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8화
남작의 한마디에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익숙한 듯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홀의 문이 열리고 하인들이 큼직큼직한 테이블을 날랐다.
테이블은 일반적인 모양이 아니었다. 넓적한 테이블은 어떻게 보아도 카드 게임을 위한 도박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두 개 정도는 당구 테이블로 보였으나, 나머지는 꼼짝없이 도박판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멀쩡했던, 심지어 아름다웠던 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뇌가 고속으로 회전했다. 갑자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남작의 말에 자연스럽게 움직이던 사람들을 보아 모두 이 파티의 목적을 알고 있었던 거다. 남작이 우아하게 외쳤다.
“자!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마음껏 즐겨 주세요!”
혼란스러워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자, 등 뒤에서 테오도르가 속삭였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에 섞일 만큼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괜찮을 겁니다.”
입 안에 든 공기를 꿀꺽 삼키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 내 뒤에는 테오도르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침착해졌다.
‘괜찮을 거다.’
남작이 날 위해 무엇을 준비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심하게 굴어 봐야 창피를 주는 것밖에 안 될 테다. 그렇다면 전혀 무섭지 않았다.
‘만약 위협을 가하려고 하면 테오도르가 가만히 있지 않을걸.’
고작 한마디를 들은 것뿐인데 등 뒤가 든든했다.
남작은 능숙하게 하인들을 부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걸면서도 내 옆에서 멀리 떠나지 않았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익숙하게 짝을 지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저 여자가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가만히 당해 주지는 않을 거야.’
마지막으로 나와 남작 사이에 테이블이 놓였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하인들이 의자를 내려놓았다. 이본 남작은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으며 내게도 반대편에 앉을 것을 종용했다.
“얼른 앉아요. 게임의 종류를 정해야죠.”
남작은 즐거워 보였다. 눈이 휘어지고 뺨이 볼록하게 나와 있었다. 맞은편 자리에 앉자, 테이블을 옮기던 하인 하나가 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섰다. 이렇게 보니 하인들의 옷이 마치 카지노 딜러의 것과 같아 보였다.
하인이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전의 앞뒤로 게임을 정하실 수 있습니다. 게임을 정하시는 분이 후공입니다.”
그의 손에는 은화가 들려 있었는데, 깃펜이 그려진 쪽이 앞면이라고 했다.
“손님이니 선택권을 줄게요.”
“그럼 뒷면이요.”
“내가 앞면이네요. 자, 동전을 던져.”
하인이 동전을 튕겼다. 은화는 공중에서 빛을 반사하며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깃펜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렇게 운이 없어서야.”
이본 남작이 비죽비죽 웃었다.
“카드 게임 할 줄 알아요?”
“종류에 따라 다르죠.”
거짓말이었다. 나는 카드 게임이라고는 원 카드와 도둑잡기 같은 것밖에 몰랐다. 회사 사람들이 블랙잭이니, 훌라니 하는 걸 몇 번 듣기는 했지만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요? 그럼 일단 규칙을 가르쳐 줄게요.”
허세는 통하지 않았다. 남작은 규칙을 가르쳐 주겠다며 선심을 썼다. 그녀가 명령하자 하인은 미리 준비해 둔 카드를 꺼냈다.
뒷면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고, 앞면은 흔히 볼 수 있는 트럼프 카드였다. K, Q, J 대신 이 세계의 글자로 왕, 귀족, 기사가 적혀 있다는 것만 달랐다.
이본 남작은 카드를 쭉 늘어놓고 몇 가지 패를 만들어 보였다.
“규칙 자체는 간단한데, 10장씩 나눠 받은 카드를 들고 한 장 가지고 한 장 버려요. 원하는 만큼 카드를 바꿀 수 있고 더 강한 패를 가진 사람이 이기는, 뭐 그런 거예요. 간단하죠.”
“족보가 있군요.”
이본 남작이 눈짓하자 하인이 테이블에 몇 가지 조합을 늘어놨다.
“위쪽부터 강한 순서입니다.”
이것 역시 다른 카드 게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늬가 같고 숫자가 이어지면 족보를 완성할 수 있고, 기사보다는 귀족을, 귀족보다는 왕을 높게 취급했다.
“언제까지 반복하죠?”
“카드를 전부 버릴 때까지 반복하시게 됩니다.”
잠시 고민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카드를 나눠 드리는 건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이본 남작이 허락하자 테오도르가 자리를 바꿔 테이블 옆, 하인의 맞은편에 섰다. 그가 하인보다 두 배는 덩치가 큰 탓에, 카드를 넘겨받는 손의 크기도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하인의 손에는 빠듯하게 들어차던 카드가 테오도르의 손에서는 작은 종잇조각으로 보였다.
“섞고, 나누겠습니다.”
“카드놀이가 능숙한 모양인데.”
“폐하께서 친히 가르쳐 주셨기에.”
테오도르는 카드를 한 장도 흐트러트리지 않고 패를 섞었다. 그건 꽤 볼만한 풍경이었다. 테오도르의 손이 큰 탓인지 카드를 둥글게 말아 다른 손으로 보내는 게 마치 영화에나 나오는 딜러 같았다.
‘혹시 좋은 카드를 나눠 주려고 자기가 섞는다고 했나?’
믿는다, 테오도르! 내가 속으로 응원하는 와중에도 테오도르는 아주 신중하게 카드를 섞었다. 카드를 반으로 나누어서 다시 섞고, 또 섞었다. 그는 열 번이 넘게 카드를 섞고 나서야 패를 나누어 주었다.
내 앞에 열 장, 이본 남작 앞에 열 장. 카드는 무서울 정도로 바른 위치에 놓였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내기를 하죠.”
이본 남작이 카드를 뒤집지도 않고 말했다.
“제 주머니 사정을 남작님께 알려 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저도 그런 돈을 탐낼 만큼 가난하지 않으니 부탁을 들어주는 거로.”
“좋아요.”
이게 바로 마리가 말한 ‘시험에 들게 하는’ 짓이군. 파티에서 그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라 얼른 말을 이었다.
“대신, 위대한 분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선에서.”
“뭐, 얼마든지요.”
남작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카드를 뒤집었다. 그에 나도 따라 카드를 뒤집었다.
* * *
눈을 매섭게 뜨고 패를 훑어보았지만, 의외로 나쁜 술수는 발견할 수 없었다. 게임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카드를 버리고 바꿀 뿐인 게임인데도 손에 땀이 찼다. 마침내 마지막 패를 뒤집자, 단번에 승패가 결정 났다.
“내 족보가 더 강하네요.”
졌다. 처참하게 졌다. 테오도르가 무슨 술수를 부려 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없었다. 카드를 바꿀 때마다 꽝이었다.
‘맙소사.’
테오도르조차 표정 관리를 못 할 정도로 처참했다.
‘사기 쳐 준 거 아니에요?’
입 모양으로 벙긋거리자 테오도르가 당황하며 무어라 소리 없이 말했다. 절반 정도를 못 알아들었지만, 얼핏 부정, 막다 등의 단어가 보이는 걸 보니 대충 이런 뜻 같았다.
‘부정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극히 건전해 보이는 얼굴의 그에게 나쁜 짓을 바란 게 잘못이었다. 짜고 치는 도박일까 봐 자기가 카드를 섞었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졌어요.”
빠른 승복은 상대의 당황을 부른다. 이본 남작은 깔끔한 패배 선언에 잠시 말을 잃은 채 눈을 깜빡였다.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하네.”
“실력 차이를 부정해 봤자 뭐가 남겠어요?”
원하는 걸 말해 보라는 뜻으로 턱을 까딱였다.
“부탁이 있어요.”
이본 남작은 이전과는 판이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말을 뚝뚝 끊어 먹는 말투는 사라지고 공손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승자의 권한이죠. 말씀하세요.”
“내 하인들을 ‘카지노’의 직원으로 써 줘요. 열, 아니, 다섯이라도.”
남작의 눈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갈색 눈동자가 짙어지고, 패배 선언에 대한 당황스러움은 이내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읽어 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건 분노였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백작에게 호되게 당하던 날마다 거울에 비친 카를라의 눈에서 보았던 감정.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은 명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당신의 일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맹세해요.”
그리고 그건 나를 향한 감정이 아니었다.
“…….”
“봉급은 내가 낼게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건 내기의 탈을 쓴 부탁이었고, 청탁이었다. 내기에서 이기지 않고서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부탁임이 분명했다.
나는 내가 잘못 생각했음을 깨달았다. 남작은 처음부터 내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시험이라고 생각했던 건 단순히 부탁을 위한 밑바탕이었을 뿐이었다.
“열이든 스물이든 남작께서 원하는 대로 보내 주셔요.”
그렇다면 빚을 지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내게 칼을 들이밀지 않는 이상, 받아 줄 아량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를 묻지 않는군요.”
문제가 생기면 왕이 알아서 널 처리해 줄 거니까,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말을 삼키고 이내 입가를 끌어올렸다.
“어련히 때가 되면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하~ 그래요? 내가 말했던가요, 카를라? 난 정말이지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이본 남작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어 친근한 척을 했다. 말투도 다시 건방지고 예의 없어졌으나, 그 기저에는 친근함이 깔려 있었다. 황금빛 목걸이가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그것참, 기쁜 말씀이에요.”
하나도 안 기뻤다. 이본 남작은 진짜 이상한 사람이었다.
* * *
우리가 게임을 끝냈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게임에 몰두하느라 바빴다. 카드 게임에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어디에 끼여 놀아야 할지 모를 정도로 다들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테이블에는 정장을 입은 하인들이 꼭 한 명씩 붙어 있었는데, 역시나 전부 금발이었다.
“그래요, 난 금색이 좋아요. 그래서 모두 금발로만 뽑았죠. 예쁘잖아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이본 남작이 대답했다.
“표정 관리는 잘하는데, 시선 관리는 영 서투르더라고.”
그녀가 제 눈가를 톡톡 치며 웃었다. 호박색 귀걸이에 반사된 빛이 눈을 찔렀다. 내가 하인들을 훑어보는 걸 눈치챘다는 노골적인 행동에 혀를 찼다. 남작은 한술 더 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불안하면 성기사님을 보던데, 몰랐어요?”
“어쩌다 시선이 닿았겠죠.”
그녀는 부정을 긍정으로 이해하는,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었다.
“이런, 다음부터는 참고해요.”
남작이 낄낄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주변은 소란스러웠고, 각자 게임을 하느라 이쪽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다른 게임 할래요? 준비가 필요하니 내 방에서 해요.”
“홀에서도 충분히 즐겁게 놀 수 있을 거 같은걸요.”
독대를 요청하는 남작의 말을 거절하자, 그녀가 초조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여전히 장난스러운 웃음을 띤 남작이 속삭였다.
“부인의 남편에 관한 이야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