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4화
백작이 나가자마자 교대하듯 벨이 들어왔다. 그녀는 눈치가 참 빨랐다.
“마님, 속이 안 좋으시면 차를 더 올릴까요?”
고개를 젓고는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남작은 카지노에서 남편에게 양육권을 빼앗을 생각일 거다. 그러나 그가 이본과의 승부를 아예 거부해 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남의 일에 낄 생각은 없지만…… 대비 정도는 해 둬야 하는 거 아닐까?’
정말 만약의 경우, 그녀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내가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이본 남작의 남편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의 게임 실력을 갖추고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
백작에게 다음 카드 게임 모임의 초대장을 부탁해 놓은 상태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남작의 남편과 친분을 쌓아 놓으면, 이본 남작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캐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게임 실력을 쌓아 놓을 필요가 있다.
“벨, 저택에 카드가 있던가? 게임을 할 때 쓰는 거 말이야.”
“카드요? 찾으면 하나 정도는 있을 거예요. 가지고 올까요?”
“그래.”
벨은 야무지게 명령을 수행했다. 그녀는 하나가 아니라 세 종류의 카드를 가져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걸 사 오겠다고 말했다. 부하 직원이었다면 인사 평가 시즌에 후한 점수를 줬을 텐데.
각 카드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크기는 물론이고 종이 질마저 뒤죽박죽이었다. 탐탁잖은 표정을 짓자 벨이 변명처럼 말했다.
“오래된 거라서요.”
“상관없어. 연습만 할 수 있으면 돼.”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남작과 했던 게임을 복기하자, 리자가 저도 끼고 싶다는 듯 옆에서 기웃거렸다. 자그마한 머리통이 좌우로 기울어지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패를 늘어놓고 고심하는데, 리자가 하트 왕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마님, 여기 이 카드요, 왜 안 쓰세요?”
“필요 없으니 버려야지.”
“제일 강한 족보를 만들 수 있잖아요.”
“그러려면 귀족 카드가 필요한데, 카드가 없잖니.”
그녀가 카드 아래에서 새로운 카드를 꺼냈다. 하트 귀족이었다. 내가 내려놓은 것도 아니었고 그녀가 원래 들고 있던 카드도 아니었다.
“뭐니, 방금 그 카드는?”
“이 카드를 이렇게 놓으면 이렇게 되니까, 이길 수 있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서 꺼낸 거니?”
리자는 능숙하게 카드와 카드 사이에서 카드를 빼냈다.
“여기서요.”
짝, 짝, 짝. 힘없는 박수 소리가 울렸다. 벨은 멍하니 입을 벌리고 리자를 보고 있었다.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가 집은 카드를 카드 뭉치 사이에 숨겼다. 그리고 넣었던 카드를 그대로 다시 빼내 보였다. 놀라운 솜씨였다.
“안 놀라시네요.”
“아니, 놀랐어. 엄청나게 놀랐단다.”
“그렇죠? 카드 게임은 제가 저택 사람 중에서 제일 잘할걸요!”
리자가 헤헤 웃었다. 이번만은 구박할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게. 대단하구나.”
* * *
“마님,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을 이용하셔야죠. 방금 잘하셨어요! 한 번 더!”
리자는 가르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그러나 카드 게임은 무서울 정도로 잘했다.
듣자 하니 가끔 손님을 접대하는 하인들의 카드 게임 연습을 도와주곤 했단다. 속임수는 더 잘해서, 손가락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카드가 바뀌었다.
나와 벨, 테오도르, 리자는 테이블을 둘러싸고 나란히 앉아서 카드 뒤집기를 반복했다.
“방금은 제가 이겼습니다.”
“기사님, 너무 요행에 기대시면 안 돼요.”
“실력입니다.”
의외로 테오도르는 승부욕이 있었다. 몇 판을 내리 이기고 나서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벨은 운이 좋으면 이기고, 그렇지 않으면 졌다.
그리고 나는…….
“또 마님이 꼴찌예요.”
끔찍할 정도로 실력이 없었다. 내내 졌다. 한 판도 못 이겼을뿐더러 점수 차이는 처참할 정도였다. 아득바득 족보를 만들었는데도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왜 자꾸 질까?”
“그거야 마님이 테오도르 경의 얼굴에 신경이 팔려 있으시니까…….”
“리자!”
벨이 기함했지만 리자는 눈치만 볼 뿐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테오도르 경이 거짓말을 하는데도 다 믿어 주시잖아요. 벨이 카드를 버려 달라고 하면 다 버려 주시고…….”
“저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 거짓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카드 빼돌리는 걸 봐도 눈감아 주시고…….”
나도 할 말은 있었다. 테오도르의 말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고, 벨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쳐다볼 때면 매정하게 싫다고 뿌리치기 어려웠다. 그리고 리자가 카드를 빼돌리는 건 사실 보지도 못했다.
“억울해.”
“억울하다고 말씀하셔도…… 마님이 게임을 못하시니…… 마님의 탓이라고밖에는…….”
리자가 얄밉게 쫑알거렸다. 나는 그녀의 카드를 내 카드로 툭툭 쳤다.
“똑같이 배웠는데 왜 나만 못하지.”
분명 화투는 좀 칠 줄 아는데. 점수 계산을 못 해서 그렇지. 투덜거리자 리자가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마님, 처참할 정도로 실력이 없으신데요. 아무리 해도 이길 방법이 안 보여요. 그냥 포기하시는 게…….”
“아냐. 난 할 수 있어.”
다시 카드를 리자에게 넘겨주자 그녀가 패를 섞었다. 리자는 골고루 섞인 카드를 능숙하게 테오도르와 벨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도 여덟 장의 카드를 받았다.
“다시 해.”
두 손으로 카드를 꼭 쥔 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우리는 말없이 카드를 내려놓고 다시 가져오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는 꼭 이겨야지 하는 마음으로 카드를 다시 보는데, 리자가 패를 내려놓았다.
“순서대로 왕, 귀족, 기사 그리고 또 왕, 귀족, 기사. 제일 높은 족보 완성이에요.”
벨과 테오도르도 연달아 카드를 내려놓았다. 둘 다 높은 점수의 족보였다.
“……이건 사기야.”
“카드를 나눌 때부터 유리하게 나눴으니까 당연하죠.”
리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럼 시작부터 불공평했던 거잖아. 받아들일 수 없어. 다시 해.”
“다시 해도 처음부터 사기 치는 걸 못 알아내면 또 져요, 마님.”
테오도르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마침내 벨이 울상으로 물었다.
“마님, 카드 게임 말고 다른 게임은 어떠세요? 체스도 재미있을 거예요.”
“카드 게임으로 할 일이 있어서 그래.”
그러자 리자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꼭 게임을 잘하셔야 하는 건가요? 게임은 그냥 게임으로 즐길 때가 가장 재미있는걸요.”
그러게. 꼭 카드 게임을 잘할 필요는 없지. 유연한 계획 수정은 내 장점이었다. 리자의 말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니.
나는 대답 대신 한쪽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렸다.
* * *
운이 좋게도 백작이 받아 온 모임의 초대장은 남작의 남편이 보내온 것이었다. 그도 내심 왕과 친하게 지내는 ‘카를라’를 초대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냉큼 내어 준 모양이다.
백작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투덜거렸으나 이미 받아 온 초대장을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식탁 위에 초대장을 툭 하고 던지며 거칠게 찻잔을 달그락거렸다.
초대장은 ‘친애하는 백작 부인’으로 시작해 길고 긴 미사여구로 운을 띄우고 자리를 빛내 주길 바란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전형적인 초대 문구였으나, 흥분을 감출 수 없었는지 글씨를 꾹꾹 눌러쓴 티가 났다.
“부끄럽지 않게 준비하시오.”
“그럼요.”
백작은 몇 번이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들은 저명한 인사들이니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계속 웃어야 하고, 게임을 해 달라고 억지로 졸라서는 안 된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손으로 초대장을 쓱 쓸었다. 초대장은 이상하게도 겉면과 안면의 질감이 달랐는데, 일부러 뒷면에 종이 한 장을 더 덧댄 것 같았다.
손톱으로 살살 갈라 보니 뒷면의 거친 종이가 쉽게 떨어져 나왔다. 뒷면의 거친 종이에는 날아가는 글씨로 이카루스 백작이라고 적혀 있었다.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한 거람.’
백작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초대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기에 웃으며 뒷면의 종이를 식탁 위에 튕겨 주었다. 종이는 하늘하늘하게 날아가 아무렇게나 떨어졌다.
“기대되네요.”
백작은 종이를 주워 들어 공중에 한 번 털 듯이 흔들고는 재킷 안에 쑤셔 넣었다. 그러곤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는 굵은 목소리로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재단사를 불러서 하녀에게 옷을 사 주었다지. 쯧, 쓸데없이.”
“네. 아무래도 전담 하녀의 옷이니까요.”
턱을 치켜들고 웃었다. 이제 이 정도야 여유롭게 대꾸할 수 있었다.
“하녀의 복장이 초라하면 저도 초라해지지 않겠어요? 제 옷을 맞추는 김에 한 벌 맞춘 것뿐이에요. 백작님의 말대로 다른 사람 보기 부끄럽지 않게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오?”
“그럼요. 여자는 옷과 화장으로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답니다.”
“당신을 보면 그다지 달라지는 게 없는 거 같소만.”
그건 또 맞는 말이라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화려한 옷을 입어도 카를라의 얼굴이 단번에 변하는 일은 없었다.
백작은 내가 입을 다물자 의기양양하게 주변 사용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용인들은 얌전히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그것을 무언의 긍정이라 여겼는지 그는 샐쭉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확실히 카를라의 외모는 이 세계의 미인상과는 거리가 멀었고, 아무리 좋은 말을 붙여도 고아하다고 포장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나를 두둔했다.
“마님께서는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으시니까…….”
백작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는 없었던 터라 우물거리며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고마운 말이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내 옆의 찻잔을 정리하는 척했다. 백작의 시선이 어깨너머의 테오도르에게 향했다가 빠르게 옮겨졌다.
눈치 없는 테오도르에게 물어봤자 그는 ‘그렇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같은 소리나 할 테니. 옳은 선택이었다. 테오도르가 그의 예상보다 시선에 더 예민하다는 것만 뺀다면.
“감히 제가 한 말씀 올리자면, 그렇습니다. 크게 달라지는 거 같지 않습니다.”
테오도르가 대뜸 입을 열자 이카루스 백작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나도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를 바라보고 싶었으나 꿋꿋하게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카를라 님은 금을 차고 비단을 두르지 않아도 아름다우시니까요.”
백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테오도르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마치 사실만을 말하듯.
뒤돌아보지 않아도 테오도르의 시선이 어디에 닿는지 알 수 있었다. 목덜미가 간질간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