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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6)화 (26/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6화

    파티에 참석하겠다고 답장을 보낸 날부터 벨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나 절반은 그녀가 자초한 거나 다름없었다.

    일어나자마자 머리를 백 번 빗어야 한다며 부산스럽게 구는 건 약과였다.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지 피부를 좋게 하려면 차에 치즈를 녹여 마셔야 한다고 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벨, 차는 평범하게 내와.”

    “네, 마님.”

    벨은 내가 제지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제멋대로 구는 리자를 크게 벌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다소 편해진 듯한 모습을 보였다.

    내가 한숨이라도 쉬면 자칫 화를 당할까 떠는 것은 덜해졌지만, 그 반동으로 종종 들뜨곤 했다.

    ‘귀여우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치즈는 아니지, 치즈는.’

    부산스러워진 것만 빼고 벨은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했다. 내가 고른 옷에 맞는 모자와 장갑을 고르고, 목걸이와 머리 장식을 수없이 대보며 어울리는 것을 찾아내었다.

    거의 인간 승리나 다름없었다. 벨은 시간이 촉박해 아쉽다면서도 ‘그리 미인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있는 귀부인’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놀라운 솜씨였다.

    “벨,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 네 조상 중에 마법사가 있었을 거야, 그렇지?”

    치즈 대신 산양유가 들어간 차를 마시며 농담을 던지자 그녀는 뿌듯하다는 듯이 어깨를 폈다. 그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 나라도 그럴 거다.

    카를라의 얼굴은 수수하다 못해 튀는 구석이 없었다. 치켜 올라간 눈매나 앙다문 입술이 고집스러워 보였으나, 그것마저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그 탓에 무턱대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혀 놓으면, 묘하게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벨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챙이 크고 새하얀 밀짚모자로 그림자를 드리워 사나운 눈매를 가리고, 붉은 드레스 위에 새하얀 숄을 걸쳐 얼굴에서 시선을 분산시키는 묘수라니.

    “모자에 장식이 더 있었으면 좋겠지만…… 지금부터 자수를 놓아서는 제 시간을 못 맞추겠죠?”

    벨이 밀짚모자를 만지작거리며 아쉽게 말했다. 그녀는 자수를 퍽 잘하는 편이었음에도 손이 굼뜬 게 흠이라며 자책을 했다.

    “이걸로도 충분해.”

    그녀가 과로할까 무서워 얼른 얼굴에 금칠을 해 주었다. 지금 상태로도 흡족하다고 몇 번이고 말해 주어야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터였다. 벨이 쓰러지면 리자를 데리고 파티에 가야 하는데, 그런 끔찍한 상황만은 막고 싶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이 딱 좋아. 벨, 네 솜씨는 정말 황홀해.”

    아예 찻잔을 물리며 다과를 다 가져도 좋다고 허락하기까지 했다. 그런 벨을 리자는 부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생각하면, 그게 문제였다.

    리자가 사고를 쳤다.

    고운 손에 들린 밀짚모자가 너덜너덜했다. 아니, 리자의 손은 그리 곱지 않았다. 여기저기 피딱지가 앉아 있었으니까. 리자는 한참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설명해 볼래?”

    나는 침대에 늘어져 벨이 끌고 온 리자를 올려다보았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란인지.

    “흑흑…….”

    리자의 턱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이며 벨이 잡아 흔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카락 때문에 도무지 눈 뜨고 못 봐 줄 꼴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벨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리자의 머리채를 꽉 잡았다가 놓았다.

    “마님, 어쩌죠?”

    벨의 눈가는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얼굴이 더 눈에 띄었다. 그녀의 콧잔등에 박힌 주근깨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우선은, 내 것을 돌려주련?”

    리자가 덜덜 떨며 모자를 내밀었다. 우아했던 밀짚모자는 벌레가 먹은 것처럼 구멍이 뚫려 있었다.

    ‘세상에. 이대로는 절대 못 쓰겠는데.’

    고작 구멍을 뚫은 것만으로 물건이 하찮아 보이게 만드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다른 모자를 쓰면 되지 뭐 그리 요란을 떠냐 말하고 싶었지만, 벨의 얼굴을 보니 차마 입 밖으로 내뱉기가 어려웠다.

    모름지기 귀족의 세계에서는 모자에서부터 장신구, 옷, 구두, 심지어 손에 드는 부채와 양산까지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뒤에서 무슨 말이 돌지 모르니까.

    “이, 일부러 그런, 끅…… 그런 건 아니었어요. 자, 자수를 놓으면 더 예쁠 거 같아서…… 정말, 히끅, 정말이에요, 마님! 나쁜 생각은 없었어요. 신께 맹세해요.”

    듣자 하니 밀짚모자에 자수를 놓으려고 시도한 모양이다. 아이들 양말이나 옷에 자수를 놓아 본 적이 있으니, 밀짚모자도 쉬우리라 생각했다고.

    ‘이 멍청이를 어쩌면 좋지.’

    의도는 좋았으나 밀짚모자가 천처럼 촘촘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리자는 큼직한 바늘로 밀짚모자에 구멍을 뚫어 놓았고,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벨에게 들켜 내게 끌려온 것이다.

    자신도 도움이 되어서 칭찬받고 싶었다고 엉엉 우는 그녀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해야 했으나 오늘따라 영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마님, 보석이라도 달아 놓을까요?”

    밀짚모자에 보석이라니, 그거야말로 너무 과해 웃음거리가 되기 딱 좋았다. 일어나기도 전에 이런 벼락같은 일을 맞이하려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양귀비 같은 여자라고 했던 거 취소. 양귀비는 똑똑했다고 하던데, 얜 왜 이렇게 모자라지…….’

    속으로 욕을 삼키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벨, 정원에 가서 꽃을 좀 따 와. 얼마 전에 심었던 거 있잖니.”

    “꽃을요?”

    “어차피 자수를 놓고 싶어 하지 않았니. 진짜 꽃으로 장식하지 뭐.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벨이 좋은 생각이라며 화색을 띠었다.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잘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벨은 서둘러 정원으로 향했다.

    나는 남겨진 리자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마님,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제발…….”

    이상했다. 백작의 정부는 내게 ‘그러니 백작이 너를 찾지 않는 거다.’라며 대놓고 비아냥거릴 수 있을 만큼 배짱이 두둑했다. 그러나 눈앞의, 사랑스럽고 가련한 얼굴을 한 하녀는 사소한 실수로 저택에서 내쳐질까 봐 덜덜 떨고 있었다.

    물론 모자를 망쳐 놓은 게 사소한 실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잘만 일하던 사람을 홀랑 내쫓을 만한…….

    ‘……곳이지, 여기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 이상한 세계는 그랬다. 결혼한 사람이 정부를 두는 건 흠이 아니더라도, 하녀가 주인의 물건을 멋대로 손대는 건 큰 죄였다.

    “말채찍으로 때리셔도 달게 받을게요, 잘못했어요, 허어엉- 내쫓지만 말아 주세요…… 정말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마님.”

    정말이지 멀쩡한 도덕관념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 세계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리자의 윤리관이 지극히 당연한 보통의 상식일 거다.

    “리자.”

    카를라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말채찍으로 때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전처럼 심부름을 시키기엔 피곤했다. 적당히 내가 아는 끔찍한 벌을 주기로 했다.

    “이번 달 급여는 평소의 반으로도 차고 넘치겠구나.”

    “네?”

    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앳된 얼굴에 드리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어이가 없어졌다. 혹시 이해를 못 한 건가 싶어 친절하게 덧붙여 주었다.

    “한 달 감봉이야.”

    “정말요? 그냥, 그냥 삭감만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몇 번이고 되물었다.

    “내 결정에 토 달지 말고 가서 세숫물이나 가져오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그제야 리자의 얼굴이 햇살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평소처럼 기운찬 발걸음으로 한달음에 문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괜히 봐줬나.’

    후회는 없었다. 리자는 월급이 반토막이 되면 얼마나 괴로운지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백작에게 징징거려도 확실한 명분이 있으니 또 다짜고짜 찾아와서 내 속을 뒤집지는 못하겠지. 결국 백작만 고생하는 꼴이 될 테다.

    그 뒤로 벨이 예쁘게 핀 양귀비를 가져와 모자에 뚫린 구멍을 수습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이상하지는 않을 정도라고 판단했다.

    ‘고작 밀짚모자를 꽃으로 장식했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나겠어…….’

    그런 생각으로 양귀비를 잔뜩 장식했고, 그 결과 후작의 파티에서 장난기 어린 시험을 당한 거다.

    애초에 생각 없이 한 일을 잔꾀로 수습한 결과였다. 무슨 의도가 있는 척하더라도 금세 허점이 드러날 게 뻔했다.

    화려한 숄과 값비싼 목걸이, 그리고 높은 구두보다 들풀을 장식한 모자가 눈에 띄다니,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일투성이였다.

    “신전에 걸음 하신 지 좀 되었다고 들었어요.”

    귀족들은 그들의 무리 안에 나를 넣어 주기로 완전히 합의를 보았는지, 매우 친근하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몸이 좋지 않아서요. 한심한 일이죠. 하지만 매일 밤 기도하고 있답니다.”

    “어머, 한심하다뇨. 전혀 그렇지 않아요. 중요한 건 신실한 마음이니까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해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말투는 어느 세계에서나 비슷한 모양이라, 그들의 흉내를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말끝마다 ‘위대한 분’을 운운하고, 모든 감사를 신에게 돌리면 되니 쉽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삶 또한 그랬다. 신전에 가서 기도를 올리고, 봉사하고, 기부하며 검소한 나날을 보냈다. 카를라의 인생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옷도 화려하지 않았고, 장신구도 최소한으로 걸치고 있었다. 물론 귀족이니 값이 나가는 물건이긴 할 테지만 딱 봐도 파티를 위해 맞춘 거라기보다 오랫동안 소중하게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 그래서 다른 것보다 모자에 신경을 쓴 거구나.’

    그제야 그들의 시험이 이해되었다. 모자를 빼면 온통 값비싸 보이는 것들뿐이었으니, 사치하는 여자라고 생각해도 별수 없었다. 시험하고 싶을 만도 했다.

    오히려 모자가 아니었다면 바로 배척당했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아까보다 편해진 마음에 방긋 미소를 지었다.

    “기도하러 가실 때 불러 주시면 더없이 기쁘겠어요.”

    “그럼요.”

    신전에 함께 갈 약속을 잡으며 카를라를 떠올렸다. 어쩌면 카를라는 이들과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거다.

    ‘신전에 가는 건 좀 기대되는데.’

    테이블 위의 과자를 집어 들며 잠시 쉬려던 찰나 테오도르가 내 뒤에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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