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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9)화 (29/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9화

이카루스 백작에 관한 이야기라, 흥미가 생길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들을 이야기는 없는 거 같군요.”

그 못생긴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귀가 썩거나, 내 기분이 나빠지거나, 최악의 경우엔 토할 정도로 속이 안 좋아질 게 분명했다.

상상만 했는데도 속이 갑갑해졌다. 지나가는 하인을 불러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세상에,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어요?”

노골적으로 눈을 찌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롱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면 눈치가 없는 건가?”

“어느 쪽이라도 남작님과 대화를 더 이어 갈 이유는 없군요.”

“우린 친구잖아요.”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친구라니, 그녀 또한 왕의 시녀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카를라의 일기장에는 남작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심하게 싸웠거나, 아니라면 싸울 만큼의 친분은 아니었거나.

나는 뻔뻔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가요?”

남작도 뻔뻔하게 말했다.

“네. 우리가요.”

속이 타 와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생각보다 맛이 강했다. 인상을 찌푸리자 남작이 빠르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저도 폐하의 친구, 당신도 폐하의 친구. 친구의 친구는 친구죠.”

때리고 싶다. 남작은 얄밉게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까딱였다.

“그렇죠? 우리 친구죠?”

다른 사람이 했으면 퍽 귀엽다고 평가했을 행동이었으나, 남작이 하니 놀리려는 의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아니요.”

“정말 유감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그런 점이 매력적이에요.”

남작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차라리 리자를 상대하고 싶었다. 멍청해서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기는 하지만, 남작처럼 속을 긁는 것보다는 나았다. 속이 울렁였다.

‘진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와인을 홀짝이려고 들었으나 잔은 이미 비어 있었다. 그것을 본 남작이 손을 들어 하인에게 잔을 채우라고 명령했다.

“좀 더 들어요. 와인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아, 그래, 위스키는 좋아해요?”

“그럭저럭 마셔요.”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오늘 남작의 앞에서 한 거짓말만 두 번째였다. 술을 못 한다고 하면 얼마나 무시할지 몰라 허세를 부렸는데, 이건 이상하게도 철석같이 믿었다.

“글렌다는 어때요?”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그게 뭐더라. 머리를 굴리다가 리자가 훔쳐 온 술병에 적힌 이름이라는 걸 떠올렸다.

“나쁘지 않죠.”

“그럼 같이 가서 마셔요. 내 방에 있어요.”

돌고 돌아 그녀는 다시 내게 독대를 청했다. 지긋지긋한 이카루스.

“그렇게 내 남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다른 이야기도 하고.”

남작이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기울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활짝 웃으니 꽤 어리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남작님을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원래 내 파티에 오는 사람들은 도박꾼 아니면 내기 광이에요. 내가 눈앞에서 와인을 뒤집어써도 신경 안 쓸 인간들뿐이지.”

그녀의 손님들을 들먹여 보았지만, 남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알고 온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아무튼, 다들 카드 게임이나 하러 온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도박꾼과 내기광이라면 더 신경 쓰셔야 하지 않나요?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큰돈이 오가면 중재할 사람이 있나요?”

나는 그녀를 따라 자리를 옮기며 물었다. 남작은 홀을 벗어나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는데, 따라가는 것도 벅찰 만큼 빨랐다. 남작은 지나가는 하녀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도 내게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순진하긴. 여기서 돈을 꺼내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하인들이 이긴 사람을 기록해 두곤 나중에 내가 보내는 선물인 척 선물을 보내는 거예요. 물론 값은 진 사람이 부담하고.”

남작은 이 층까지 이어지는 계단을 걸으면서도 빠르게 말을 쏟아 냈는데, 숨 한번 고르지 않았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폐활량이었다.

“직접 돈이 오가지 않으니 도박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 폐하께서도 눈감아 주고 계시고.”

“귀찮은 짓을 하시는군요.”

“나도 얻는 게 있으니까.”

남작은 화려한 방문 앞에 멈추어 섰다. 문은 노란빛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고, 진한 금색 새가 그려져 있었다. 명패가 걸려 있지는 않았으나 단번에 남작의 방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본 남작은 문을 활짝 열고는 과장되게 팔을 휘둘러 인사했다.

“어서 들어와요! 당신이 내 방에 들어온 첫 여성 손님이에요!”

그녀는 조금 들떠 있었는데, 그 때문에 혹시 함정이라도 설치되어 있나 위를 올려다봐야 했다.

방은 홀과 같이 화려했다. 다른 점을 꼽으라면 크기 하나뿐이었는데, 좁은 건 아니었지만 과연 여기서 잠을 잘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화려한 물건으로 꽉 차 있었다.

그녀는 제 화장대와 테이블을 보여 주었다. 화장대는 밝은 갈색의 원목으로 되어 있었다. 아마 이 방에서 유일하게 ‘노란색이 아닌 것’이 아닐까.

그래도 거울 가장자리의 금속 장식이나 손잡이는 모두 금빛으로 되어 있어 얼핏 보기에는 화장대도 어두운 노란색으로 보였다. 화장대를 자세히 보고 있자 남작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예쁘죠? 내기로 딴 거예요.”

무슨 후작 부인의 방에 있길래 얼른 후작에게 내기를 걸었다는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리며 그녀의 방을 훑어보았다.

어쩐지 가구에는 통일성이 없었다. 어떤 물건은 꽤 오래 쓴 것처럼 자잘한 흠집이 있는가 하면 어떤 가구는 새것처럼 반질반질했다.

‘설마 방 안의 모든 게 다 내기로 얻은 건가?’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녀는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이본 남작은 화장대 서랍 가장 안쪽에 팔을 밀어 넣었다.

그녀가 꺼낸 건 묵직한 유리병이었다. 병 주둥이는 좁고 아래는 넓은 형태로, 분명 본 적이 있었다.

<글렌다 21년 숙성>

예쁜 글자 너머로 짙은 호박색 내용물이 출렁거리는 게 보였다.

“혹시 그것도 게임으로 땄어요?”

“선물받았어요. 아무리 나라도 이만 한 술을 걸 만큼 배짱이 좋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화장대 밑에다가 꼭꼭 숨겨 놨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팔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의자와 테이블은 색이 다 달랐는데, 그 점이 내 추측에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이본 남작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잔에 아무렇게나 술을 따라 주었다. 얼음도 다과도 없는 이상한 대접이었다.

“자, 마셔요.”

그럭저럭 마실 줄 안다고 해 놓고서 빼는 것도 이상했다. 잔을 받아 눈을 감고 꼴딱 한 모금을 마셨다. 액체가 부드럽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입안이 꽃 냄새로 가득 찼다. 숨을 내쉬니 과일 냄새가 나는 거 같기도 했다.

“마음에 들어요?”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수가 높은지 식도가 홧홧했다.

“더 줄까요?”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부르신 거라면, 맨정신이 좋을 거 같아요.”

“난 맨정신으론 안 돼요.”

남작은 자신의 잔에도 술을 붓고는 꼴깍꼴깍 마시기 시작했다. 꽃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잎담배 줄까요?”

“아뇨.”

“이런, 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담배를 피운다고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었다. 사람의 정신을 건드는 건 마약뿐이다.

“당신 남편이 준 거예요.”

“네?”

“이 술이요. 누가 준 건지 궁금할까 봐. 이카루스 백작이 줬어요, 당신 남편.”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깜빡이고 있자 남작이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와인도 저렇게 마시더니. 마시는 방법만 봐도 참 대범한 여자였다.

“오해하지 말아요. 그와는 그냥 카드놀이나 좀 하던 사이였으니까. 물론, 그 비겁자가 사기를 치기 전까지만 말이에요. 지금은 연락도 않죠.”

남작은 술을 마시면 말이 더욱 많아지는 거 같았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횡설수설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딴 사기를 쳐 놓고 다시 초대를 바라다니 염치도 없지. 값비싼 선물을 보내면 내가 눈감아줄 줄 알고. 그런데 이상도 하지. 백작이 가난뱅이라는 건 뻔한 사실인데, 어떻게 이런 고급품을 보냈을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탔다. 나는 그녀가 준 술잔을 자꾸만 매만졌다. 잔의 무늬가 손가락 끝에서 헛돌았다.

남작이 다시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나 마시지는 않았다.

“딸의 것은 딸의 몫이고, 아들의 몫은 아들의 것이 당연하니 다들 생각하지 못했던 거야. 그 가난뱅이가 부인의 재산을 빼앗은 건 정말 아무도 몰랐을걸.”

“…….”

나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이 세계는 지참금을 가져온 사람의 재산으로 인정하는 모양이다. 그걸 빼앗아 가진다는 걸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보편화된 상식인 듯했다. 그러나 남작의 말은 영 두서가 없어 이해하기 힘들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술을 마저 들이켠 남작은 마침내 길고 긴 대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무서웠나요?”

“네?”

“……무서웠을 거 알아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들어 올리고, 가끔은 꽃다발을 가져다줬을 거예요. 그가 잘해 줄 때는 역시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겠죠. 하지만, 하지만 말이에요, 그런 남자는 고칠 수 없어요.”

“남작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도통, 도통 모르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아직 아이가 없잖아. 호위 기사가 지켜 주는 건 잠시뿐이에요. 잠자리에는 따라올 수 없으니…… 언젠가 남이 물으면 ‘부부간의 일’이라고 지껄이겠죠. 부모님은 물론이고…….”

“…….”

“친구한테도, 아무에게도 말 못 했을 거 알아요. 같은 처지를 공유한 친구가 한 명 정도는 있으면 마음이 편할 거예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내 저택에서 머물러도 괜찮아요.”

나는 그녀의 묘사가 점점 더 사실적으로 되어 감을 알아차렸다. 꼭 경험한 것처럼. 그래서 그녀의 부드러운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되물었다.

“남작님, 그건 어느 분의 이야기인가요?”

“…….”

내 말과 동시에 이본이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얇은 드레스 소매를 잡아 걷었다.

이본은 반항하려 했으나 술에 취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노란 소매 아래 감춰진 팔뚝은 멍으로 얼룩덜룩했다. 그건 이제 막 사라지려는 듯 노란빛을 띠고 있었다.

충격적인 광경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작은 다시 소매를 내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난 괜찮아요.”

그러나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본은 절대 괜찮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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