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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7)화 (27/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7화

    “정말 신전에 가실 예정입니까?”

    그건 들뜬 거 같기도, 우려하는 거 같기도 했다. 뒤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자, 테오도르가 제안했다.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부디 카를라 님을 모실 영광을 허락해 주시길.”

    그건 정말이지 거절할 수 없는 정중하고 간곡한 부탁이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웃는 척 입가를 가리고 대답했다.

    “좋아요. 허락할게요.”

    “감사합니다.”

    호의를 베풀고도 역으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게 신자들의 자세라면 나는 평생 그런 위인은 되지 못될 터였다. 애초에 카를라도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거 같고.

    그런 것보다는 주변 사람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이름을 완벽히 외우려 애썼다. 얼굴과 이름을 전부 외울 수는 없더라도 익숙해져야 다른 곳에서 마주쳤을 때 실례를 저지르지 않을 테니까. 이름을 헷갈리는 건 참 볼품없는 짓이었다.

    응접실 구석구석에 놓인 테이블에는 각기 다른 먹을거리가 놓여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씩 맛보며 적당히 물어오는 말에 대답하고, 시답잖은 질문을 던지며 시간을 보냈다.

    “카를라, 카나페는 괜찮아요?”

    갈색 머리의 여자가 다가와 물었다. 마리라고 했었나. 그녀는 남작가의 외동딸로, 카를라와 나이는 비슷하지만 작위는 없는 여자였다. 그러나 아주 어릴 적부터 가문 간의 약속으로 맺어진 약혼자가 있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녀를 거의 기혼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네. 우리 요리사에게 배우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맛있어요.”

    “그럼 저도 하나 먹어 볼래요. 음, 그러네요. 와인이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군요.”

    나를 따라 카나페를 하나 먹은 마리는 척 보아도 다른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고 물을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후작님이 신실하셔서 다행이에요. 와인이 나왔으면 저는 벌써 비틀거리며 쓰러져 있었을걸요.”

    우리는 킬킬거리며 쓸모없는 이야기나 늘어놓았다. 서로가 서로를 떠보는 걸 알면서도 소모적인 대화를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다행히도 마리는 말을 빙빙 돌리는 데 소질이 없는지 아니면 할 말이 떨어졌는지 이내 본론을 꺼냈다.

    “카를라도 이본 남작님께서 주최하신다는 파티 소식을 들으셨나요?”

    “네. 기쁘게도 남작님의 초대를 받았답니다.”

    마리는 손가락을 교차했다가, 내려놓았다가, 다시 엇갈려 깍지를 끼는 등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카를라, 그분은…… 뭐라고 할까, 그 곁에 있다가는 시험에 들게 될지도 몰라요.”

    이건 견제일까, 아니라면 진실한 충고일까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을 가늠하기 힘들었다. 마리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남작님은…… 초대한 사람들과 게임 하는 걸 즐기세요. 그 게임에서 지면 위대한 분을, 위대한 분이시여 저를 용서하소서, 모욕하게 한다는 소문이 있어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척 입을 가려 보였다.

    “불신자라는 뜻인가요?”

    마리는 화들짝 놀라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이 귀여운 강아지 같았다. 이 세계 여자들은 왜 이렇게 귀엽고 예쁠까.

    불륜의 온상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환경에 적응한 걸까? 그런데 왜 백작은 못생겼을까.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볼이 발그레해진 마리가 더듬더듬 변명했다.

    “그런 뜻은 아니에요. 다만, 그저…… 매우 짓궂은 분이라는……. 카를라,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분을 헐뜯고 싶은 게 아녜요.”

    “나도 알아요. 마리처럼 신실한 사람이 어찌 남을 헐뜯겠어요? 저를 걱정해 준 거죠?”

    “맞아요, 그냥 그런 소문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뜻에서…….”

    나는 마리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아주 뻔뻔하게 지껄였다.

    “그럼요. 조심할게요.”

    염려스러운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나쁜 말은 돌기 마련이었고, 이 또한 그런 소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리가 듣고 싶었던 싶은 말은 조심하겠다는 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카를라, 만나고 나서는 이미 늦어요.”

    “좋은 인연이 된다면 위대한 분의 뜻이고, 그렇지 않다면 제 탓이겠죠. 괜찮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마리가 파벌 싸움을 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귀족들 사이에서도 파벌이란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우리는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마리의 말뜻을 이해했을 때는, 이본 남작을 만나고 난 후였다.

    * * *

    이본 남작은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무슨 뜻이냐면, 화려하다는 뜻이었다. 일단 그녀의 저택부터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크고 화려했는데, 어지간한 사람은 입구에서부터 기가 죽을 정도였다.

    풋맨부터 하녀까지, 저택에서 만난 사용인들은 모두 금발의 미인으로, 이목구비가 진하고 선명했다. 눈을 내리깔면 긴 속눈썹이 반짝이며 빛났다.

    ‘리자를 데려올 걸 그랬나?’

    그 색에 무의식적으로 리자를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 버렸다. 아무리 예뻐도 리자는 아니었다.

    ‘괜찮아. 테오도르가 제일 잘생겼으니까.’

    안내받는 동안 한 번씩 테오도르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는 마주칠 때마다 눈을 접어 웃어 보였는데, 그러면 이런 정신없이 화려한 곳에서도 뭐든 해낼 수 있을 거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하인이 무거워 보이는 홀의 문을 열었다.

    ‘누구누구 부인 드십니다, 이런 말은 안 해서 좋네.’

    넓은 홀에는 크리스털로 만든 샹들리에가 늘어져 있었고, 벽에 붙어 있는 기름 램프의 불빛이 샹들리에에 반사되어 홀을 환하게 비추었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사방이 반짝거렸다.

    ‘와, 진짜 예쁘다.’

    하인에 이어 홀의 길 안내를 맡은 하녀는 능숙하게 이본 남작을 찾아 나를 그녀의 앞까지 안내했다.

    “어서 와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남작님.”

    “별말씀을.”

    이본 남작은 승마장에서도 그랬지만 한 마리의 공작새 같았다. 아니, 여러 색을 가진 공작새보단 꾀꼬리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제외한 온몸이 노란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진하기와 톤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틀어 올린 머리에 꽂힌 장신구부터 귀걸이, 목걸이, 그리고 드레스와 구두까지 모두 반짝이는 노란색이었다. 카를라가 입는다면 족히 일 년은 웃음거리가 될 만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정말이지 잘 어울렸다. 그녀의 짙고 붉은 머리카락이 노란빛 사이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남작은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 품평하듯 나를 훑어보았다. 보라면 보라는 뜻으로 나 역시 어깨를 펴고 등을 꼿꼿하게 폈다.

    자작도 아닌 남작에게 기가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나보다 한 뼘은 작은 여자를 여유롭게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배짱이 좋군요.”

    “칭찬으로 듣겠어요.”

    “칭찬이에요. 카드 게임엔 표정 관리가 중요하거든.”

    남작의 말에는 품위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 신분을 의심하지 못할 만큼 그녀는 귀족 특유의 거만함을 갖고 있었다.

    “당신 뒤에 있는 기사님은 영 못 써먹겠지만요. 게임 할 때는 뒤에 서 있지 말라고 해요. 치워 버리라고요.”

    이본 남작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일순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테오도르가 누구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이런 식으로 구는 건 왕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등을 맡기는 데 성기사보다 든든한 분이 어디 있을까요?”

    비아냥거리자 남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지나가는 하인의 손에 들린 와인 잔을 빼앗듯 들었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가끔은 게임 하는 상대보다 뒤에 서 있는 구경꾼 얼굴에서 패를 읽기 편할 때가 있거든요.”

    그러고는 단번에 와인을 들이켜고, 잔을 도로 하인의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술을 급하게 마시면 더 빨리 취할 텐데도 그녀는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다.

    남작은 내 어깨너머로 시선을 주어, 이번에는 테오도르를 훑어보았다. 입꼬리는 한쪽만 올라가 있었다. 그건 명백한 압박이었다.

    ‘못되게 구는 건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노골적인데.’

    백작에게 당한 만큼 내게 갚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거라고는 예상했다. 그러나 이만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당황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남작과 독대하는 도중 등을 돌리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대신 그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새카만 머리카락, 반듯한 눈썹, 반짝이는 사파이어빛 눈동자와 기다란 속눈썹……. 순식간에 생각이 정리되었다. 놀라운 효과였다.

    지나치게 친근한 척 굴거나, 지나치게 못되게 구는 건 모두 의도가 있어서였다. 그렇다면 이본 남작의 의도는 뭘까? 뻔했다.

    후작의 파티에서는 이보다 더 호의적으로 시험받지 않았던가. 양상은 달라도 본질은 같았다. 그러나 나는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내가 입가를 끌어올리자 남작이 눈을 끔뻑였다. 볼만한 호선을 그리기 위해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그렇네요, 하지만 해 보지 않고선 모르는 일이잖아요?”

    “맞아요! 게임은 해 봐야 아는 거죠!”

    남작이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주변 사람이 돌아볼 정도였다.

    ‘역시.’

    남작은 내게서 그런 말이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속으로 마리에게 사과했다.

    ‘이러니 얌전한 마리의 입에서 시험에 들게 한다는 말이 나오지.’

    돌아가자마자 벨과 함께 마리에게 보낼 선물을 의논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남작이 양팔을 번쩍 들었다. 그녀의 팔에 달린 금색 장신구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느 무대의 배우라고 해도 믿을 모습이었다. 남작은 손님들을 향해 해맑게 외쳤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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