보였다. 음, 보기 좋네. 머뭇거리는 그를 지나쳐 방으로 향했다.

* * *

나는 틈이 날 때마다 리자를 불러 카드 게임을 했다. 실력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적어도 카드를 숨기거나 몰래 바꿔치기하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방금 다이아 기사를 숨겼지?”

“그냥 떠보시는 거면 안 꺼낼래요.”

“오른쪽 소매에 숨긴 거 봤어. 얼른 꺼내렴.”

리자가 숨긴 카드를 꺼낼 때마다 벨은 연신 감탄을 뱉었다. 얼마나 잘 숨기는지, 하녀가 아니면 노름꾼이 되었을 거라고 욕 같은 칭찬을 하기도 했다.

벨의 칭찬에 리자가 우쭐거렸다.

“딜러가 되면 더 잘할 수 있을걸요!”

그런 모습을 보니 이번 모임에 벨보다는 리자를 데려가는 게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전담 하녀들은 사용인들의 공간에서 대기하다가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 뛰어와야 하는데, 몇 번 파티에 참석해 보니 특별히 그들을 부를 일이 없었다. 그러니 아마 벨이 아니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얼추 듣기로는 대기하는 시간 동안 다른 사용인들과 친해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리자와 그들의 접점을 만들어 딜러들의 행동을 배우게 유도하는 건 어떨까.

연습 상대를 해 주며 쌓은 실력임을 생각하면 리자는 분명 카드 게임에 재능이 있었다. 그녀가 직접 카드 게임을 눈으로 보고 배운다면 카지노를 열 때도 써먹을 데가 있을 것이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리자를 불렀다.

* * *

백작과 카드 게임 모임에 가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초대받은 시간은 오후의 늦은 시간이었으나 백작은 오전부터 까다롭게 굴었다. 밝은색 옷을 입으면 경박하다 하고, 차분한 옷을 입으면 장례식에 가는 거냐며 핀잔을 주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옷을 더 맞추는 수밖에요.”

까칠한 말을 듣고 나서야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무난한 감색 드레스를 골랐다. 리자는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밖에서 마님을 모시는 건 처음이라 두근거려요!”

“태평해서 좋겠구나.”

퉁명스럽게 대꾸했으나 리자는 배시시 웃기만 할 뿐이었다.

벨은 리자를 전담 하녀로 데려가겠다는 말을 들은 직후부터 그녀를 붙들고 실수하지 말라며 몇 번이나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녀의 잔소리는 백작이 내게 한 말과 닮아 있었는데, 아무 곳에나 기웃거리지 말 것, 높은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 것 따위였다. 덕분에 아랫사람에게나 할 말을 부인에게 당당하게 늘어놓는 백작이 한층 더 싫어졌다.

백작은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은 더 일찍 방문을 두드리며 재촉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뻣뻣한 옷을 입고 있었고, 어쩐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왜 저렇게 정신 사납게 굴지?’

풀리지 않는 의문에 조용히 여러 가정을 떠올리는 사이, 마차는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왕궁이나 이본 남작의 집보다는 훨씬 작으나 그냥 카드 게임을 하려고 모이기엔 큰 저택이 보였다.

그러나 정원은 음산해 보일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고, 길이 고르지 않아 불편할 정도로 마차가 덜컹거렸다. 남작에게 돈을 다 뺏기고 쫓겨났다더니, 재정 상황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겨우 모양새만 낸 저택은 을씨년스러웠다.

리자는 흉흉한 저택의 모습에 겁을 먹었는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택이 엄청나게 큰데 관리하는 사람이 없나 봐요, 마님.”

“그렇구나.”

마차는 잡초가 무성한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렇게 관리가 안 된 정원은 처음이라 신기한 마음에 창밖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원 구석에 붉은 꽃이 보인 것 같기도 했다.

“너무 두리번거리지 마시오.”

백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마차가 움직이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터라 그의 목소리는 엉망으로 잠겨 있었다. 그 탓에 백작의 경고가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나는 부러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비아냥거렸다.

“백작님은 이런 곳이 익숙하셔서 좋으시겠어요. 아무래도 저는 이런 종류의 모임은 오랜만이라.”

“촌스럽기는.”

마지막 말에는 내가 아니라 리자가 반응했다. 그녀는 목을 쭉 빼고 창문을 기웃거리던 행동을 멈추고 눈치를 살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일 때까지도 백작은 매우 초조해 보였다. 얼마나 자주 이마의 땀을 닦아 내는지, 그의 손수건 무늬까지 외울 정도였다.

마차는 저택의 정문 앞에 멈추어 섰다. 집사라고 하기에는 젊고, 풋맨이라기에는 나이가 많은 남자가 허리를 깊게 숙이고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백작 부인.”

저택 앞의 남자는 자연스럽게 리자를 사용인에게 인계하고, 우리를 보았다. 그는 내 뒤에 서 있는 테오도르를 보고는 흠칫 놀라기는 했으나 금방 표정 관리를 하고 물었다.

“실례지만, 뒤의 분은?”

“폐하께서 명하신 호위요.”

“아, 성기사님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뵙는 건 처음이라.”

백작은 테오도르가 제 호위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으스대었다. 가슴을 가볍게 내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꼴불견이었다. 테오도르는 내 기사인데, 왜 그가 으쓱거린단 말인가.

남자는 우리를 홀로 안내했다. 홀은 전혀 화려하지 않았다. 간신히 멋을 낸 흔적만 남아 있어서, 어딘가 어수선해 보이기까지 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내로, 공작새처럼 화려한 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얼떨결에 백작을 훑어보았는데, 아침부터 요란을 떤 이유를 알게 되니 좀 더 그가 하찮게 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백작 부인.”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기도 전에 풍채가 좋은 남자가 다가왔다. 아니, 그는 풍채가 좋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눈높이는 나와 비슷했지만, 덩치는 세 배쯤 큰 사람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알은체하는 남자가 누구인지 몰라 그를 한번 훑어보았다. 콩알처럼 작은 눈과 들창코, 위아래로 뒤집힌 입술은 언뜻 보아도 잊기 힘든 외모였다.

홀에 들어오자마자 반갑게 다가오는 사람이라,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초대한 사람이겠지.

“인사하시오. 아틀라스 남작이오.”

백작이 나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의 정수리는 거의 벗겨지기 직전이었으나 간간이 남아 있는 머리카락은 확연하게 금빛을 띠고 있었다. 이본 남작의 남편인 게 분명했다.

“처음 뵙겠어요, 남작 부군.”

아틀라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눈 밑의 살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하하, 편하게 불러 주셔도 됩니다. 작위를 받은 지 오래되었지만, 명예 기사입니다.”

“그렇다면 아틀라스 경, 멋진 곳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생각 없이 뱉은 척 밝게 웃으니 그제야 그의 눈 밑이 평온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자존심보다 친분을 얻는 게 중요한 모양이었다. 소공작 앞에서의 백작과 어쩜 그리 같은지 유유상종이란 말이 절로 떠올랐다.

백작은 낮게 혀를 찼으나 크게 핀잔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또 땀을 한번 닦더니 다른 사람과 게임을 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옮겼다. 아마 백작에게 준 편지 속 내용이 나와 둘만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이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먼저 다가갈 필요도 없이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다.

아틀라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하하, 백작 부인 덕분에 오래 뵙지 못한 귀빈도 와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제 덕에 온 귀인이라. 누구신지 궁금하네요.”

그때, 등 뒤에서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접니다, 언니.”

소공작이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으나 목구멍으로 애써 욕을 삼키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대단한 우연이군요.”

그녀는 지난번 보았을 때와 다를 바 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얼핏 보아서는 테오도르와 같은 기사처럼 보였다.

“카드를 즐기지 않는 언니와 늘 바쁜 동생이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게임 모임에 놀랍게도 같은 날 초대받고, 또 둘 다 참석할 확률이 그리 높지는 않다는 점을 간과한다면 대단한 우연이고말고요.”

소공작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는 말을 참 얄밉게 했다. 일부러 나를 만나러 왔다는 말을 길게 하는 것도 재주였고.

남작의 남편은 대화에 끼고 싶은 듯했지만, 아쉽게도 소공작은 내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언니가 보고 싶어서 온 겁니다.”

“그렇군요. 기쁜 말씀이에요, 소공작님.”

노골적으로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나는 할 일이 있었다. 소공작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나를 따라 이곳에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휘말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는 게임을 배우러 온 거라, 오늘은 대화를 길게 하기 어렵겠어요.”

귀족의 화법을 흉내 내며 대화를 길게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비쳤으나 소공작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죽거리며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자기한테만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고 카드를 찢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니가 적극적으로 변해서 기쁩니다.”

“기억이 안 나는군요.”

정말 기억이 안 났다.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고 카드를 찢은 건 내가 아닌 카를라일 테니까.

“불리하면 꼭 이런다니까. 위대한 분께서 가호하시길. 아, 가호하셨으면 언니의 실력이 그 정도일 리가 없죠, 참.”

소공작은 얄밉게 말을 툭 내뱉고 아틀라스와 눈인사를 하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손수건으로 연신 손을 닦았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장신구를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하하, 제가 너무 얼이 빠져 있었네요. 게임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지요? 배우는 건 뭐든 직접 해 보는 게 최고지요.”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화답하고 곧 아틀라스의 안내를 받아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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