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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0)화 (30/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30화

길고 긴 침묵이 우리 사이에 내려앉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화려한 장신구를 찬 건, 멍을 숨기기 위해서인가요?”

그녀를 달래야 하는데 입에서는 심문 같은 말만 나왔다.

“화려한 건 원래 좋아했어요.”

이본이 소매를 매만지다가 이내 내 손등을 쥐고 토닥였다. 제 몸이나 걱정할 것이지.

“뭘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백작은 저를 때리지 않고…….”

사람 속을 긁고 하녀와 바람을 피우지. 만일 손을 올리거나 그랬더라면 이혼을 요구하든, 어디로 도망가든 했을 거다. 카를라와 백작을 죽어라 욕하면서.

백작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애썼으나, 이본에게는 그를 감싸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이었다.

“내 남편도 원래 그렇게 폭력적인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녀는 애달프게 토로했다. 남의 아픈 과거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지만, 이렇게까지 엮인 이상 이 정도의 하소연은 들어 줘야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으로 크게 잃고 나서부터 손을 올리게 되었죠. 난 도박을 잘하는, 아니 엄청나게 잘하는 편이거든요. 그랬더니 그 돼지 자식은 내가 자신의 행운을 빼앗아 간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본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그녀의 손을 잡고 막아 봐도 자꾸만 잔에 술을 채웠다. 꽃 냄새에 질식할 거 같았다.

“하지만 괜찮아요. 이제 남편의 재산은 전부 내 것이 됐으니까. 작위도, 집도 도박으로 땄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남편이 날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작위까지 양도했다고 생각해요. 우습죠? 진실을 아는 건 폐하뿐이에요.”

남작은 그들 때문에 부부싸움을 한 뒤, 화해의 의미로 도박에서 져 주고 선물을 건네는 게 유행이 되었다며 소곤거렸다.

그러곤 자신과 남편 사이에 있었던, 재산과 작위를 건 치열한 승부를 실감 나게 말해 주었다. 입회인이 왕이었기에 무를 수 없는 승부였다며 깔깔 웃기까지 했다.

“그것들을 얻자마자 내가 한 일이 뭔지 알아요? 남편을 쫓아냈어요. 다들 내가 미쳤다고 했죠. 돈에 눈이 멀었다고 말이에요. 하하, 맞는 것보다 욕을 먹는 게 더 편하더군요. 이제 양육권만 빼앗으면 되는데…….”

“혹시 제게 한 ‘부탁’이…….”

“맞아요. 남편은 분명 카지노에 갈 테니까.”

이본은 손을 떨고 있었다. 흔들리는 잔에서 넘친 술이 그녀의 손을 적셨다. 분노일까, 아니면 무서움일까.

“그냥 모른 척하시지, 왜 저를 도와주려고 하세요?”

“……위대한 분이시여.”

이본은 앓듯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남편이 손을 올릴 때마다 생각했어요. 누가 날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그래서…… 매번 울 거 같았던 표정이, 당신이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숨이 막혔다. 이본은 울고 있었다. 화장이 눈물로 얼룩졌다. 카를라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했다.

자존심이 상했을까, 아니면 아무 말 없이 위로해 주었을까. 지금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백작은 위대한 분을 모욕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거든요. 보통 그런 남자들이 부인에게 손을 올리지. 그리고 당신은 파티에도 잘 오지 않으니 손 내밀어 주는 사람이 없을 거 같았어요.”

“그건 맞아요. 고마워요.”

이본의 손을 마주 잡고 토닥였다. 그녀는 이제 울음을 그치고 나를 보고 있었다.

“맞지 않는다니 다행이에요. 내 오해라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손등으로 대충 얼굴의 물기를 훔쳐 냈는데, 화장이 엉망으로 뭉개져도 화려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남의 집 사정을 너무 깊게 들여다보는 건 형벌과도 같았다. 이본은 휘청거리다가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등 뒤에 우직하게 서 있던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하녀를 불러 줄래요? 남작님의 시중을 들 사람이 필요해요.”

“네.”

테오도르는 두말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이 틈을 타 이본에게 속삭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이본은 혀가 꼬이기는 했지만,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할 정신은 남아 있는 거 같았다.

“백작, 그러니까 제 남편이 남작님께 뺏은 물건이 뭔지 말해 줄 수 있나요?”

이본은 그런 것쯤은 기억을 끄집어 낼 필요도 없다는 듯 즉답했다.

“하녀를 하나 데려갔죠.”

“하녀를요.”

역시 리자는 남작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였다. 남의 전담 하녀를 빼앗아 오다니, 어지간히 사랑에 눈이 멀었군. 속으로 백작을 비웃었다.

“누군지 알겠어요. 전담 하녀를 빼앗기다니 불편한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군요.”

“무슨 말이에요?”

이본이 다시 테이블 위로 늘어지며 대꾸했다.

“내가 빼앗긴 하녀는 잡역부였어요.”

* * *

테오도르는 빠르게 하녀를 데려왔다. 하녀에게는 기분이 좋아 술을 과하게 마신 모양이라 둘러대고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충격적인 이야기 때문인지 아니면 술 때문인지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휘청거렸다. 머릿속으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계산했다.

‘백작은 일 년 전에 리자를 이 저택에서 빼앗아 왔고, 남작이 남편의 작위를 뺏은 건 그 뒤야. 멍이 다 사라지지 않았으니, 헤어진 건 얼마 되지 않았어.’

그러니 남작은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남편에게 맞아 왔다는 말이 되었다. 끔찍했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가정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아!”

발을 잘못 디뎌 크게 휘청거리자, 테오도르가 허리를 감싸 안아 쓰러지지 않게 잡아 주었다.

“괜찮으십니까?”

“괘, 괜찮아요.”

똑바로 중심을 잡고 일어섰는데도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팔뚝은 보는 것보다 두꺼웠고, 바짝 힘이 들어가 있어 단단했다.

‘보기보다 몸이 좋구나.’

술에 취한 탓인지 음흉한 생각이 마구 떠올랐다.

‘아니지, 이런 나쁜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퍼뜩 고개를 젓자 몸이 단번에 붕 떠올랐다.

“마법……?”

알고 보면 내가 마법에 재능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마자 위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카를라 님, 실례하겠습니다.”

바람과 달리, 테오도르가 몸을 들어 올린 거였다. 목덜미를 붉게 물들인 그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어 올린 채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덕분에 그의 얼굴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등 뒤가 아니라 옆에 서 있었다면 정신을 빼놓고 하염없이 구경했을 만큼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진짜 잘생겼다.’

테오도르의 외모는 방금 했던 심각한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다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그의 속눈썹이 얼마나 긴지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는데, 성냥을 위에 올려도 떨어지지 않을 거 같았다.

‘나중에 한번 올려봐 달라고 해야지.’

멍청히 그의 얼굴을 구경하고 있는데, 테오도르가 나를 불렀다.

“카를라 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네?”

뭐라고 말을 했던 거 같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반박자 늦은 대답에도 그는 성실하게 자신의 말을 되풀이해 주었다.

“마차에 타실 수 있으십니까?”

“아마도요?”

고개를 기울인 거 같은데 목이 멋대로 흔들렸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많이 취하셨습니다.”

“얼마나 마셨다고요.”

“포도주 한 잔, 위스키 한 잔을 드셨습니다.”

“많이 안 마셨네요.”

마차가 오는 게 보였다. 테오도르는 여전히 나를 끌어안고 있었고, 내려 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의 품은 따뜻해서 나도 일부러 내려 달라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마신 술은 꽃 냄새가 날 테니 조금 안겨 있다고 해서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벨은요?”

“마차를 불러 달라고 했으니 먼저 타고 있을 겁니다.”

“그럼 내려 주세요. 혼자 탈 수 있어요.”

그러나 테오도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차가 서고, 마부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도 그는 나를 안고 있었다.

“마님! 괜찮으세요?”

벨이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늘 침착하던 벨의 놀란 표정이 너무나 귀여웠다.

“나 안 다쳤어. 너무 놀라지 않아도 된단다.”

“세상에, 취하셨군요.”

아무래도 리자와 함께 다니더니 호들갑만 늘었다.

“아냐, 난 멀쩡해. 하나도 안 취했어.”

“얼굴이 이렇게 붉으신걸요.”

벨이 우기기 시작했다. 하녀들이 쉬는 곳에서 뭔가 잘못 먹은 모양이었다. 나는 관대하게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테오도르의 어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테오도르는 나를 안은 그대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마부의 부축을 받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기다란 마차 의자에 나를 앉힐 때까지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대단한데.’

손뼉을 치고 있는데 테오도르가 마차 안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불가피한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몸에 손을 댄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일어나요.”

테오도르는 한참을 일어나지 않았다.

“괜찮다니까요. 재밌었어요.”

겨우 그가 일어나 자리를 잡자 벨이 쪼르르 마차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내 등을 쓸어내리며 묵직한 장신구를 풀어 주었다.

마차는 천천히 길을 달렸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일그러져 있었다. 밤이라 그런지, 아니면 그들 말대로 정말 내가 취한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머리를 똑바로 가누려고 힘을 줘도 자꾸만 흔들렸다.

‘속이 안 좋아.’

목구멍에서 자꾸 꽃 냄새가 올라왔다. 매스꺼웠다. 토할 거 같아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벨이 등을 두드려 주지 않았더라면 벌써 마차 바닥에 더러운 꼴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마님, 금방 도착할 거예요. 조금만 참으세요.”

벨이 창밖을 보라며 달래 주었다. 그러나 창밖의 풍경은 일그러지고 섞여 지옥 길 같았다.

한참을 지나서야 마차가 멈춰 섰고, 끔찍했던 풍경도 제 모습을 찾았다. 테오도르는 누구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려 내가 내려가는 걸 도와주었다.

“괜찮으십니까, 카를라 님.”

그에게 괜찮냐는 말을 몇 번이나 듣는 건지. 괜히 웃음이 나왔다.

“하하, 괜찮아요. 멀쩡하다고요…….”

바닥이 울퉁불퉁해서 몇 번 넘어질 뻔했지만 그럴 때마다 테오도르는 내 허리며 팔뚝을 쥐고 조심스럽게 부축해 주었다.

집사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옆에는 리자도 함께였다. 리자는 다소 불안한 표정이었다.

“마님,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백작이 날 기다릴 이유가 뭐가 있을지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집에 돌아온 순간부터 물을 머금은 솜 덩어리처럼 몸이 축축 늘어졌다. 당장 침대 위에 늘어져 시원한 물이나 마시고 싶었다.

나중에 이야기하겠다고 전하라며 리자를 돌려보내려고 했다.

“늦었군.”

그러나 백작이 더 빨랐다. 계단을 내려온 그는 짧은 다리를 바삐 놀려 내 앞으로 다가왔는데, 못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엉망으로 보였다.

뭉개진 감자, 터진 떡, 바닥에 떨어진 찰흙 덩어리. 그 어떤 말로도 그를 표현하기엔 부족할 지경이었다. 진정된 줄 알았던 속이 다시 울렁거렸다.

“남작 부인 같은 방탕한 여자와 깊게 교제해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소.”

그는 나를 보자마자 속을 긁기 시작했다.

“이본 남작은 엄연히 작위를 가지고 있어요.”

“하, 카드 게임으로 딴 작위 말이오?”

백작은 내게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말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은 이본 남작의 품행이 얼마나 저급한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저녁으로 냄새가 강한 음식을 먹었는지 입을 열 때마다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찔렀다. 속이 뒤집혔다.

“알겠소? 모름지기 여자는 다소곳하게…….”

“우욱…….”

그러니 토한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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