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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4)화 (24/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4화

준비된 식사는 호화롭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단출하지도 않았다. 빵과 익힌 소시지, 으깬 감자 요리 두 가지, 반숙 계란과 다양한 소스로 버무린 채소들……. 가벼운 음식들이었으나 이래저래 손이 가는 종류였다.

“왔소?”

나는 백작의 퉁명스러운 표정에서 그가 소공작과의 식사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쌤통이다.’

모르는 척 태연하게 식사를 하며 백작이 용건을 먼저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는 으깬 감자를 몇 번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대화는 잘 끝났소?”

“덕분에요.”

“무슨 대화를 했기에 소공작이 그렇게 신이 났는지 모르겠군. 웃음소리가 서재까지 들리던걸.”

멋대로 코웃음이 나왔다. 안절부절못하고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던 게 뻔했다. 소공작이 크게 웃었다고 해도, 서재는커녕 복도에도 닿지 않았을 거다.

“그냥, 사업 이야기를 좀.”

내가 두루뭉술하게 대답하자 백작은 불쾌한 듯 식기를 거칠게 다뤘다. 달칵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폐하에 이어 소공작과도 화해한 모양이지?”

“제게 관심을 두시니 기쁘네요.”

집요한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응접실에서의 대화를 엿들었을 게 뻔한데 같잖게 나를 떠보려고 하는 게 거슬렸다.

접시 위에 놓인 채소를 잘게 썰고 있자 백작이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추궁하는 듯한 눈빛에 먼저 본론을 꺼냈다. 소모적인 대화를 끝내고 얼른 방으로 돌아가고픈 마음뿐이었다.

“폐하께서 제게 사업을 하나 맡기고 싶다고 하셔서요.”

백작은 놀랍다는 듯 나를 보았다가, 이내 헛웃음을 쳤다.

나는 그를 흘겨보고는 다시 손을 놀렸다. 백작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동생이라고 해서 너무 믿지 마시오. 그 여자는 요령만 잘 피우니까. 사업은 믿을 만한 사람과 해야지.”

그는 소공작의 험담을 한참 늘어놓았다. 대부분 그녀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업가인지, 그녀의 악랄한 혓바닥에 당한 사람이 얼마인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동안 칼질을 반복했다. 접시 위에 놓인 채소는 너무 잘게 다져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으깬 감자와 함께 그것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백작은 음료로 목을 축였다가, 이내 다시 떠벌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알 수가 없군. 당신에게 사업이라…… 내가 옆에 있었다면 반대했을 거요.”

그는 거만하게 나를 훑어보았다.

“당신도 알잖소. 당신은…… 소질이 없지. 오해하지는 마시오. 모름지기 사업이란 과감하게 돌진할 때도 있어야 하는데 당신은 너무 신중하잖소? 그래도 나는 당신의 그런 성격을 꽤 좋아해. 부인은 순종적일수록 좋지. 신을 섬기는 종처럼 말이오.”

그의 목소리는 연극처럼 과장되어 있었고, 내용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그가 언제까지 개소리를 하는지 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다시 으깬 감자를 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눈으로 천천히 백작을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은 단정했으나 호감을 사기는 힘든 인상이었다. 특히 야비해 보이는 눈이나 탐욕스러운 표정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당신이 사업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정말 말도 안 되지…….”

그는 자꾸만 내가 사업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되뇌었다.

“그래, 이건 어떨까. 그 사업을 우리의 공동 명의로 하는 거요. 그러면 폐하께서도 불만 없으시겠지. 물론 내가 전부 지휘하는 게 편할지도 몰라. 하지만 어느 정도 당신의 체면을 세워 주고 싶군.”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세상의 물정을 아무리 몰라도, 사업이 어린아이 소꿉장난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왕이 내게 맡긴 일을 홀랑 먹어 치우겠다는 심보가 뻔히 보여서 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이례적으로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늘어놓았다. 쓸모없는 말을 넘길 때는 상사를 핑계 삼는 게 최고였다.

“폐하께 여쭤볼게요.”

백작이 양손의 검지와 중지만 펴고 까딱거렸다.

“그렇지. ‘여왕 폐하’께서 허락해야 하고말고.”

저 높은 콧대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올라오는 주먹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진중하게 이야기하는 게 좋을 거요.”

백작이 이죽이며 말했다.

“이제 슬슬 나도 자리를 잡아야지. ‘우리 아이’를 맞이하려면 말이오. 곧 계절이 바뀔 텐데. 당신 방에 들어간 지도 꽤 오래되었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카를라였다면 분명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그녀는 그의 아이를 가지고 싶었을 테니까. 정말 비열하고 치사한 협박이었다.

“이번엔 저번 같은 일이 없도록 신경 쓰겠소. 진정한 가장이라면 응당 부부의 의무를 다하는 게 옳으니.”

그러면서 백작은 끈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발끝에서부터 피가 얼어붙었다. 빌어먹을. 나는 삼키는 게 음식인지 욕인지 모르게 식사를 끝냈다.

* * *

식사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벨에게 명령했다.

“편지지를 가져오련? 무늬는 네가 적당히 고르고. 넉넉히 가져와.”

얼른 소공작에게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그녀가 연락하겠다고 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마냥 기다릴 수야 없었다. 인생은 실전이고, 싸움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을 먼저 쳐야 한다.

테오도르가 뒤따르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을 건 없죠.”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가 되돌렸다. 다분히 고의적인 움직임이었다. 그에게 얻어 내야 할 정보가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화장대 위에 쌓인 초대장을 빼 들었다. 누가 가장 왕에게 호의적인지 테오도르에게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그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카를라 님, 떨고 계십니다.”

“어머, 제가요?”

코웃음 치며 손을 내려다봤지만, 정말 그의 말대로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당황스러움에 얼굴을 굳히고 가만히 서 있자 테오도르가 덥석 손을 잡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커다란 손이 내 손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튀어나와 있었고, 손바닥이며 손가락 사이에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손은 당장이라도 화상을 입을 듯 뜨거웠다.

‘아니, 내 손이 차가운 건가.’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입술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거 같기도 하고, 순식간에 사라진 거 같기도 했다. 기묘했다. 마침내, 테오도르가 입을 뗐다.

“무엇을 무서워하시는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습니다만,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

그는 어떤 일을 맡겨도 불평하지 않겠다는 충성스러운 말을 늘어놓았다. 덕분에 우리 사이에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괜찮으니 걱정은 그만두세요. 정말로 안 무서워요.”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긴장했을 때 체온이 내려갑니다.”

테오도르는 강경했다. 나는 침착하게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빼냈다. 테오도르 덕분에 적당히 데워진 손을 등 뒤로 감추고 뒷걸음질을 쳤다.

“무섭지 않아요.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요?”

떨림은 이미 멈춰 있었다. 백작이 무서웠다면 진즉 백기를 들었을 거다. 이건 분노였고, 증오였다. 코웃음을 치자 테오도르가 조심히 물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카를라 님이 감당하지 않으셔도 될 일을 무리하여 감당하고 계신다는 걸 압니다. 왜…… 도망가지 않으십니까?”

그건 이 이상한 세계에 떨어진 후, 나 자신에게 내내 물었던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 잠꼬대로도 대답할 수 있었다.

“내가 왜 도망가야 하죠?”

카를라의 몸에 들어온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그녀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건 나였다. 패물을 챙겨 도망가지 않은 것도, 백작에게 복수해 주기로 마음먹은 것도 나였다. 물론 백작이 이렇게 끝내주게 나쁜 놈일 줄은 몰랐지만.

“난 도망가지 않아요.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는걸요.”

백작과의 잠자리가 무서워서 마약 제조까지 생각한 주제에, 그에게는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또다시 떠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새파란 눈에 불빛이 반사되어 번득였다. 오팔같이 투명한 눈빛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내 그는 팔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주제넘었습니다.”

몸의 떨림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테오도르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지만, 태연하게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시킬 일이 있는데, 잘되었다 싶은 마음도 있었다. 테오도르에게 손에 들린 종이 뭉치를 건넸다.

“그럼 괜찮은 파티 좀 찾아 줄래요?”

그는 멍하게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어쩌면 놀란 거 같기도 했다.

“제가 보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락할게요.”

그는 아주 천천히 초대장을 훑어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으니 상아색 종이가 더없이 우아해 보였다. 테오도르는 몇 개를 뽑아내 내밀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이 네 곳이 좋을 거 같습니다.”

각 초대장의 주인은 버너 후작, 이본 남작, 미셸 남작, 요한 백작이었다. 전부 친분이 없는 이들이었으나 그나마 이본 남작과는 안면이 있었다. 대화도 없이 고개만 까딱인 것도 만남이라고 친다면 말이다. 애초에 카를라와 친한 사람이 드물었으니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테오도르는 그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왕과 얽혀 있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밖을 의식한 것인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는데, 어쩐지 귓가가 간지러워 자꾸만 귓바퀴를 매만져야 했다.

“버너 후작은 폐하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입니다. 원래는 2왕자파였지만, 아들이 형제가, 죄송합니다, 신의 종이 된 후로 돌아섰습니다.”

테오도르의 말은 이해하기 쉬웠다. 아들이 신전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면 쉽게 왕을 저버릴 수 없었을 거다.

그렇다면 주변 사람들도 왕을 지지하고 있겠지. 친해지면 좋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테오도르가 다음 초대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본 남작은…… 이카루스 백작과 척을 졌습니다. 카드 게임에서 백작이 비겁한 수를 썼다는군요. 자존심이 강한 편이라 아닌 척하고 있습니다만, 작년부터 그녀가 카드 게임에 예민해졌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적의 적은 내 편이라고 했다. 내가, 그러니까 카를라가 백작에게 칼을 갈았다는 걸 알면 편이 되어 주지 않을까.

나이가 지긋한 남작과 친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참가해도 나쁘지 않을 파티 같았다.

“미셸 남작은 중도파입니다. 그렇지만 폐하와 우정을 나누고 싶어…… 한다고 들었습니다.”

요컨대 미셸 남작은 꼬드기면 내 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테오도르는 부끄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그가 한 말들은 전부 왕에게 들은 이야기인 듯했다.

“요한 백작은요?”

테오도르가 마지막 초대장에 시선을 주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요한 백작은…….”

그는 운을 떼고서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는 목덜미를 자꾸만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테오도르가 내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정원은 아름답기로 손에 꼽힙니다.”

“네, 그리고요?”

그 뒤에 이어질 백작의 가치나 정치 성향을 기대했지만, 테오도르는 깔끔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뿐입니다.”

테오도르의 뺨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고해하듯 말했다.

“그저 아름다운 곳을 보여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물론 꽃을 좋아하시지 않는단 걸 알지만…….”

고른 이유가 고작 그것뿐이라고.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가끔 테오도르는 첫사랑을 하는 소년처럼 어리바리해질 때가 있었다.

“괜찮네요. 날짜도 적당하고. 마지막은……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고마워요, 경. 이만 쉬어도 좋아요.”

“위대한 분께서 카를라 님을 보호하시기를.”

테오도르를 보내자마자, 교대하듯 벨과 리자가 들어왔다. 심부름하러 가던 벨이 놀고 있는 리자를 잡아 온 것처럼 보였다. 리자는 입을 삐죽거리며 나를 보았다가,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마님, 더우세요?”

시선을 돌려 거울을 보니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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