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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5)화 (25/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5화

    초대장에 답장을 보내는 내내 리자는 옆에 달라붙어 손부채질을 해 주었다. 거슬릴뿐더러 열을 식히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짓이라 낭창한 얼굴에 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자, 정신 사나우니 손 치우렴. 그리고 벨, 집사에게 이 편지를 내일 아침 일찍 부치라고 전해 줘.”

    곱게 밀봉한 답장을 벨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장 방을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왜 그러니?”

    “재단사를 부르라고도 전할까요?”

    벨의 지적은 옳았다. 야유회를 가든, 파티에 참석하든 옷이 필요했다. 몇 벌 사 놓은 옷이 있기는 했지만 앞으로 사교 활동을 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돈이 있는데 이전처럼 벨에게 수선을 요구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그러렴. 아, 기왕 맞추는 김에 네 옷도 몇 벌 맞추자꾸나.”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이자 벨이 활짝 웃었다. 야유회나 파티에 함께하는 전담 하녀에게 옷을 사 주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래 봤자 엄청 화려하거나 좋은 옷은 아닌데.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장신구나 두어 개 더 사 줄까 싶었다. 벨이 방을 나가자, 데굴데굴 눈을 굴리던 리자가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마님, 파티에 가시는 거예요?”

    리자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명확히 의도된 행동이라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래.”

    “저도 가고 싶어요, 마님.”

    반짝이는 눈에 욕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뻔히 보이는 속셈에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머리를 쓸 줄도 모르는 멍청하고 귀여운 리자.

    “글쎄…… 네가 벨만큼 능숙해지면 생각해 보자꾸나.”

    리자가 벨만큼 능숙해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영원히 파티에 데려가지 않겠다는 못된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리자는 화사하게 웃었다.

    “네!”

    홀린다는 게 이런 걸까. 리자가 들떠서 조잘거리는 걸 들어 주는 척하느라 소공작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는 걸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왕의 후광을 두르기엔 사교계 모임만 한 곳이 없었다. 급하게 옷을 맞출 필요도 없으니 그녀가 하사한 상자를 열어 그럴싸한 게 있는지 찾아보기로 했다.

    벨과 리자는 진귀한 선물을 볼 생각에 들떠 있었다. 백작은 탐탁잖은 티를 냈으나, 대놓고 핀잔을 주지는 못하였다.

    “마님, 머리를 하나로 땋아서 늘어트리는 건 어떨까요?”

    “마음대로 하렴.”

    벨은 틈만 나면 내 머리를 새로 땋겠다고 야단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꼭 스물세 가지의 서로 다른 머리 모양을 선보였는데, 내 생각을 말해 주자니 찬물을 끼얹는 거 같아서 잠자코 열기가 식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뭘 하든 카를라가 미인으로 보이지는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무릎에 놓인 상자의 리본을 마저 풀었다. 왕이 선물한 상자를 하나씩 풀어보는 건 꽤 재미가 있었다.

    은으로 만든 식기는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빛을 쬐면 가장자리에 꽃무늬가 떠올랐다. 접시와 찻잔만으로도 훌륭한데 그에 더해 나이프, 포크, 스푼도 종류별로 놓여 있었다. 심지어 각설탕 집게도 함께 들어 있는 것을 보니, 왕이 얼마나 카를라를 총애하는지 느껴졌다.

    ‘팔면 돈이 좀 되겠는데.’

    실질적으로 선물을 받은 나는 못된 생각이나 하고 있지만. 속으로 낄낄거리며 상자를 화장대에 대충 올려 두었다.

    다음 상자를 무릎에 올려놓자, 머리를 치장하는 벨과 리자의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어서요, 어서요, 하는 재촉이 들리는 거 같았다. 리본을 풀자 등 뒤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와…….”

    나는 상자 안에 곱게 개어진 천을 들어 올렸다.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얇은 레이스로 만들어진 숄이었다. 반대편 벽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너무 아름다워요…….”

    벨이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예 입을 떡하니 벌리고 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하얗네.’

    보는 눈이 없는 사람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고급품이었다. 보풀은커녕 색이 바랜 부분도 없었다. 가볍게 좌우로 잡아당기면 쫀득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레이스는 불규칙하게 짜여 있었는데, 곧 그게 어떤 모양의 일부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 숄을 몸에 걸쳐 보자, 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님, 꼭 커다란 꽃에 쌓여 있는 거 같아요. 아름다우세요.”

    벨의 목소리가 즐겁게 울렸다. 테오도르가 슬며시 문을 열었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전과는 달리 몇 번 얼굴을 쓸었다가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왔다.

    ‘이상한가? 아닌데. 예쁜데?’

    몸을 빙글 돌리자 어깨에 걸쳐진 숄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꾸벅 묵례하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방금 그건 뭐였지?’

    어이가 없는 행동이었다. 그걸 보고 키득키득 웃는 벨에게 눈치를 주자 얼른 숄을 매만져 주었다.

    “이렇게 촘촘한 레이스는 만들기 힘들 텐데, 어떻게 구하셨을까요?”

    “그러게.”

    왕은 이런 물건을 카를라의 결혼 선물로 준 거란 말이지. 싸운 후에도 줄곧 보관하고 있다가 내게 건넨 거고.

    감성적이게 될 거 같아 얼른 숄을 벗어 벨에게 건넸다. 그녀는 요령 있게 숄을 접어 상자에 도로 넣어 두었다.

    ‘다른 선물도 이 정도 급이면 무서울 거 같아.’

    침을 삼키고 그나마 작은 상자를 골라 열어 보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무난한 보석이었다. 하나같이 검은색이라는 것만 빼면.

    “와아, 상자에 있는 보석 전부 마님의 눈 색과 똑같아요!”

    리자가 낭만적이라며 요란을 떨었다. 테오도르가 다시 문을 열었다가 닫는 게 보였다. 리자가 소란을 피울 때마다 안을 확인할 모양인 듯했다. 우직한 모습이 미련해 보였지만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이건 흑요석이고, 다이아몬드, 이건 비취, 이건 스피넬…… 마님, 사파이어도 있어요!”

    “세상에, 토르말린도 있네요. 흔하지 않은 건데!”

    벨은 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가 예쁘게 가공된 보석을 내게 하나하나 보이며 설명해 준 덕분에 보석에 대한 지식이 조금 늘어났다. 그래 봤자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모르는 문외한이니,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지만.

    ‘보석은 희귀하면 값이 비싸다고 했던가? 그럼 이건 얼마나 비싼 거야?’

    손에 들린 보석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조건 없는 애정이 무겁고 무서웠다. 왕은 무슨 생각으로 내게 이런 것들을 준 걸까. 고운 천으로 보석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모처럼 선물받은 것이니, 좋은 날 써야겠구나.”

    * * *

    그런 의미에서 버너 후작의 파티는 정말이지 과시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후작은 왕을 지지하는 데다 신실한 신자니 명분도 좋고, 그녀도 체면을 세울 수 있을 테니 서로 이득인 관계였다. 거기에 격식 있는 자리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만 조촐하게 모이는 다과회에 가까워, 친목을 다지기 좋아 보였다.

    ‘어울릴 보람이 있는 사람이면 좋겠는데.’

    후작의 저택은 특이하게도 정원 가득 조각상이 놓여 있었는데, 개중에서도 펜 모양이 가장 많았다. 깃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모양의 만년필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담장에는 펜촉이 새겨져 있기도 했다.

    ‘역시 책이랑 펜이 무슨 상징인가 보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사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벨, 너는 들어가 쉬고 있으렴.”

    벨은 하녀의 도움을 받아 사라지고, 테오도르만 내 뒤를 따랐다. 집사는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이내 입을 다물고 하녀에게 눈짓했다.

    하녀는 응접실로 안내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버너 후작의 파티는 다과 모임에 가까운 것으로, 부담 가지지 않아도 될 정도의 규모였다.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했다.

    넓은 응접실은 파티를 위해 가구를 치웠는지 중앙이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귓가에 속삭였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버너 후작입니다.”

    그와 동시에 하녀에게 귀띔을 받은 버너 후작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나이가 지긋한 귀족으로, 얼굴에 여유가 가득해 보였다.

    “어서 와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후작님. 저택이 정말 아름다워요.”

    그녀는 아주 기꺼워 보였는데, 아무래도 왕과 화해하고 처음 참석한 파티가 이곳이기 때문인 듯했다. 그만큼 그녀의 파티를 중요하게 판단했다는 뜻이니까.

    “열심히 꾸몄어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버너 후작이 어깨너머를 힐끔거렸다.

    “그런데 뒤의 기사님은 혹시…….”

    일부러 흐린 말 뒤에 나올 내용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테오도르에게 눈짓을 해 보이자 그가 근사하게 인사했다.

    “신의 종, 테오도르입니다.”

    “어머나.”

    후작의 입꼬리가 씰룩이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신원을 확실하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감사하게도 폐하께서 편의를 보아주셔서요.”

    그녀는 기쁨을 최대한 참으려는, 그러나 도저히 숨길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왕이 자신의 호위까지 붙여 주는 카를라를 가장 처음으로 초대했다는 뿌듯함까지 엿보였다.

    한참 나이가 많은 여인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후작은 능청스럽게 내 옆에 서서 다가오는 사람들과 인사했다.

    그러자 주변에 조금씩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후작에게 먼저 인사했지만,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응접실을 어쩜 이렇게 잘 꾸미셨는지.”

    “후작님, 오랜만에 뵈어요.”

    왕의 새로운 측근이 된 ‘백작 부인’과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이 분명했다.

    “그런데 옆의 분은…….”

    힐끔거리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후작은 목을 가다듬더니 우아하게 나를 소개했다.

    “카를라 백작 부인이에요. 카를라, 이쪽은 마리 자작 부인. 그리고 이쪽은 플로어 백작의 따님, 루이예요. 두 사람 다 봉사에 뜻을 두는 신실한 신자들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만남 또한 위대한 분의 은총이죠.”

    후작은 다가오는 사람 모두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쑥한 사람들이었고, 매우 독실한 신자였다. 진짜 카를라와 만났다면 잘 맞았을 거 같은 사람들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과 한 번씩 인사를 하고 나자 시선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닿는 게 느껴졌다. 어깨를 펴고 숄을 가볍게 정돈하는 척 흔들거려 보았다. 아름다운 숄이니 눈이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선을 마주쳤을 때, 그들의 눈길은 모자에 꽂혀 있었다.

    “카를라, 모자가 정말 예뻐요.”

    챙이 넓은 밀짚모자에 양귀비를 장식한 게 눈에 띈 모양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귀부인이 말했다.

    “어린 아가씨들은 잘 모르는 옛 유행을 다시 보니 반갑네요. 이전에는 장미를 꽂곤 했죠. 들풀이라니, 흔하지 않은데.”

    그녀는 짓궂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꽃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그러게요, 특별한 이유라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후작이 말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건 명백한 시험이었다. 어쨌든 너를 이 모임에 받아 주겠지만, 대접을 어떻게 해 줄지는 대답에 달려 있다는 신호였다. 언젠가 리자가 더듬더듬 읽던 소설에 나온 내용이었다.

    ‘독실한 신자처럼 보이되, 귀족답게 우아하게 대답해야 해. 카를라처럼.’

    나는 허리를 쭉 펴 자세를 꼿꼿이 한 뒤, 눈을 최대한 내리깔아 카를라 특유의, 사제 같은 분위기를 내려고 애썼다.

    “장미도 들풀도 똑같이 위대한 분이 어루만지신 피조물이라, 꼭 장미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유를 붙이면 어떻게든 트집을 잡을 수 있다. 고로 이유 같은 건 없다고 솔직히 말하되, 절절한 신앙심을 보이는 게 내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거기에 아직 사교계에 익숙하지 않은 어린 귀부인 티도 내 주고.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어여쁘지 않나요? 혹여 제가 실수를 한 거라면, 부디 가엽게 여겨 주세요.”

    마지막으로는 나는 어리니 너희가 한번 봐 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지고 들어가는 건 어디서나 유효한 일이었다.

    필사적으로 생각한 말이 먹혔는지 곧 그러네요, 하는 긍정의 말이 들렸다. 노부인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요. 위대한 분이 만드신 것에 옳고 그른 게 어디 있겠어요?”

    아무래도 시험에 통과한 모양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자에 양귀비를 꽂게 된 실상을 알게 되면 다들 놀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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