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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1)화 (21/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1화

    홍차의 신이 있다면 리자에게 돈을 빌리고선 갚지 않은 게 분명하다. 리자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차를 못 탔다. 물은 너무 뜨거웠고, 찻잎을 너무 우려내어 쓴맛이 강했다.

    나는 차라고 부르기도 뭣한 풀 우린 물을 홀짝이며 혹시 그녀가 차에 원한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혀가 괴로웠다. 그러나 표정으로 드러낼 수는 없어 나는 얌전히 찻잔을 비웠다.

    “차 우리는 법을 더 배워야겠구나.”

    리자는 눈치를 보더니 헤헤 웃었다.

    “차를 타 본 적이 없어서요…….”

    나는 그녀의 말에서 희미한 위화감을 잡아내었다. 분명 백작은 리자가 남작 부인의 전담 하녀였다고 했다.

    남작은 자작 바로 아래 등급의 귀족으로, 개중에 수도 근방에 살 만큼 부유한 이들은 몇 없었다. 그래도 귀족은 귀족이라, 전담 하녀가 차를 우리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붙어 있으면서 내가 이를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는 벨이 그녀에게 차를 우리는 일을 절대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벨은 카를라의 입맛에 딱 맞는 차를 내리는 것에 상당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하나가 수상하게 보이니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모두 수상하게 느껴졌다. 떠올려 보면 리자는 오래된 사용인이라기엔 미숙한 점이 많았다.

    초대장을 마음대로 뜯어보고, 아무렇게나 말대꾸하는 것도 그랬지만 발소리가 크고 행동에 조심성이 없었다. 나는 슬쩍 그녀를 떠보았다.

    “이 전의 저택에서는 몇 년 일했다고 했지?”

    “삼 년이요, 마님.”

    “그래? 그럼 재주가 많겠구나.”

    리자는 내가 칭찬하는 게 기뻤는지 어깨를 쭉 펴고 가슴을 내밀었다. 그녀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나를 올려다보았는데, 그건 거만하다기보다는 주인의 칭찬을 바라는 어린 고양이 같아 보였다. 리자는 신이 나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전 정말 금방 배워요. 하녀장님도 칭찬하셨는걸요. 음, 그러니까…… 전 아주아주 작은 양말도 꿰맬 줄 알아요. 그거 아세요, 마님? 아이들 양말은 정말 작아요. 손가락 두 마디보다도 작답니다. 진짜 귀여워요!”

    그녀의 말은 동화책을 읽듯 리듬감이 있었고, 나는 과자 집을 뜯어 먹는 것처럼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아이들은 왜 그렇게 사랑스러운 걸까요? 아기들 정수리에서는 향긋한 캐러멜 냄새도 나요.”

    리자는 아이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끝없이 늘어놓았다. 아이를 낳으면 자신을 닮으면 좋겠다며 까르르 웃는 그녀는 정말 해맑아 보였다.

    저렇게 걱정 없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녀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바라보는 것을 무엇이라고 해석했는지 리자가 작게 탄식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마님, 음, 저…… 차가 드시기 힘드시면 위스키를 타올까요?”

    “위스키?”

    “네. 그러면 맛있어진다고 하시길래. 마님도 좋아하실까 해서 여쭤봤어요…….”

    누가 그랬냐고 묻지 않아도 뻔했다. 백작이 한 말이겠지. 그가 차에 술을 타 마신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카를라도 알았을까?

    내 안중에도 없는 남자가 차에 술을 타 마시던 독을 타 마시던 알 게 무언가 싶었지만, 위스키를 타 먹는다는 말은 솔깃했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병째로 들고 오렴.”

    저택에 술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 그렇게 명령했다. 카를라의 일기장에는 내가 알고 싶은 사소한 것들은 적혀 있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 내게는 없다는 사실은 이럴 때 불편했다. 리자는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집무실에 있는 걸 가져올까요? 백작님 책상에 술이 숨겨져 있는 걸 봤어요.”

    “그래.”

    리자는 신이 나서 방을 뛰쳐나가더니 순식간에 위스키를 가져왔다. 얼마나 뛰었는지 치맛단이 살짝 뒤집혀 있었다. 저도 몇 모금 얻어 마실 수 있을까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위스키병은 유리로 만들어져 묵직했다. 병 주둥이는 좁고 아래는 넓은 형태로, 한껏 멋을 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렌다 21년 숙성>

    나는 다시 차를 담은 찻잔에 위스키를 부었다. 리자는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내게 속삭였다.

    “마님, 이 위스키는 글렌다가 아녜요.”

    “뭐?”

    리자는 아주 은밀한 비밀을 말하는 양 목소리를 낮췄다.

    “냄새가 완전히 다른걸요.”

    “그런가?”

    “마님은 술을 잘 드시지 않으시죠? 그럼 잘 모르실 수 있긴 해요. 저는 가끔 찬장에 있는 걸 훔쳐 먹어서 잘 아는데…… 앗, 백작님께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그녀는 종종 백작의 술을 훔쳐 먹는 모양이었다. 카를라가 술에 취미가 없는 게 다행이었다. 나도 술을 그리 즐기지 않으니 그 정도야 눈감아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리자에게 찻잔을 밀어 주었다. 그녀는 몇 모금 홀짝거리더니 역시 맛이 완전히 다르다며 속삭였다.

    “향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확실히 달라요. 글렌다 21년 숙성은 꽃향기가 아주 진하거든요.”

    리자는 차를 섞은 위스키를 그냥 차 마시듯 맛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예쁜 병에 싸구려 위스키를 채워 넣으면,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럴싸한 술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맛있어서 좋아요.”

    리자가 내게 다시 찻잔을 내밀었다. 마치 어린 학생들이 음료수를 돌려 먹는 것처럼 나는 그녀가 내민 찻잔을 쥐고 입술에 술을 대었다. 희미하게 꽃 냄새가 날 뿐, 술은 쓰고 텁텁해 영 마실 게 못 되었다.

    “영 이상한 맛이 나는데…….”

    “차가 섞였어도 술인걸요!”

    도대체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 건지 고심하며 조금씩 맛보던 나는 철없는 귀족 마님처럼 까르르 웃었다. 카를라의 몸은 술에 약한지, 몇 모금 홀짝인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 너 다 마시렴.”

    리자에게 찻잔을 건네주자 그녀는 단숨에 술을 비웠다. 그녀가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굴 때마다 친근감이 느껴지긴 했으나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다.

    이 마음은 누구의 것일까. 나? 아니면 카를라? 나는 두통이라도 생긴 듯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반대쪽 손을 내저었다.

    “나는 이제 쉴 테니, 이만 나가 봐. 부를 때까지는 들어오지 않아도 좋아.”

    “네! 아, 마님.”

    리자가 찻잔을 챙기다가 물었다.

    “정원의 꽃이 피면 제가 조금 꺾어도 될까요? 몇 송이만요.”

    나는 너그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리자가 양귀비를 나쁜 일에 쓸 거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

    그녀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나는 기지개를 크게 켰다. 술기운이 돌아 잠시 현기증이 났지만, 아무것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좋아, 이제 일을 좀 시작해 볼까.”

    * * *

    화장대에 쌓인 초대장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왕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구분해 내는 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테오도르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차적으로 몇 명을 추려 내었다.

    카를라와 어느 정도 교류가 있어 내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초대장을 우선적으로 선별하고, 그다음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 마지막이 전혀 교류가 없었고 지위도 낮은 사람이었다. 거참, 왕궁을 방문한 지 만 하루도 안 됐는데 이 정도라니.

    “권력이 무섭기는 무섭구나.”

    우선 공작가에서 보내온 초대장을 뜯었다. 전혀 교류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초대장을 보낸 게, 특이한 사람이다 싶었다. 녹색 봉랍에 찍힌 인장은 왕의 것처럼 독특했다.

    활짝 펴진 책 위로 세워진 깃펜. 어쩌면 책이나 깃펜이 건국 신화나 나라의 상징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걸 굳이 찾아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매끄러운 종이 위에는 안부 인사나 티 파티 일정 대신 다른 말이 적혀 있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나는 겉봉투를 다시 훑어보았다. 분명 피데스 소공작이 보낸 것이었다. 나는 다른 글자가 있는지, 혹은 잘못 보낸 편지인지 찾기 위해 종이를 앞뒤로 훑어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달랑 한 줄이 전부였다.

    ‘그러는 너는 이게 무슨 짓인데?’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어이가 없었다. 나는 종이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소공작과 카를라가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나?

    카를라의 일기장에 쓰여 있던 내용을 더듬어 생각해 보았지만, 그녀와 싸웠다던 친구 중에 소공작은 없었다. 피데스, 피데스, 나는 소공작의 이름을 혀끝에 몇 번이나 올려놓았다. 그래도 짐작 가는 게 없었다.

    초대장을 몇 번씩 들여다보아도 달라지는 게 없긴 매한가지였다. 다만, 새카만 잉크로 쓰인 글자는 카를라의 필체와 꽤 닮은 구석이 있었는데, 몇 글자의 획을 길게 쓰거나 점을 동그라미로 그리는 게 그랬다.

    ‘고민만 한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소공작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저 관심을 끌어 볼 용도였다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라고 해 주고 싶었다.

    궁금증이 일어 잠을 못 잘 바에는 그냥 부딪혀 보는 게 나았다. 나는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화장대 서랍을 뒤지는 도중에도 자꾸 손이 헛나갔다.

    벨이나 리자를 부를까 하다가 포기했다. 술을 마시고 편지지를 찾는 마님이라니, 꼴불견이었다. 결국, 가장 아래 서랍에서 깨끗한 편지지를 찾아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글자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가정교사를 찾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해 유감이에요.]

    이 정도면 나도 이제 훌륭한 사교계의 귀부인이 아닐까 자화자찬할 수 있을 정도로 근사하게 비꼰 거 같았다. 뜻은 이랬다.

    ‘가정교사가 없어서 예의를 배우지 못한 모양이구나.’

    술을 마신 탓인지 글자가 조금 삐딱하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글자를 완성할 수는 있었다. 나는 편지를 반으로 접은 후, 뜯은 흔적이 적나라한 봉투 안에 밀어 넣었다.

    ‘예쁜 봉투에 담아서 보내기엔 아깝지.’

    밀랍을 녹여 인장을 찍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술은 깨지 않았다. 지나가는 하녀가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나 잡아다가 일을 시키자 싶어 문을 열었다.

    “나오셨습니까, 카를라 님.”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순간 어지러움에 몸이 휘청거렸다. 커다란 손이 내 등을 받쳤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부축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괜찮으십니까?”

    “테오도르 경?”

    새카만 머리카락을 한 기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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