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8화
백작가의 정원과 테오도르는 무척 잘 어울렸다. 잘 관리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마치 태어나기를 귀족가에서 태어난 거 같았다.
내 앞에 자리를 잡은 그는 이 풍경과 조금의 위화감도 없었다. 그를 훔쳐보느라 굼뜨게 움직이는 리자의 행동이 이해될 정도였다.
벨은 둥글고 납작한 접시에 물을 붓고 그 위에 막 피어난 꽃을 띄웠다. 솜씨 좋게 가지 아래를 바짝 잘라 물에 담가 놓은 덕분에 꽃은 물기를 머금은 그대로 생생하고 부드러웠다.
포도처럼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꽃 덕분에 식탁이 밝아졌다. 금방 피어난 듯 화사한 꽃이었으나 향기만은 가까이에서 맡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옅고 희미했다.
“카를라 님은 꽃을 좋아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즐기지 않아요.”
그건 오롯하게 카를라의 성정을 대변한 대답이었다. 나는 꽃을 꽤 좋아하는데, 그렇게 대답하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백작가의 정원은 나무와 수풀로 단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으나 꽃은 한 송이도 없었다. 그것은 정원이 여주인의 취향을 그대로 담아낸 덕분이었다.
대를 이어 저택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정원사가 얼마나 성실한지, 그는 손질을 하루도 빼먹는 법이 없었다.
기력이 넘쳐 한해살이 식물을 심겠다고 하는 걸, 한 철 보자고 매년 새로운 꽃과 풀을 심는 건 낭비라고 생각해 예산을 줄였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을 정도였다.
정원을 한번 훑어보았다. 푸르기만 한 정원은 어찌 보면 삭막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이 꽃은 저택의 정원에서 나지 않는 종류였다. 나는 벨을 바라보았다.
“어제 백작님께서 꽃 튀김을 드시고 싶다 하셔서…… 주방에서 조금 얻어 왔어요. 아까시나무의 꽃이에요, 마님.”
“그래. 예쁘구나.”
벨은 잠시 머뭇거리기는 하였으나 또박또박 꽃의 출처를 알렸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나는 짐짓 눈을 식사로 돌렸다.
테오도르는 식기를 매우 우아하게 다루었는데, 빵을 뜯을 때나 고기를 썰 때도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수프, 빵, 양고기와 베이컨, 구운 달걀과 튀긴 꽃, 파이까지 그는 가리지 않고 먹어 치웠다.
그의 예법은 우아했으나 먹는 모습은 퍽 호쾌했다. 사람이 잘 먹는 걸 보는 건 언제든 뿌듯하고 기쁜 일이었다.
“식사가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네요.”
테오도르는 주변을 한번 훑고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는 양 속삭였다.
“폐하께서 주방장을 탐내실까 무서울 만큼 근사합니다.”
나는 그가 농담할 줄 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는 내가 당황하는 얼굴을 보더니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그러다가 이내 제 손가락으로 입가를 더듬기 시작했다.
나는 곧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렸는데, 벨과 리자가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볍게 스푼으로 물 잔을 톡, 쳐서 주의를 주었다. 벨은 금방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 시중을 들었으나, 리자는 허둥지둥 눈을 돌리다가 이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몸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이내 눈에 띄게 고개를 숙였다.
‘뭔가 있군.’
리자의 행동이 눈에 띄었지만 나는 굳이 그녀를 떠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백작의 지시일 게 뻔했다. 나와 테오도르가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듣고 보고하라거나, 그런 지시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런 일을 하기엔 리자는 너무 눈에 띄었다. 햇빛에 반사된 금발은 금실로 짠 듯 아름다웠다. 고운 피부, 화사한 미소, 반듯한 이마와 큼직한 눈동자, 부드러운 콧방울과 도톰한 입술, 사슴같이 가느다란 목과 동그란 어깨…….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테오도르를 다시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그의 시선은 오롯하게 접시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참된 기사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둔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백작과 이야기하던 모습을 되짚어 보면, 아무래도 후자에 가까운 듯했다. 완전히 평온을 되찾은 벨이 내게 물었다.
“마님, 후식을 가져올까요?”
“그렇게 해.”
벨은 곧장 자리를 떴다. 나는 다시 접시를 바라보았다. 내 식기는 버터가 조금 묻은 것 빼고는 식사를 하기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무언가를 먹었다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깨끗했다.
얼른 꽃 튀김을 접시에 올려놓고 먹는 시늉을 했다. 바삭하고 향긋했다. 그러나 입맛이 도는 건 아니라 금방 식기를 내려놓고 식사를 물렀다. 카를라의 몸은 식욕이라는 게 전혀 없는 거 같아 간혹 고통스러울 때가 있었다.
“마님, 더 안 드세요?”
리자가 예의 없이 툭 물었다. 나는 지적하려다가 한숨을 쉬었다. 호위 기사기는 하나 손님의 앞에서 하녀를 문책하는 것도 보기 흉할 거 같아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테오도르는 한가득 담겨 있던 꽃 튀김을 몽땅 먹은 참이었다.
“마음에 드신 거 같아 다행이군요.”
“예. 꽃을 먹는 건 처음이라.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나도 처음이었다. 진달래 전이나 화전을 몇 점 먹어 보기는 했으나 꽃 튀김은 이 세계에 넘어와서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그런 티를 낼 수는 없어 입가를 끌어 올리고 여유 있는 척 굴었다.
“장미로 잼을 만들기도 하는걸요.”
“그렇습니까? 장미 열매는 본 적이 없어 몰랐습니다.”
“어머, 장미 잼은 장미꽃으로 만든답니다.”
나는 입가를 가리고 웃었다. 나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큰 남자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취급하며 놀리는 게 재미있었다.
다행히 내가 그를 더 놀리기 전에 후식을 가지러 떠난 벨이 큼직한 트레이를 가지고서 돌아왔다.
“마님, 푸딩을 가져왔어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신 거 같아서요.”
벨이 가지고 온 건 크렘브륄레였다. 상아처럼 흰 그릇에 담긴 크림 위로 바삭바삭하게 탄 설탕 막이 보였다.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달아 보였다.
한 스푼 푹 떠 입에 넣으면 아래에 있는 달콤한 커스터드 크림과 딱딱하게 캐러멜화된 윗면의 설탕 코팅이 달콤하게 섞일 거다. 나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디저트는 언제 받아도 신나는 선물이었다.
“어머, 예뻐라.”
그릇은 테오도르의 앞에도 놓였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면 귀여운 구석이 많았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생겼지만, 눈매가 순해 날카로워 보이지 않았다. 입술은 살짝 도톰하고, 턱선은 또렷하다. 하관이 도드라지지 않은 건 아직 어려서 그런가.
목 밑으로 보이는 제복이 말쑥하니 잘 어울렸다. 견장을 올려놓은 어깨는 넓고, 가슴팍은 옷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탄탄했다.
‘잘생긴 남자가 몸도 좋아.’
소매 끝으로 나온 손목뼈가 두드러진 것을 봐서는 뼈대 자체가 굵은 건지도 모른다. 테이블 아래에 가려진 다리는 늘씬하니 쭉 뻗어 있었는데, 허벅지가 특히 굵어서 힘깨나 쓸 법해 보였다.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는 언제 보아도 사람을 흐뭇하게 했다. 빤히 보고 있자니 테오도르가 제 얼굴을 더듬었다.
“카를라 님, 제 얼굴에 무엇이 묻었습니까?”
“아뇨.”
“그렇다면 왜…….”
“잘 드시길래요.”
나는 가볍게 말했다. 그러자 성기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귓가는 잘 익은 사과같이 새빨갛게 변해서, 그대로 녹아내릴 거 같았다. 앳된 얼굴에 쓰고 있던 냉정한 표정이 사라지자 그는 더욱 어려 보였다. 귀여웠다.
“어머, 지금 부끄러움 타시는 건가요?”
그는 눈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말했다.
“너무 놀리지 마십시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를 놀리는데 재미가 들릴 거 같았다. 나는 순진한 청년을 마저 놀리려 입을 열었다.
“저는 그냥 테오도르 경이 잘 드신다고 한 것뿐인걸요.”
여상스럽게 말하면서 그를 보고 키득거렸다. 벨도 웃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테오도르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카를라 님처럼 아름다운 분이 그렇게 보시면…… 평정심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 말에 나는 당장 테오도르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그는 참된 기사인 것도, 둔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냥 미적 감각이 독특한 사람이었다.
지뢰를 밟은 기분이었다. 왕에게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아도 이러지는 않을 텐데. 그는 어마어마한 소리를 뱉고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리자도 벨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는지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마님이 예쁘다고? 말도 안 돼.”
리자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벨이 리자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굳이 그녀를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카를라는 이 세계가 선호하는 화려한 미인상은 아니었다.
‘미쳤나?’
미심쩍게 테오도르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표정에서 기만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푸른 눈동자가 무서울 정도였다.
“진중한 분이신 걸 제가 깜빡 잊었군요.”
그의 말을 대강 넘기려고 애쓰며 숄을 단단히 여몄다.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데도 등에 한기가 서렸다. 그런데도 얼굴은 홧홧하게 뜨거웠다.
분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근사한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는 것만큼 낯뜨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그것이 인사치레라도 부끄러울 마당에 진심으로 하는 말을 뻔뻔하게 주워 삼킬 수야 없는 일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정원을 스치며 지나갔다. 동시에 햇빛이 더욱 강해졌고, 동공으로 더 많은 빛이 스며들어 왔다.
분명 그래서였을 거다. 테오도르의 흑발이 눈부시게 빛나 보였던 건. 나는 나지막이 탄성을 뱉었다.
“아…….”
그 목소리를 들은 테오도르가 눈을 마주 보았다. 나는 황급히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정원에 꽃을 심어도 괜찮겠네요.”
내가 생각해도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갑자기 떠오른 것치고는 그럴싸했다.
“꽃을요.”
테오도르가 반박자 늦게 대답했다.
“네. 곧 바빠질 테니, 그 전에 정원을 좀 가꿔 볼까 해서요.”
귀부인들이 꽃을 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동안 휑했던 정원이니, 변덕을 부려 꽃을 조금 심는다고 의심을 받지는 않을 거다.
“좋은 생각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