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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0)화 (20/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20화

“오후에는 방에서 책을 읽을 예정이에요.”

저택으로 걸음을 옮기며 테오도르에게 말했다. 그는 새끼 오리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원래 호위 기사라는 건 이렇게 딱 달라붙어 다니는 건가 싶어 의아했으나, 이내 왕의 뒤에 서 있던 테오도르를 떠올리고 납득했다.

“외출 계획은 없으십니까?”

“글쎄요. 당분간은 없는데, 이제 봐야죠. 어디에 갈지 결정하고 나서 알려 드릴게요.”

나는 가볍게 흥얼거렸다. 왕과 화해했다는 소문이 퍼질수록 초대장이 무더기로 쌓일 거다. 테오도르와 함께 파티에 참석하면 왕과의 친분을 과시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쉬라는 의미로 손을 내저었으나, 테오도르는 자신을 불렀다고 생각한 것인지 바짝 다가왔다. 내 말을 듣기 위해 허리를 숙인 그에게서는 설탕 단내가 풍겼다. 어질할 정도로 달콤한 냄새였다. 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느 정도 그와 거리를 벌린 후에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쉬라는 뜻이었어요.”

그러고는 벨에게 손짓했다.

“벨, 초대장은 어디에 두었니?”

“화장대 앞에 두었어요, 마님.”

“그래. 잘했다.”

나는 뒤를 졸졸 따르다가 그대로 방 안까지 들어오려는 벨과 테오도르에게 아예 축객령을 내렸다.

“벨, 테오도르 경에게 저택을 안내해 드리렴. 경, 저는 방을 나가지 않을 테니 자유롭게 돌아보세요.”

그들을 멀리 쫓아내고, 방에서 빈둥거리는 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온 줄도 모르는 채 꽃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다. 심지어는 꽃 한 송이를 귀 뒤에 끼우고 뱅글뱅글 돌기까지 했다.

흰 앞치마가 나풀나풀 흩날리는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잘라 붙인 듯 아름다웠고 현실성이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감상하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신발 굽을 바닥에 부딪쳐 소리를 냈다.

“마님!”

굽 소리에 놀랐는지 리자가 꽃을 뒤로 숨겼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 눈치를 보았다.

“오셨어요? 시키신 대로 꽃을 꽂아 놨어요.”

나는 그녀를 흘겨보고는 숨긴 꽃을 못 본 척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그럼 이제 책을 좀 가져오련?”

“네? 책이요?”

리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는 머뭇거리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마님, 서재는 너무 어둡고 무서운걸요…….”

그녀는 가련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애원했다. 나는 냉정하게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 해가 떠 있는데 무섭기는.”

“서재는 해가 들지 않잖아요.”

리자는 머뭇거리며 서재에 가지 않으려 뻗대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무서우면 백작에게 조르라고 말하려다가 말을 삼켰다. 나는 화장대 앞에 걸터앉아 그녀를 재촉했다.

“꾀부리지 말고 얼른. 아무 책이나 좋으니 가져오렴.”

나는 리자를 쫓아내고는 창가에 놓인 화병에 다가갔다. 그녀가 가져간 것은 개양귀비였던 모양이었다. 양귀비 세 송이가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꽃잎을 쓰다듬어 보았다. 부드러웠다. 손가락에 감기는 감촉이 부드러울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잘하는 게 맞을까. 일단 저질러 놓고 생각하는 건 내 나쁜 버릇이었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뭐가 이렇게 날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후우…… 어렵네…….”

양귀비로 약을 만드는 방법은 쉽다고 들었다. 덜 여문 양귀비 열매에 흠집을 내서 그 즙을 받아 바짝 말리면 된다고. 소량을 쓰면 진통제가 되고 대량을 쓰면 마약이 된다.

물론 해 본 적이 없어 정말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그것으로 마약이 만들어진다면 무서운 일이었다.

아편이 얼마나 나쁜 물건인지는 잘 알았다.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물건이니까. 사람을 쉽게 망가트릴 수 있는 물건을 내가 만들어도 될까?

‘하지만 날 지킬 무기 하나는 있어도 되잖아.’

그러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자기합리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쓰지 않을 거야.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백작이 합방을 요구할 때, 그때 한 번만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찾아오지 못하게 그의 옆에 리자를 붙여 놓기만 하면, 그 후엔 잠자리를 거부할 강력한 명분이 생기겠지.

정말이지, 백작과 잠자리를 가지느니 죽는 게 나았다.

‘딱 한 번, 정말 한 번만 쓸 거야.’

아무리 중독성이 강하다 한들, 한 번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어느 논문에서는 행복한 세계에 사는 쥐는 약물 중독에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백작이 불륜보다 짜릿한 자극을 찾을까?

사실 둘 다 해 본 적이 없으니 뭐가 더 중독적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사색은 리자의 발걸음 소리로 인해 금방 끝이 났다.

“마님, 책 가져왔어요!”

리자는 낑낑거리며 품에 한가득 책을 들고 왔다. 그녀는 헉헉거리며 내 옆에 책을 내려놓았다.

“팔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리자는 쾌활하게 말했다. 다행히 서재에 백작이 있어 도움을 받았다며 종알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책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표지가 금박으로 장식된 로맨스 소설,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한 역사책, 여러 사람의 손을 탄 것처럼 표지를 새로 덧그린 흔적이 있는 삽화 책. 그리고 두꺼운 소설책 사이에 끼워진 얇은 책 한 권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린 듯 나도 모르게 그 책을 펼쳐 보았다. 여느 책과 다를 바 없이 이 책도 초반의 몇 장에만 손때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은 남달랐다. 이건 죽음을 부추기는 책이었다.

독약의 이름과 그 옆에 각각 다른 사람의 필체로 그어진 X자. 어느 페이지부터는 아예 넘긴 흔적이 없었다. 한 방울로 죽일 수 있다고 부추기는 아름다운 글자들.

나는 코웃음을 치며 페이지를 팔랑팔랑 넘겨 보았다. 손가락에 가장 최근에 접은 거 같은 페이지가 걸렸다.

[아까시나무꽃]

책 한편에 아름다운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흰 꽃이 주렁주렁 달린 그림이었다. 이상한 기분에 얼른 글을 훑어 읽었다.

[원하지 않는 아이를 얻었을 때, 생화 200송이를 구강 섭취한다. 향기도 효과가 있다.]

나는 리자를 바라보았다. 혹시 그녀가 읽다가 잘못 섞여 들어온 책일까? 혹시 리자가 임신을……. 리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깜빡였다.

아무리 못된 나라도 아이를 가진 사람에게 모질게 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냥꾼도 새끼를 밴 짐승은 쏘지 않는다.

임신했어? 백작의 아이를 가졌어? 그래서 백작이 꽃을 주문한 거야? 입 안에 맴도는 말을 애써 삼킨 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너도 아까시나무꽃을 먹었니?”

리자는 태연하게 말했다.

“먹고 싶었는데 남은 게 없어서 못 먹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적어도 임신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억지로 아이를 떼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백작이 그 정도 쓰레기는 아니라 다행이었다. 페이지를 다시 보니 그리 최근에 접힌 거 같지도 않았다.

‘내가 너무 깊게 생각했나.’

리자는 자기가 얼마나 꽃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토로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책을 팔락팔락 넘겼다. 다행히 다시 손가락에 걸리는 페이지는 없었다.

“마님, 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한참을 조잘거리던 리자가 물었다. 반짝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방금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이 아가씨가 알 리가 없었다. 괜히 얄미운 마음에 가장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내밀었다.

“재미없어 보이는 것만 골라 왔구나. 이거나 읽으렴.”

리자는 입을 삐죽 내밀었으나 이내 내 발치에 앉아 책 읽을 준비를 했다. 그녀는 곧장 표지를 펼쳐 들고 더듬더듬 글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나는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 * *

‘어떻게 다른 사람이 휘말리지 않게 백작에게 이걸 먹이지?’

아편은 특이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의 물살을 헤집어 깊게 묻혀 있던 지식을 긁어모았다.

독한 술에 녹여서 마시게 하거나 시가렛에 아편을 섞어 피우게 하면 좋을 듯했지만, 억지로 백작에게 아편을 먹이거나 흡입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 백작이 내가 건넨 것을 의심하거나 바로 취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머릿속으로 해결 방법을 몇 가지 생각해 보았으나 영 탐탁지 않았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잠자리를 한다면 날짜를 미리 말해 줄 거야. 그러니 우선은 만들기만 하면 돼.’

계절이 넘어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직 열매가 맺히지도 않았는데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생각을 멈추려고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리자의 낭독에 귀 기울였다.

“카타리나의 허벅지에는 숯불이 튄 흉터가 있었는데, 그건 못된 마녀가 입힌 상, 상해였습니다…….”

리자는 어려운 단어를 더듬기는 하였으나 퍽 낭랑하게 책을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이를 가르치는 유치원 선생님처럼 맑고 경쾌했다.

운명의 장난으로 만난 두 남녀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험난한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쓸모없이 긴 묘사와 지루할 만큼 화려한 미사여구로 꾸며져 있었다.

“네가 진실로 결백하다면 99일 동안 독이 든 식사를 해도 죽지 않을 거다! 기사가 근엄하게 외쳤습니다. 아, 얼마나 가혹하고 잔인한 일일까요?”

진실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여자는 독이 든 식사를 하고, 남자는 자신의 심장을 가르기까지 한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이야기가 뭐 그리 재미있는지, 리자는 신나게 책을 읽어 나갔다.

“그리하여 병처럼 깊어졌던 고…… 고독은 사라지고, 그들에게는 수, 숭? 숭고한 사랑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리자는 책을 덮고는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얼굴 위로 햇빛이 비쳤다. 그녀는 과장되게 어깨를 비틀어 대었다.

“너무 감동적인 이야기예요.”

어디에서 감동을 느낀 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으나,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리자의 눈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쩜 저 아이는 저렇게 사랑에 맹목적일 수 있을까. 아무런 증거도 없이.

“영원한 사랑을 믿어?”

“그럼요!”

리자는 해맑게 웃었다. 그녀의 머리는 정말 꽃밭인 게 분명했다. 정부 주제에 본처를 보며 영원한 사랑을 믿는다고 대답하다니, 이처럼 아이러니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한국이었으면 막장 드라마에서도 나오지 않을 이야기였다.

“저는 사랑하는 분이 주는 거라면 독이라도 마실 수 있어요!”

“그렇구나. 좋네, 사랑.”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렸다. 아까와는 달리 기분이 좋아졌다. 백작에게 아편을 먹일 방법이 떠오른 탓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나는 리자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와는 달리 딱딱하고 음침한 미소일 것이다.

“다 읽었으면 차 좀 내오련?”

백작에게 그녀를 보내겠다고 생각했으면서, 이렇게 쓰기 좋은 사람이 옆에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하다니. 만약의 경우 나를 구할 독은, 영원한 사랑을 믿는 아름다운 정부의 손에 들려 남편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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