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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3)화 (23/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3화

    카를라와 꼭 빼닮은 여자가 나를 보자마자 일어나 인사했다. 나는 단번에 그녀가 카를라의 동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치켜 올라간 눈매, 꽉 다문 입술. 마치 기사단 제복 같은 복장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군요. 얼마 만이지요?”

    나는 그녀를 떠보기 위해 뱉었다. 사실 얼마나 오래 얼굴을 보지 않았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일단 싸운 사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내게 위화감을 느껴도 납득할 수 있도록 밑밥을 깔기 위해서였다.

    “제가 신전의 서임을 받을 준비를 하고, 언니가 아직 백작 부인이 아닐 적 얼굴을 뵌 뒤로 처음이군요.”

    소공작은 능청맞게 대꾸했다. 편지와 달리 그녀는 존댓말을 썼으며 그 말투에는 친근감이 담겨 있지 않았다.

    ‘하긴, 이 년은 안 본 사이니까.’

    덕분에 나도 조금 더 날카롭게 대꾸할 수 있었다.

    “기별을 주었으면 더 반갑게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요.”

    나는 웃으며 그녀의 예의를 지적했다. 소공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언니를 보고 싶었던 동생의 어리광이라고 생각해 주시죠.”

    사실이 어찌 됐든, 동생의 어리광이라는데 더 핀잔을 줄 순 없었다. 나는 입술 안쪽을 가볍게 깨물었다.

    ‘사이가 많이 안 좋았던 건가? 카를라 덕분에 소공작이 된 거면 좀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몇 마디 말만으로는 그녀와 어디까지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벨이 따라 주는 차를 홀짝거리고 있자니, 침묵이 무겁게 느껴졌다.

    ‘떠보려는 건가? 왕과의 사업에 대해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일 수도 있어.’

    티가 나게 소공작을 힐끔거렸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반대쪽의 텅 빈 찻잔을 보며 벨을 불렀다.

    “벨, 찻잔이 비었구나.”

    “아, 괜찮습니다. 기다리면서 실컷 마셨거든요. 아마 백작가의 차를 종류별로 다 마셔 본 손님은 저뿐일 겁니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긴, 새벽부터 왔다는데 점심때까지 기다리게 했으니 차로 배가 부를 만도 했다. 내가 대강 고개를 끄덕이자 소공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형편없더군요. 찻잎의 질이 좋지 않아 입맛에 맞지 않으셨을 텐데…….”

    남의 집 차에 왜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빈 찻잔의 손잡이에 시선을 두었다가 자연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다시 마실 일은 없으실 테니 다행이군요.”

    “귀여운 동생을 이리 매정하게 대하시면 서운합니다.”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소공작이 와하하 웃었다.

    “여전히 부모님께 얼굴을 비추지 않으실 생각입니까?”

    소공작의 새카만 눈이 나를 쏘아보았다. 벨은 눈치를 보더니 얌전히 뒷걸음질 쳐 응접실 문을 닫고 나갔다. 응접실에는 나와 그녀, 둘뿐이었다. 어색한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

    ‘제발 앞뒤 상황 좀 이야기해 줘. 나는 절연했다는 거 말고는 아는 게 없단 말이야!’

    누구라도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싶었지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나는 눈을 가볍게 내리깔고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역시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는 게 최선이었다.

    “절 보고 싶어 하시긴 하세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공작가에서 언니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카를라의 일기장에는 부모가 얼마나 이 결혼을 탐탁잖게 생각했는지도 적혀 있었다.

    ‘편지 한 통 없었으면서.’

    정말 카를라를 보고 싶었다면 편지를 썼을 거다. 이 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않고서는 이제 와 보고 싶었다니, 믿을 수 있을 리가.

    “아버지가 언니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소공작이 카를라와 몹시 비슷하게 말한다는 것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믿지 않는군요. 그럴 거 같았습니다만.”

    소공작은 어깨를 으쓱였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는 빼어난 미인이 아닌데도 어딘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카를라와 비슷하게 생겼는데도 하는 행동이 달라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녀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내 눈을 마주 보았다. 소공작이 눈썹 끝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자 장난스럽게 말을 걸 때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눈을 깜빡이는 그녀는 갓 스무 살을 넘긴 아이처럼 보였다.

    “어머니도 언니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아시잖아요? 걱정이 많으신 거.”

    ‘카를라의 어머니라…….’

    엄마 이야기를 꺼내는 건 반칙이었다. 우리 엄마도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이틀에 한 번은 꼭 전화를 하곤 했다. 싸우고 나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밥은 먹었냐고 묻던 엄마가 생각났다.

    카를라의 엄마도 카를라가 무척 보고 싶겠지. 싸워도 뒤돌면 생각나는 게 가족이니까. 괜한 자존심에 지금까지 연락하지 못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소공작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활짝 웃었다.

    “곧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정식으로요.”

    한마디를 덧붙이자 그녀의 목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죄송. 정말 읽으실 줄 몰랐기에.”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술에 취해 아무렇게나 답장을 보냈으면 위험할 뻔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겠지.

    “폐하와 담소를 나누셨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이 빠르군요. 겨우 이틀 전의 일인데요.”

    “잘 아시다시피, 수도 찻집에 두 시간만 앉아 있으면 그날 왕실의 디저트 메뉴까지 알 수 있으니까요.”

    소공작이 쓰는 억양은 카를라의 것과 비슷했으나 그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거기에 말투는 테오도르와 유사했다.

    행동은 격식을 크게 갖추지 않았으나 그녀의 지위 때문인지 방만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건 그녀의 옷이 근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폐하의 저녁 식사에 올라갈 디저트 메뉴가 궁금해서 찻집에 앉아 계셨던 건 아닐 테고요.”

    “당연히 아니죠.”

    그녀는 늘어지듯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못된 사장처럼 보였다.

    “재미있는 사업이더군요. 고상한 언니가 카지노를 열 생각을 하셨다니, 놀랐습니다. 공작가에서도 힘을 보태기로 했습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역시 왕이 벌이는 사업에 저도 발을 걸쳐 보겠다는 심보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나, 다사다망하실 텐데 이런 일에까지 관심을 쏟으시고…….”

    실컷 비아냥거린 후에야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세계에 사자성어가 있나?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면 어쩌지?’

    그러나 내 고민이 무색하게도 이 세계에도 한자가 통용되는지, 소공작은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다시 공격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폐하께 투자자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말이죠.”

    “아, 오해는 하지 마세요. ‘공작가’에서 ‘맏딸’의 사업을 위해 적당한 토지를 내놓는 것뿐입니다. 명의는 언니의 것이 될 거고요.”

    “어째서죠?”

    “왕실 소유의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공작가에서는 손을 놓고만 있어야 하잖습니까. 친형제를 신전에 가둬 놓는 능구렁이한테 이용만 당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어쩌면 이 세계에는 왕실 모욕죄 같은 게 없을지도 모른다. 어쩜 하나같이 내 앞에서 왕을 욕해 대는지. 나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공작 소유의 땅에서는 무슨 일이 안 일어나는 것처럼 말하긴.’

    비웃음에 소공작이 눈가를 찌푸렸다.

    “못 믿으십니까?”

    “그럴 리가요. 다만…… 갑작스럽기는 하군요.”

    소공작은 꼬았던 다리를 바로 했다. 놀랍게도 그 동작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거만한 귀족이 아니라 우아한 기사처럼 보였다. 소공작은 이내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머. 그러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웃었다. 원래라면 식사에 초대해야겠지만, 아침부터 소공작을 상대하느라 지쳤다. 점심을 먹다가 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를 밖까지 배웅하는 것을 벨에게 일임하려 했다.

    “제가 모셔다드려도 되겠습니까?”

    뒤에서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거다.

    ‘깜짝이야!’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테오도르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큼, 부탁해요.”

    “여전히 고상하시군요. 호위 기사에게 ‘부탁’이라니.”

    소공작은 비아냥거리기는 했으나 얌전히 걸음을 옮겼다. 문밖으로 나가기 전,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 어이없는 말에 나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 ‘카를라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깜짝 놀라 입술 밖으로 내밀었던 혀를 감췄지만 이미 소공작에게 들킨 후였다. 그러나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듯 크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여전해서 다행이네. 위대한 분이 언니를 지켜 주길!”

    * * *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난 후, 피곤함에 지쳐 한참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폭풍이 쓸고 지나간 거 같았다.

    왕과 독대했을 때와는 달리 내 페이스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이게 가족의 힘이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님! 백작님께서 점심 식사를 같이하자고 하세요!”

    리자가 응접실의 문을 열고 해맑게 외쳤다. 그 뒤로 벨이 그녀에게 핀잔을 주는 게 보였다.

    ‘하…… 귀찮은데, 안 가면 이상하게 여기겠지.’

    귀찮은 일을 하나 해치웠더니 또 귀찮은 일이 생겼다. 카를라였다면 기쁘게 백작과 식사했을 거라 생각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전하렴.”

    “네!”

    리자의 발소리는 여전히 크고 묵직했다. 내가 소파에서 늘어져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벨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마님, 머리를 다시 빗겨 드릴까요?”

    “아니…….”

    누워 있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저었다. 벨은 불만이 있는 듯 눈썹을 잠시 찡그렸다가 이내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소공작한테 같이 먹자고 할걸. 백작이 체하는 꼴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게 억울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테오도르가 돌아와 나를 부축해 줄 때까지 한참을 소파 위에 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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