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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2)화 (32/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2화

“뭐 하니? 계속 이야기나 하렴.”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며 손짓하자 리자가 다시 무릎으로 걸어 발치에 앉았다. 강아지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녀의 입에 찢은 빵을 물려 주자 오물거리며 잘도 먹었다.

“이본 남작이 남편에게 저택을 선물받았다고 하더라. 사이가 좋은 모양이지.”

“아니에요. 남작 부인은 남작님이랑 자주 싸웠어요.”

벨이 리자에게 눈치를 주려고 했지만 내가 저지하자 이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잠시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를 노려보다가 수저를 들었다. 수프는 맵지 않았다.

“네가 뭘 알겠니. 아무리 싸웠다고 한들 이본 남작이 그 성격에 지고 가만히 있을 위인이던가.”

“아녜요. 항상 남작 부인께서 울면서 끝났는걸요.”

이건 좀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다. 나는 다시 빵을 찢어 입에 물려 주며 그녀를 부추겼다.

“그래?”

“네! 가끔 남작님이 손을 들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숨도 눈치 보고 쉬고 그랬어요.”

리자는 이본 남작의 남편을 계속 남작이라고 불렀는데, 덕분에 헷갈려 죽을 거 같았다.

“이본 남작이 손을 올렸다는 거니, 아니면 남편이 손을 올렸다는 거니?”

“부군께서요. 정말 정말 무서웠어요. 우리 정원사 두 명을 합친 것보다 큰데 표정도 막 이렇게!”

리자가 이를 드러내고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애는 썼다만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벨은 모자란 것을 보듯 그녀를 보고는 식기를 치웠다.

리자의 이야기는 이본 남작이 말했던 것과 모두 일치했다.

“가엾게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여인의 의무인걸요.”

아콰마린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끔벅였다. 식기를 치우느라 분주하던 손이 뚝 멈추었다. 벨이 듣기에도 어이가 없었는지 그녀는 입만 벙긋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니?”

“사내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게 여인의 미덕이라고 하였어요, 마님.”

해사한 웃음에 말문이 막혔다. 조금의 의심도 없는 얼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제 주인이 맞고 있는 걸 보고서도 ‘어쩔 수 없다’니, 이본 남작에게 저절로 동정이 갔다.

어제 들은 이본 남작의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당장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괜히 마음만 찝찝했다.

‘이본이 알아서 하겠지.’

벨이 속을 가라앉히는 데 좋다는 차를 내왔지만, 너무 쓴 나머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한참 찻잔과 눈싸움을 하고 있자니 자꾸만 이본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맞지 않는다니 다행이에요. 내 오해라서 정말 다행이야.”

술에 취해 울먹이는 목소리가 생생했다. 혓바닥에 쓴맛이 맴돌았다. 차 때문이라고 우기려고 했으나 숙취가 가신 머리로는 합리화도 불가능했다.

‘괜히 신경 쓰이게 그런 말을 해서는!’

머리를 쥐어뜯어도 찝찝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창문을 열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내 일만 해도 벅찬데, 이미 알아 버린 이상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마님, 차를 더 가져올까요?”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머리가 울리는구나.”

괜찮지 않다고 하자마자 벨과 리자가 달라붙어 어깨와 다리를 주물렀다. 그래도 여전히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았다. 머리는 복잡하고, 벨은 연신 신을 찾아 대었다.

‘아, 신이 눈앞에 있으면 한 대 때렸다. 진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그동안 정원사가 정성껏 키운 양귀비들이 보였다. 정원에 군락을 이룬 양귀비는 햇살을 받아 탐스럽게 피어났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모양이 흡족했다. 조금 더 크면 열매를 맺을 거다.

카를라의 일기를 토대로 보았을 때, 의무적인 잠자리까지 앞으로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송충이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이카루스 백작과 입을 맞추느니 저택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게 나았다. 간신히 가라앉은 속이 다시 쓰려 왔다.

혼자 몸서리를 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방 하녀였다. 그녀는 손에 큼직한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위에는 생선 대가리가 꽂힌 파이가 올려져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얼핏 얼굴만 아는 주방 하녀가 발발 떨며 가까이 다가왔다.

“마, 마님, 주, 주인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것을?”

“네, 네.”

그녀는 테이블 위에 파이를 내려놓았는데, 잘 잘린 단면 사이로 흐르는 치즈가 보였다. 생선 특유의 비린내에 속이 요동쳤다.

“몸이 좋지 않으신 거 같아 보신이 될 음식을 만들라고 하셨어요.”

“백작님께서 보냈단 말이지…….”

아무리 보아도 고의적인 시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숙취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치즈와 우유가 듬뿍 든 파이라니. 정말 질 나쁜 장난이었다. 바들바들 떠는 하녀에게 대강 치하의 말을 던지고 손을 내저었다.

“수고했어. 가서 일 보렴.”

“아, 그리고…….”

“그리고?”

“주인님께서, 저,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으세요.”

하녀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어 갔다.

“그,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리자를 보내면 말을 전달하겠다고 하셨어요.”

백작은 한 번씩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 놓곤 했다. 중요한 이야기 같은 건 없을 거다. 리자가 내게 무슨 말을 캐냈는지 궁금해서 부르는 거겠지.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리자가 들은 말은 전부 쓸모없는 것뿐이다.

“그래?”

“네, 네.”

뺨 옆으로 빼낸 애교머리가 흔들렸다. 고개를 힘차게 위아래로 흔드는 하녀는 퍽 귀여웠다. 그래도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중 제일 예쁜 건 리자겠지만.

가만히 그녀를 보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파이도 해치우고, 리자도 백작에게 보내지 않을 방법이었다. 나는 턱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파이 좀 먹으련?”

“네, 네?”

“한 조각 먹고 가.”

“그렇지만, 가, 감히 그럴 수는…….”

감히 그럴 수는 없었으나 백작 부인의 명령을 어길 배짱도 없는 하녀는 우물쭈물하기만 했다.

“벨, 주방에서 일하는 아이들이 몇이지?”

“셋이에요, 마님.”

“그럼 세 조각 가져가.”

더 말하기 싫다는 투로 손을 내밀어 휘저었다. 이 정도 하면 내가 생선을 싫어하는 걸 알음알음 눈치채겠지. 앞치마에 파이를 담고 인사하는 하녀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다가 거두었다.

“테오도르 경께 파이 좋아하시는지 여쭈어보렴.”

“네.”

벨은 아직 허둥거리는 주방 하녀를 데리고 문을 열었다. 테오도르가 그들에게 고개를 까딱이는 게 보였다. 벨이 그에게 무어라 말하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렸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테오도르가 목덜미를 갉작이자, 벨이 그의 팔뚝을 가볍게 쥐고 방으로 끌어들였다.

“경, 싫어하지 않는다면 한 조각 드셔요. 막 구운 거예요.”

테오도르는 망설였다. 시선이 파이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는 싫어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주방 하녀가 가지고 왔지만 지금은 먹기 힘들어서 그래요. 그렇다고 돌려보내긴 너무 아깝잖아요.”

“아직 속이 안 좋으십니까?”

“좋아졌지만, 파이는 너무 과해서요. 한 조각 들어 주신다면 기쁠 거예요.”

그제야 테오도르는 파이를 받아 들었다. 분명 큼직한 파이였는데도 그의 손에 들리니 몇 입 되지도 않아 보였다. 테오도르가 호쾌하게 파이를 베어 물었다.

“맛있습니다.”

그의 눈이 갸름하게 변했다. 순한 눈매가 휘어졌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었다. 부스러기 하나 흘리지 않고 야무지게 먹는 모습이 퍽 그럴싸했다.

리자가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남들은 다 먹였는데 전담 하녀들 입만 빈 것도 우스운 일이다.

“벨, 리자, 남은 건 마음대로 처리해.”

“감사합니다!”

리자가 파이를 얼른 집어 우물거리자, 벨도 눈치를 보며 남은 조각을 집었다. 한동안 셋이 파이를 먹는 소리만 났다. 실시간 ASMR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가라앉고, 잡생각이 사라졌다.

‘정기적으로 간식을 먹일까.’

리자의 뺨이 볼록해졌다가 점점 줄어드는 게 보였다. 벨 또한 먹는 속도가 느려서 그렇지 야무지게 파이를 해치우고 있었다. 잘 먹는 모습들이 보기 좋았다. 테오도르는 어느새 자신의 몫을 다 먹고는 손가락을 핥고 있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나왔다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마님, 괜찮으세요?”

“얼굴이 빨갛게 변했어요!”

안 괜찮은 건 테오도르의 얼굴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려다보는 얼굴도 참 잘생겼다. 멍하니 그 얼굴을 보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를라, 들어가도 되겠소?”

백작이었다.

리자가 얼른 손에 든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었다. 벨도 허둥지둥 입가를 훑었다. 테오도르만이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카를라!”

백작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고함지르는 소리도 수준급이었다. 옆에 있어 봤자 못 볼 꼴만 볼 테니 벨도 내보내려고 했다.

“벨, 테이블 좀 치우렴. 가는 길에 주방장에게 다음부턴 뭐든 올릴 땐 허락을 받고 올리라고 전하고.”

“네, 마님.”

마지막으로 테오도르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테오도르 경.”

그는 이름을 불리자 일어나기는 했으나 밖으로 나가려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무슨 좋은 꼴을 보려고 그러냐는 핀잔이 입에서 맴돌았다가 목구멍으로 다시 넘어갔다. 손을 내려다보았지만 떨리고 있지는 않았다.

“카를라! 남편을 계속 세워 둘 거요?”

문을 열어 줄 때까지 저럴 거 같아 리자에게 손짓했다.

“열어 드려.”

그녀가 문을 열자 백작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헛기침으로 리자와 무슨 암호를 주고받았는데,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그대로 문을 닫으라고 명령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로 백작을 올려다보았다. 백작의 머리는 한 올도 남기지 않고 한껏 뒤로 넘긴 모양이었고, 돼지기름이라도 발랐는지 번들번들했다. 이마 선이 뒤로 밀린 걸 보아 조만간 대머리가 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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