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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9)화 (19/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9화

    “마님, 저는 빨간 꽃이 좋아요!”

    리자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테오도르는 얼굴을 굳히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내가 저지하지 않자 이내 눈을 거두었다. 리자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르고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끼어든 타이밍이 좋았어.’

    그녀의 무지는 사랑스러움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혐오스러움도 함께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빨간 꽃이면 어떤 꽃 말이니?”

    “어, 어어…… 잘 모르겠어요. 그냥 빨간 꽃이면 예쁠 거 같아요.”

    리자는 꽃은 잘 모른다며 손사래를 쳤다. 어차피 그녀를 보면 떠오르는 꽃을 심을 생각이었다. 물론 장미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것처럼 대꾸했다.

    “흠, 그럼 정원사를 불러오렴.”

    “네!”

    리자는 내가 제 말을 들어주는 줄 알고 신이 나서 자리를 비웠다. 테오도르가 넌지시 물었다.

    “장미를 심으실 겁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가볍게 웃었다. 남자들이 으레 생각하는 꽃이란 대부분 장미였으니 그도 그럴 것이라 지레짐작한 탓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장미 잼 이야기를 하셔서 여쭈어봤습니다.”

    “그러네요. 장미를 심어도 좋겠어요. 그렇지만…….”

    나는 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만큼 내게 충실한지는 몰라도, 내 계획을 백작에게 밀고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은 우아하게 감상할 꽃이 필요한 게 아니라서요.”

    나는 테오도르에게 웃어 보였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 카를라의 새카만 눈동자가 담겼다. 그는 내 분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나를 순수하게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이 남자는 진창의 밑바닥을 볼 각오가 되어 있을까. 일순 그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서 리자가 정원사를 데려오는 게 보였다. 혀끝에 설탕의 단맛이 맴돌았다. 나는 입에 남아 있던 단맛을 삼켜 없앴다.

    “마님, 부르셨습니까요.”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정원사의 손톱 사이에는 미처 닦아 내지 못한 흙이 끼어 있었고, 옷가지는 나뭇잎에 긁혀 해져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헌신적인 사용인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대를 이어 저택에서 근무하고 있는 정원사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꽃을 심고 싶은데.”

    정원사는 반색하며 공손히 대답했다.

    “원하시는 꽃이 있으십니까? 뭐든 말씀만 하시면 구해 오겠습니다.”

    그는 귀족 마님들이 얼마나 억지를 잘 쓰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어느 정도의 바람이라면 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원하는 꽃의 생김새를 묘사했다.

    “붉은 꽃이네. 중앙에는 조금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어. 가장자리는 톱니 모양으로 들쭉날쭉했지.”

    그러고는 덧붙였다.

    “어디서 얼핏 보았는데 꽤 예쁘더군. 알다시피 우리 정원에는 꽃이 없지 않나. 이왕 심을 거, 흐드러지게 심고 싶어서 말일세.”

    “오피온 말씀입니까? 목장에서 보셨나 봅니다.”

    정원사는 놀라지 않았다. 의심하지도 않았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고는 천진난만하게 들리기를 바라며 말했다.

    “목장에? 말들이 먹나?”

    정원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꽃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없는 철없는 안주인에 대한 친근감이었다. 무례한 일이었으나 괜히 그를 질책해 반감과 경계를 살 필요는 없었다.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이구, 말들도 안 먹습니다. 돈 없는 집에서나 샐러드로 좀 해 먹지, 쓰고 맛이 없어서 먹을 건 영 못 됩니다. 관상용이지요. 목장에서는 보기 좋으니 일부러 뽑지 않는 정도지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원하는 꽃이 맞을까. 내가 고민하자 정원사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저어기, 후문 구석에 몇 송이 자란 게 있을 겁니다. 뽑아 올까요?”

    “그러게.”

    그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정원사로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일 터였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뽐낼 수 있어 들뜬 거 같았다. 정원사는 곧 손에 몇 송이의 붉은 꽃을 쥐고 돌아왔다.

    “이 꽃이 맞으십니까?”

    그건 내가 원하던 꽃이 맞았다. 그러나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 꽃을 훑어보았다. 붉은 꽃은 아름다웠다.

    삼천 명분의 총애가 한 사람에게 내렸다는 말이 과하지 않다는 여인의 이름을 딴 꽃. 홀리는 순간 인생이 망가질 수 있는 꽃.

    나는 이 정원을 양귀비로 덮어 버릴 생각이었다.

    * * *

    덜 여문 양귀비는 예뻤다. 탐스럽고 풍성한 꽃잎은 부드러웠다. 아직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닌지 그것들은 꽃봉오리를 막 터트린 모양으로 멈추어 있었다. 개양귀비가 하나 섞여 있었지만 세 개는 양귀비가 확실했다.

    “흠, 이 꽃이 맞는 거 같기는 한데…….”

    정원사의 애를 바짝 태워야 했다. 내 의도를 그가 파악하지 못하게. 그저 꽃을 심느냐 심지 않느냐만이 그의 관심사가 되어야 했다.

    양귀비가 다른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어야 했고, 몇 송이 빼돌리는 것 정도는 의심하지 않아야 했다. 나는 적당히 고민하는 척 연기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심을지는 자네가 잘 알 테니 관여치는 않겠네. 그래도 너무 천박하지 않게, 꾸민 듯 아닌 듯 심게. 필요한 건 내일 집사에게 요청해.”

    정원을 꾸밀 예산을 머릿속으로 두드렸다. 흔한 꽃이라고 했으니 예산을 많이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이기는 하였으나, 백작이 내 생각을 눈치챌 거 같지는 않았다. 나는 턱을 빳빳하게 들어 올리고 원하는 말을 모두 끝냈다는 듯, 심드렁하게 명령했다.

    “기껏 뽑은 꽃은 아까우니 내 방에 장식해 두렴.”

    “네!”

    리자가 해맑게 말했다. 그녀는 내가 제 말을 들어준 게 기뻤는지 곧장 정원사에게 다가가 종알거렸다. 정원사는 리자가 가져가기 쉽게 뿌리와 잎을 정돈해 주었다.

    그녀는 기뻐하며 꽃을 받아 들었다. 정돈하였다고는 하나, 아직 흙이 묻은 꽃을 아랑곳하지 않고 받는 모습이 천진난만했다.

    “아이, 예뻐라!”

    리자는 꽃을 가득 품에 안고 종종걸음으로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듯 시선을 내렸다.

    무얼 보냐고 물으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의 새카만 속눈썹이 흔들렸다. 아주 잠시간의 침묵 끝에 그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찬 바람을 오래 맞으시면 몸이 상하십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테오도르는 손가락 끝으로 꽃이 담긴 그릇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매끄러운 그릇에 난 흠이라도 찾는 것처럼.

    “종종 가난한 자들이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해 오피온 열매를 씹는 모습을 본 적 있습니다.”

    그는 나를 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러나 충분히 예의 바른 태도로 말을 이었다.

    “카를라 님을 오래 뵙지는 않았으나, 꽃을 즐기시지 않는 분이 부러 심는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 보아……. 위대한 분께서 카를라 님을 보호하시길.”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무언가 특이한 손동작을 했다. 이 세계의 손동작을 다 알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행동은 명백했다. 성호를 그은 거다.

    그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곳에도 양귀비, 아니 오피온이 여러 용도로 쓰이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이건 내가 쓸 게 아니었다.

    “글쎄요. 어떨까요.”

    부러 모호하게 대답하자,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입가를 끌어 올리고 방긋 웃었다. 카를라의 얼굴은 단단하게 굳어 있어, 뺨이 쉽게 당기고 피로해졌다.

    그래도 그녀로 몇 달을 지냈더니 그럭저럭 귀족 부인 같은, 그러니까 남들 보기에 그럭저럭 못나지는 않은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게 됐다.

    그럼에도 테오도르는 뺨을 붉혔다. 이 쉽고 귀여운 기사님 같으니라고.

    “경이 신경 쓰실 일은 아녜요.”

    “주제넘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경의 사과는 정말 값싸군요, 비아냥거릴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와 있으면 어쩐지 자꾸만 못된 여자가 되려고 했다. 그를 상처 입히고 괴롭히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상처받은 듯, 눈을 내리깔고 시무룩하게 내 용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내 안위를 걱정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린아이가 내미는 손을 매정하게 뿌리친 기분이었다. 내게도 양심이라는 게 있었는지, 가슴팍이 따끔거렸다.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아프지 않아요. 그냥 만약을 위해서 가지고 있는 거예요. 어디에 쓸지는…… 나중에,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그렇게 들렸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테오도르의 고개가 더 내려가는 일은 없었다.

    그가 계획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나를 말릴 수 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그때는 들어 주시겠어요?”

    테오도르가 힘차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나는 그를 보며 다시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곧 입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언뜻 테오도르가 무어라 말을 건네려고 하는 게 보였으나, 나는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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