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3화
그는 투덜거리며 허락도 없이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하녀를 보내라고 했는데 너무 늦길래 그냥 내가 올라왔소.”
“시킬 일이 있어서요. 어찌 되었든 오셨으니 되었네요.”
“당신은 너무 굼떠.”
“막 식사를 끝낸 참이라. 어수선한 방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요.”
보자마자 속을 긁는 백작에게 뾰족하게 대꾸했다. 그는 깨끗하게 정돈된 테이블을 보곤 혀를 찼다.
“그걸 다 먹은 거요? 당신은 살찌기 쉬운 체질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잖소.”
거짓말이었다. 카를라는 살찌기 쉬운 체질이 아니었다. 먹는 양이 확 늘었는데도 불구하고 살이 크게 붙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위는 얼마나 작은지 맛을 좀 볼까 치면 배가 부르고, 가끔 귀찮아 끼니를 걸러도 무리가 없었다.
대놓고 무안을 주려고 선물한 게 틀림없었다. 그것도 숙취에 좋지 않은 느끼한 음식을 말이다.
“그러잖아도 넉넉하게 올려 보내 주셨기에 하녀들에게 맛이나 보라고 나눠 줬어요.”
“뭐? 내가 신경 써서 보낸 걸 알면서 하녀들에게 먹였단 말이오?”
“왜 그러셔요? 말씀대로 저는 살찌기 쉬운 체질이라서요. 그렇다고 백작님께서 기껏 보내 주신 음식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혼자 다 먹었다고 무안을 주더니, 이제는 나 혼자 먹지 않은 게 문제라고 펄펄 뛰었다. 이상한 걸 타기라도 했나, 생각하며 눈을 깜빡이고만 있자 백작은 과장되게 화를 냈다.
“감히 어느 버릇없는 것이 백작 부인의 음식에 손을 댄단 말이오? 위아래를 똑바로 알게 하려거든 매를 들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지.”
“사용인들에게 베푸는 것도 고용인의 미덕 아니겠어요?”
“말리지 마시오. 당신은 도무지 위엄이라곤 없으니, 쯧쯧.”
그의 말에 넌지시 리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렇다는구나, 리자. 나뭇가지를 주워 오렴.”
이번에는 백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헛기침하며 내 주의를 끌려 애썼다. 리자는 점점 더 파리해졌다.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연인을 바라보며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서, 뭐 하니?”
때릴 생각은 없었으나 기겁한 백작을 보는 건 재미있었다. 자기가 한 말을 주워 담지 못해서 쩔쩔매는 꼴이란.
“어서, 리자. 네가 내 하녀기는 하지만, 백작님의 말에 순종하는 것도 사용인의 의무란다.”
리자는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백작이 격하게 기침을 뱉었다.
“큼, 콜록, 콜록.”
“어머, 백작님. 괜찮으세요?”
“괜찮소. 큼, 쿨럭. 벌은 미뤄 두고, 우리 둘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좋아요.”
그제야 리자의 손에 피가 돌았다. 얼마나 꽉 쥐고 있었는지 손등에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백작의 표정도 한결 나아졌다.
“어제 남작 부인과…….”
“이본 남작이요.”
“어느 쪽이든. 파티가 즐거웠던 모양이야.”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죠.”
살그머니 운을 띄우는 목소리에 욕망이 그득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쥐고 가볍게 토닥였다. 당장이라도 손을 빼내고 싶었으나 그의 악력은 끔찍할 정도로 강했다. 손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끼했다.
“나는 당신이 그런 여자와 친하게 지내는 게 걱정돼.”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훑어보았다. 그의 짙은 눈썹 끝은 처져 있었는데, 어설픈 연기라는 걸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도박에 미쳐 있지. 늘 술에 찌들어서 거짓말만 늘어놓고 말이야.”
입술을 오므려 오, 하고 감탄하는 척을 했다. 백작은 신나게 이본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물론 사교계의 유명인사니 아예 피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당신 남편으로서 말하건대, 평판을 망치는 짓은 하지 말아 줬으면 해.”
“예를 들면요?”
“내 말을 듣기는 했소?”
“그럼요.”
“남작 부인, 아니, 남작이랑 만나지 마.”
그의 가스라이팅은 정말 정석적이고 유치했다. 카를라가 이런 가스라이팅에 오랫동안 고통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내가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이게 전부잖아.’
교묘하지도 않았고, 세련되지도 않았다. 그저 끔찍한 강요나 다름없었다.
“당신은 그렇잖아, 늘 망치고 말지.”
백작은 이죽거리며 카를라를 비하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판단을 못 내리니 친구들이 다 떠난 거요. 여왕? 흥, 당신은 휘둘리기만 할 뿐이야. 제대로 된 친구라면 저런 건방진 호위 대신 더 멀쩡한 기사를 내려 주었을 거요. 암, 그렇고말고.”
아무 말 하지 않자 백작은 신나게 테오도르를 비하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보다 잘생긴 남자에 대한 열등감인 듯했다. 간신히 백작에게 잡힌 손을 빼내 테이블 밑에서 털었다.
“아무튼, 남작과 친하게 지내서 좋을 게 없단 말이오. 이해하겠소?”
그의 말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계속 듣고 있자니 뇌가 오염되는 기분이었다. 귀를 후벼서 방금 들은 이야기를 전부 파내고 싶었다.
“그럼요. 그런데 백작님…….”
리자의 표정을 최대한 흉내 내려고 애쓰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를라의 눈매가 올라간 탓에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백작의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데는 성공했다.
“이미 남작에게 몇 번 졌어요.”
“당신은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요?”
“그러니까요. 저는 정말이지 쓸모가 없는 사람이에요.”
일부러 하는 말인데도 탈력감이 들었다. 늘 이런 기분으로 살았을 카를라를 생각하니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남작에게 뭘 뺏겼소?”
“목걸이를 주기로 약속했어요. 백작님이 사 주신 것 말이에요.”
얼른 거짓말을 꾸며 냈다. 방금 꾸며 낸 것치고는 그럴싸했다. 백작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연기력이라니, 지금 당장 이혼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거 같았다.
“하아…… 애초에 게임이라는 건 말이오…….”
백작은 당신처럼 초보자는 게임을 하면 안 된다, 게임에는 평정심이 필요하다, 뭐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자신이 얼마나 게임에 능숙한지를 어필하며 리자를 힐끔거리는 게 꼴불견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백작님이 사 주신 걸 어떻게 남에게 주겠어요? 되찾아 오고 싶어요.”
백작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얼른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백작님 말씀대로, 저는 제대로 하는 게 없잖아요. 그러니…….”
리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을 모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처럼 손을 모으고 눈을 번득 떴다.
“대신 남작을 이겨 주세요. 안 될까요?”
백작이 또 사기를 치지 않는 이상, 이본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난 그가 어떻게 거절할지 궁금했을 뿐이다.
“물론 나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남작은 쉽게 이길 수 있지만.”
“있지만?”
“아주 아쉽게도, 그녀가 나와의 대결을 원하지 않소.”
비웃듯 올라가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놀란 척 가식적인 목소리를 냈다.
“어머나, 왜지요?”
백작은 헛기침할 뿐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저도 제가 사기를 쳐서 만나 주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긴 낯부끄럽겠지.
나는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나오지 않게 애를 써야 했다. 그는 미간을 모으고는 끙, 소리를 냈다.
“항의하겠어요.”
“누구에게?”
“남작이요. 비겁하잖아요.”
백작은 한참 무어라고 웅얼거리더니, 마침내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은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남작, 아니 남작의 남편과 친하니 괜히 그러는 거요.”
“어머나, 그런 친분이 있으셨나요? 전혀 몰랐어요.”
“큼, 카드를 하다가 친해졌소. 당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어쨌든 그 여자에게서 당신의 목걸이를 가져와 줄 수는 없을 거 같군.”
끼리끼리라더니, 쓰레기 같은 백작이 남작의 남편과 친하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았다.
‘아니, 잠깐만. 백작이 남작의 남편이랑 친하다면…….’
좋은 생각이 났다.
“백작님, 그럼 다른 부탁이 있어요.”
백작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무슨 부탁?”
“저도 카드 게임을 하는 곳에 놀러 가고 싶어요.”
“당신이?”
나는 고개를 까딱이려고 했으나 귀여운 척도 못 해 먹을 짓이었다. 비위가 그리 튼튼하지 못해서인지 행동으로 옮기기가 힘들었다. 나는 다시 표정을 굳히고 원하는 바를 빠르게 늘어놓았다.
“네, 제가요. 연습하면 금방 실력을 쌓을 수 있을 거예요. 백작님께서 허락해 주지 않으시면…… 이번엔 다른 걸 걸고 남작과 게임을 하러 갈 수밖에요.”
리자를 빤히 바라보자 백작이 입술을 짓씹었다. 백작이 뭘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
‘리자가 남작의 전담 하녀가 아니었다는 거? 아니면 추천장이라도 위조했나?’
그깟 게 무슨 문제가 된다고. 내가 관심 있는 건 오로지 백작이 가져간 카를라의 지참금뿐이었다. 이제는 이본 남작이 남편에게 뺏긴 양육권에도 조금 관심이 있고.
“어떻게든 목걸이를 다시 가져오고 싶어요. 마음 같아서는 새로 사 달라고 하고 싶지만…….”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그의 얼굴은 꽤 큰 편에 속했는데, 수컷 고양이였다면 미남이라고 해 줄 법했으나 불행히도 그는 인간이었다.
이 세계에서 미인의 기준은 작은 머리에 눈코입이 알맞게 들어찬 사람을 말했는데, 백작은 어떻게 보아도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런고로 그가 미간을 좁혀 보았자 옹졸하게 모인 눈코입이 더욱 몰리는 효과를 보여 줄 뿐이었다.
“아시잖아요. 물건에 애착이 많은 거.”
“그럼, 알지. 알고 있소.”
백작은 미간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착이 많기는. 카를라가 물건에 애착이 많았다면 제 보석들을 모두 그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거다. 아니, 애착이 강한 걸 알면서도 준답시고 받은 놈이 가장 문제였다.
백작을 노려보자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참가해도 되는지 물어보겠소. 물어보기만 할 거요. 거절하면 나도 어쩔 수 없으니 말이오.”
“그걸로 충분해요.”
백작은 투덜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감사 인사는 하지 않았다. 난 그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고까운 태도에 백작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가려고 했지만, 불현듯 뭔가 생각났다는 듯 뒤돌아 물었다.
“그 여자가…… 뭔가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았소?”
“글쎄요?”
나는 리자에게로 시선을 돌리고 느릿하게 그녀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의미심장한 태도로 보이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본 남작은 금발을 좋아한다더군요.”
그러곤 이어 백작을 바라보고 눈을 접어 웃었다.
“또?”
“더 필요한가요?”
그제야 백작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방을 나갔다. 그러면서도 잊지 않고 리자의 어깨를 슬그머니 쓰다듬는 게 정말 보기 지겨울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