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1화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내가 먹은 게 별로 없다는 거였다. 그 와중에 리자가 뒤로 넘어간 건 다행 중 불행이라 하겠다.
“리자! 물을 가져와!”
벨이 바들바들 떠는 리자를 억지로 일으켜 심부름을 시키고 나를 부축했다. 테오도르 또한 내 등을 몇 번이나 쓸어내리며 괜찮냐는 말을 반복했다. 집사만이 백작의 옷을 손수건으로 열심히 닦아 내었다.
“이, 이, 익…….”
백작은 욕도 제대로 뱉지 못했다. 그는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씩씩거리기만 했다. 한결 속이 편해진 나에겐 그저 재밌는 구경거리였다.
“카를라 님, 아까처럼 모셔다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아요.”
“어딜 가는 거요! 이야기하는 중이잖소!”
백작이 소리쳤지만, 테오도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팔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그리고 몸이 또다시 번쩍 들렸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경박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저, 건방진…….”
백작의 목소리는 벨이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묻혔다. 아무래도 리자한테 호들갑이 옮은 게 분명했다. 그녀는 내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굴었다. 입을 헹구고 물을 마실 동안 벨은 내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마님, 팔이 저리지 않으세요?”
“괜찮아.”
“기사님, 그렇게 보시면 마님께서 옷을 갈아입으실 수가 없어요.”
벨은 나를 지켜보던 테오도르를 쫓아냈다. 그의 목덜미는 뒤에서도 확실히 티가 날 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방문이 닫히고 나서야 벨은 내 옷을 풀어헤쳤다. 갈비뼈가 숨 가쁘게 오르내렸다. 이 비루한 몸뚱이는 고작 속을 게워 냈을 뿐인데 죽을 것처럼 헐떡였다. 아직도 숨에서 꽃 냄새가 나는 듯했다.
가벼운 옷을 갈아입고 물을 한 양동이쯤 마시고 나서야 어지럼증이 가라앉는 거 같았다.
“마님, 물을 더 가져올까요?”
“됐어. 이제 충분해.”
“의원을 부를까요?”
“의원은 무슨. 그냥 속이 안 좋았던 것뿐이야. 이제 잘 테니, 불을 끄고 나가렴.”
벨은 내가 눈을 감고서 자는 척을 하자 조심스럽게 방을 나섰다. 속이 비어서 그런지 잠이 금방 오지는 않았다. 문밖에는 테오도르가 있겠지. 슬며시 침대에서 내려와 문에 몸을 기대었다.
“테오도르 경, 거기 있어요?”
“카를라 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아니에요. 그냥 잠이 안 와서요.”
문에 기대 스르르 주저앉았다. 밤이 깊었지만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 너머로 테오도르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경.”
“네.”
“테오도르 경.”
“네.”
몇 번을 불러도 화를 내지 않는 게 좋았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게 웃자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십니까?”
“네. 오늘 경에게 괜찮냐는 말을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네요.”
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볼 수 없으니 테오도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만 해야 했다.
부끄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이고 있을까, 아니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귀여울 게 분명했다.
그에게 들리지 않게 숨을 죽여 웃었다. 웃음이 그친 후에야 테오도르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주제넘었습니다.”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걱정해 줘서 고맙다고요.”
그는 다시 말이 없었다. 문에 묵직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문에 등을 기댄 것이다. 두꺼운 문 사이로 그의 뜨거운 체온이 전해져 오는 거 같았다.
“…….”
“…….”
우리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창밖의 별은 아름답게 반짝였고, 그의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탄탄한 팔과 넓은 가슴을 어렴풋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붉어져서 식지 않던 목덜미, 애써 먼 곳을 보던 시선……. 그러나 그보다는 그의 성실한 과묵함이 고마웠다.
마침내 다리가 저리고, 이불로 데워졌던 체온이 식고 나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이제 정말 잘 거예요. 테오도르 경은…….”
“조금 더 지키다가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요, 잘 자요.”
“위대한 분께서 카를라 님을 보호하시길.”
술을 마셔서 그런지,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손가락으로 살짝 긁어도 간지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 * *
숙취 때문인지 이른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자리끼를 마셔도 여전히 속이 쓰렸다. 창밖은 아직 어둑했고, 이따금 새 소리만 들려왔다. 이불은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하고 따뜻했다.
게으름을 부리기엔 최적의 조건이었다. 천천히 기억의 호수에 손을 넣어, 사금을 찾듯 어젯밤의 대화를 되돌아보았다.
“왜 저를 도와주려고 하세요?”
“매번 울 거 같았던 표정이, 당신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친분이 없었던 이본 남작까지 눈치채고 있었다니, 카를라는 얼마나 불행했던 걸까. 나는 그녀의 불행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남의 일은 재미있고, 불행은 더더욱 재미있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도무지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저택의 고요함은 무거웠고, 카를라의 불행 또한 꼭 이만큼 무거웠을 거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 소리만 들렸다.
‘지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적막을 깬 것은 발걸음 소리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을 두드리는 구두 소리.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서는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소리의 주인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하녀도 아니고, 집사도 아니고, 백작은 더더욱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오는구나.’
기분이 이상했다. 잠들기 전처럼 가슴팍이 간지러웠다. 그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가만히 숨을 참으면 문 너머에서 테오도르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밤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이본 남작은 괜찮을까.’
그녀의 얼룩진 화장이 떠올랐다. 소매 아래로 보인 선명한 자국도, 나를 도와주고 싶다고 하면서도 힘들어 보였던 얼굴도. 방금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했다.
‘그만 생각하자. 내 일만으로도 골치 아파.’
고개를 젓고는 이내 이불 속에서 빠져나왔다. 여전히 속이 쓰렸고, 불쾌한 꽃 냄새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몸에 스며들었다.
“추워…….”
슬리퍼를 기워 신고 종을 울리려다가, 이내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면 테오도르의 등이 보일 거다. 문에 몸을 기대려는 순간, 밖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기사님, 일찍 일어나셨네요. 노고에 감사드려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극히 평화로웠고, 주고받는 이야기는 다정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하려던 건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정신 차리자.’
뺨을 짝, 쳐올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숙취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침대 옆의 설렁줄을 당겼다.
다시 침대에 누워 있으니, 리자와 벨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카를라의 아침이었다.
* * *
“마님, 식사는 방에서 하시겠어요?”
“그래. 매콤한 게 먹고 싶다고도 전해 줘.”
“주방장에게 물어볼게요.”
얼큰한 게 먹고 싶었다. 위가 아플 정도로 매운 컵라면과 해장국이 절실했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런 사치를 바랄 수는 없었다. 칼칼한 국물 대신 후추나 좀 친 수프가 올라올 게 뻔했다.
무기력하게 화장대 앞에 늘어져 있자 리자가 다가와 물었다.
“마님, 많이 아프시면 의원을 부를까요?”
“벨이 유난을 떠는 거야. 이런 걸 가지고 의사는 무슨.”
“안색이 창백하신걸요.”
카를라의 얼굴은 원래 창백했고, 그나마 요즘 들어 혈색이 조금 도는 판국이었다. 그러니 이상할 건 없었다. 숙취로 핼쑥해지기는 했지만, 예전에 비하면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처음 거울을 보았을 때는 걸어 다니는 시체인 줄 알았으니까.
“남작님께 안 좋은 말을 들으셨어요?”
“좋은 말이 없긴 했지.”
리자는 무릎으로 바닥을 기어 내 발치까지 다가왔다.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은 오늘따라 더 빛을 발하는 듯했다. 평소라면 쓸모없는 이야기를 적당히 무시했겠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그녀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남작 부인께서는 기분파세요. 그러니까, 마님, 그분의 말씀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되세요.”
“어련히 알아서 할까.”
리자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녀의 단점이자 최고의 단점은 표정에서 다 티가 난다는 거다. 얼굴에 떡하니 ‘뭔가 숨기고 있어요.’라고 적힌 종이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꼴이었다.
‘뭐가 듣고 싶어서 이러지?’
리자는 눈을 데굴거리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어, 그러니까, 평소에는 술을 드시지 않으셨는데 과음하신 걸 보니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으셨나 해서요…….”
머뭇거리면서 말하는 걸 보니 백작이 나를 캐 보라고 시킨 거 같았다.
“저택이 커서 구경하는 맛은 있더구나.”
“그렇죠? 청소하기도 너무 힘들었어요!”
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를 휘두르려고 한다면, 역으로 정보를 빼내 주는 게 도리였다. 나는 그녀의 머릿수건 아래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을 했길래 그렇게 힘들었니?”
리자는 유도에 정말 쉽게 걸려들었다.
“아침에는 물을 긷고요, 저택에는 큰 우물이 있어서 종일 쓸 물을 거기서 퍼 왔어요.”
“이런, 저택이 엄청나게 크던데 고생했겠구나.”
그녀의 이야기는 두서없었다. 하루 일과를 설명하다가 아이 양말을 꿰매는 방법을 늘어놓았다. 부르는 대로 이리저리 일했던 모양이었다.
리자는 주방과 세탁방을 오가며 심부름을 하던 나날을 즐겁게 재잘거렸다. 내가 간간이 호응하자, 그녀는 신나서 더 말을 늘어놓았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신변잡기였으나, 한 가지는 명확했다. 리자가 한 일들은 전담 하녀의 몫이 아니었다. 남작의 말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저택이 크면 할 일이 많더라고요. 손님이 많이 오니 하인만 서른이 넘었죠.”
“그래, 테이블을 옮기는 하인들이 참 많더라.”
“그걸 매번 닦아야 해서 손이 매일매일 부르텄어요.”
벨의 손은 항상 적정한 상태를 유지했다. 일이 너무 많아 그녀의 손까지 빌려야 할 게 아니라면 힘든 일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전담 하녀는 귀부인의 눈이 닿는 곳에서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하는 손발이나 다름없었다. 전담 하녀의 손이 부르튼 것은 주인의 손이 부르튼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님, 식사는 어디에 놓을까요?”
“테이블에서 먹을게.”
벨이 들어오자 리자가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리자는 간혹 나보다 벨의 눈치를 더 보았는데, 아무래도 백작에게 홀대받는 부인보다는 직속 상사인 벨이 더 무섭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