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2화
테오도르는 나를 아주 조심스럽게 대했다.
“혹시 술 냄새 나요?”
“심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주정뱅이로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테오도르의 손이 닿았던 곳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차에 위스키를 조금 탔는데, 제가 술을 못 하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집사에게 전할 편지만 하녀에게 주고 다시 내 방으로 들어갈 거예요.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평소답지 않게 횡설수설 말이 길어졌다. 테오도르는 물끄러미 내 손에 들린 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대신 전하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테오도르의 손에 들린 봉투는 구겨지고 잉크와 밀랍이 여기저기 튀어 있어 정말이지 볼품없어 보였다. 나는 변명처럼 말했다.
“피데스 소공작에게 보낼 거예요. 정말 무례하더군요. 존대도 배우지 못한 모양이지! 그래서 나도 못되게 굴기로 했어요.”
뺨이 씰룩거렸다. 내 입가를 만져 보니 웃고 있는 거 같았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나는 웃고 있었다. 조금 우쭐해진 기분으로 그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카를라라면 하지 않을 짓이었지만, 들뜬 상태라 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가정교사를 찾고 있냐고 비꽈 줬어요. 어때요, 재미있죠?”
테오도르가 나를 살폈다. 그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딱히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카를라 님, 감히 말씀드리자면, 편지는 내일 보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무슨 뜻이에요?”
“취하셨습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확실히, 와인과 달리 위스키가 좀 독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취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난 제정신이에요.”
“압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우에게 보낼 편지로는 적합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나는 문득 그가 선택하는 단어들이 매우 낡고 고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기사인 탓일까, 아니라면 이 세계에서는 저런 말들이 흔한 걸까. 어쨌든 그보다 중요한 건 그가 피데스 소공작을 표현한 말이었다.
“아우?”
“예. 카를라 님의…….”
테오도르의 동공이 커졌다.
“아…… 모르셨군요.”
그는 당황스럽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하녀들 또한 지나가지 않았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피데스 소공작은 카를라 님의 동생입니다.”
나는 단번에 취기에서 깨어났다. 그런 말은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이 망할 소설! 설정이 뭐 이렇게 중구난방이야?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잠깐, 다시 말해 주세요. 아니, 여기서 말고.”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지만, 등 뒤에는 방문뿐이었다. 좋아, 일단 방 안에 넣고 보자.
“들어와요.”
나는 테오도르를 방 안으로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에게 바짝 다가가 따지듯 물었다.
“언제부터, 언제부터요?”
“태어났을 때부터…… 일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테오도르가 이상하게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모르셨습니까?”
“당연하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눈앞에 카를라가 있다면 멱살을 잡고 흔들었을지도 모른다.
소공작이 동생이라는 말은 곧 카를라도 공작가의 일원이었다는 소리였다. 계승권을 포기했다느니, 가족과 절연했다느니 하는 말만 적혀 있었는데, 공작이라니.
‘일기장에 왜 그런 중요한 걸 안 적어 놓는 거야!’
물론 카를라는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니 안 적었을 것이다.
그럼 뭐 해, 내가 모르잖아. 남들은 빙의든 차원 이동이든 하면 치트 키도 생기고 상태 창 같은 것도 생겨서 쉽게 살아가던데, 왜 나는 이런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소설에 들어와서 고생하고 있는 걸까.
“끔찍해.”
헝클어진 머리를 부여잡고 중얼거리자, 테오도르가 허리를 숙여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녀를 부를까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괜찮다는 소리를 몇 번 했는데도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백작이랑 결혼만 안 했어도 공작이었을 텐데! ……가족이랑 싸우기는 왜 싸워서! 자기 팔자라고 이렇게 막 꼬아도 되는 거야?’
몸이 멋대로 뒤틀렸다. 카를라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이렇게 제대로 자기 팔자를 꼬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테오도르의 손이 불쑥 얼굴 근처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 손은 내게 닿지 않고 그대로 떨어졌다.
“카를라 님.”
그는 부드럽게 나를, 아니 카를라의 이름을 불렀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취기가 완전히 가셨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턱을 가볍게 들었다.
“괜찮아요. 추태를 보였군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거라.”
테오도르는 내게 편지를 돌려주었다. 나는 편지를 꽉 쥐었다. 봉투가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며 구겨졌다. 그제야 테오도르는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나는 달아오른 뺨을 무시하며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내일 뵈어요. 오늘은 더는 밖에 나가지 않을 테니.”
“예.”
그러다 문득, 테오도르가 너무 타이밍 좋게 문 앞에 서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계속 방 밖에 서 있었나요?”
테오도르가 눈을 휘어 웃으며 대답했다.
“호위니까요.”
* * *
방문을 사이에 두고 테오도르가 서 있다고 하니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문을 두드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카를라 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남편이 부인을 보는데 기사의 허락이 필요한가? 당장 문을 열게!”
나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당신, 무슨 짓을 한 거야?”
문을 열자마자 백작이 내게 소리쳤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큰 소리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백작을 노려보았다. 그가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가 다시 어깨를 세우고 씩씩거렸다.
“소공작이 왔다고! 이 새벽부터!”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좁히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벨이 내 팔뚝을 가볍게 잡았다. 나도 모르게 휘청거린 모양이었다. 발에 힘을 줘 딛자 그녀의 손이 재빠르게 떨어졌다.
“피데스 소공작님께서 마님을 뵙길 청하셔요.”
그녀가 빠르게 귓가에 속삭였다.
“응접실에 계세요. 마님을 뵙기 전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고 하셔서, 백작님께서 마님을 깨우려고 하시다가 기사님이랑 대치 중이었어요.”
나는 금방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자마자 허리를 곧게 세우고 테오도르에게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그리고 느릿하게 백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소를 지으려고 했으나 아침이라 근육이 덜 풀렸는지 한쪽 입꼬리만 겨우 끌어올릴 수 있었다.
“고작 손님의 방문에 아침부터 이렇게 큰 소리를 내시다니요.”
백작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으나,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설마 응접실에 손님을 홀로 둔 건 아니겠지요.”
“소공작이 나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않소. 그러니까 얼른 당신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가 왜 서두르는지는 어렴풋하게 알 거 같았으나, 딱히 그를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싶지는 않았다.
새벽부터 예고 없이 방문한 손님이야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면 될 것이고, 권력자에게 약한 백작이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벨, 준비하자꾸나.”
나는 옆에서 눈치만 보는 벨에게 명령했다.
“네, 네! 마님.”
그러자 그녀는 반색하며 나를 따라왔다.
“손님이 언제부터 기다린 거니?”
“두 시간은 되었어요.”
“그래? 그럼 천천히 준비해도 되겠구나.”
절연했다는 집안사람이 왔다고 카를라가 헐레벌떡 나갈 거 같지는 않았다. 벨은 아직 물을 충분히 덥히지 못했다며 쩔쩔매었다. 나는 미지근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며 백작을 비웃었다.
‘명색이 백작이라는 놈이…….’
하녀를 시켜 나를 부르고 그동안 저는 소공작을 응대하고 있으면 될 걸, 한 소리 들었다고 허겁지겁 방문을 두드리다니.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배알이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배짱으로 불륜은 어떻게 하고 계시대?
“마님,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적당히 해 줘. 예쁘게 보일 사람도 없는데 뭐.”
“네.”
씻고, 옷을 고르고, 머리를 정돈하고 장신구를 걸치기만 했는데도 점심때가 다 되었다. 나는 느긋하게 응접실로 향했다.
긴장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지금 응접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카를라의 친구도 아닌, 가족이었으니까. 어쩌면 한눈에 내가 카를라가 아님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절연했다고는 하지만…….
‘괜찮겠지?’
나는 거만한 귀족 부인처럼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소공작이라고 해도 내게는 왕이라는 뒷배가 있었다. 그러니 이제야 그런 이상한 편지를 보낸 게 아니겠는가.
반말은 어쩌면 카를라와 화해하고 싶은 동생의 투정일지도 모른다. 나는 응접실의 문을 열고,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