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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7)화 (17/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7화

“백작님께 인사를 드릴 테니 자네는 상자를 방으로 옮기게. 폐하의 선물이니 조심히 다루도록 해.”

테오도르에게 방을 안내하기 전에 우선 백작의 얼굴을 보아야 했다. 나는 인상을 구기지 않도록 애쓰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백작은 홀을 서성거리다가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눈을 돌려 리자를 찾았다.

“늦었군.”

그는 불퉁한 태도를 숨기려고 하지도 않고 뱉었다.

“그간 쌓인 이야기가 많아 시간 가는 줄도 몰랐어요.”

나는 몸을 반쯤 비틀어 백작이 뒤따라 들어오는 테오도르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도록 했다. 아직 저택의 주인은 백작이었고, 그가 정식 손님으로 받아들여야 식객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백작이 불평하기 전에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폐하께서 제가 걱정된다며 기사님을 보내 주셨어요.”

백작은 테오도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내비치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경계의 빛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폐하께서?”

백작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어기고 테오도르를 내치거나 식객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입술이 씰룩거리는 것을 못 본 척, 대답했다.

“네에.”

나는 일부러 말을 길게 늘이며 고개를 왼쪽으로 까딱였다. 리자의 흉내를 내 종달새처럼 고개를 갸웃거리자 백작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렇군. 집사에게 신경 쓰라고 이르겠소.”

그 말은 테오도르를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백작은 심기가 뒤틀렸는지 조롱을 덧붙였다.

“폐하께서도 한가하신가 보군.”

“그만큼 평화로운 거죠.”

나는 비아냥거리는 백작에게 마주 비아냥거렸다. 방금 저 말에 트집을 잡아서 감방에 넣을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테오도르를 힐끔거렸다.

그의 무덤덤한 표정을 보자니 짜증이 얼마간 가라앉았다. 하긴, 왕도 할 수 없는 일이니 백작의 목이 아직 붙어 있는 거지. 치워 버릴 수 있었다면 카를라가 결혼하겠다고 통보했을 때 진작 그렇게 했을 터였다.

백작은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자, 테오도르를 노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그는 얄밉게 말을 던졌다.

“폐하도 너무하시군. 이런 보잘것없는 곳에 기사를 보내시다니.”

“어머, 우리 정원사가 울겠어요.”

“하하, 우리 저택의 정원도 근사하지만, 좀 더 즐거운 곳도 있잖소. 뭐, 어디든 여기보다는 눈이 즐거울 테지.”

그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 나를 훑어보았다. 오호라, 이렇게 굴겠다 이거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입을 열고 말했다. 아니, 말하려 했다.

“제 눈은 신께 바친 것이니, 사사로이 즐거움을 쫓을 수는 없습니다.”

테오도르의 딱딱한 대꾸에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성기사였냐,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신전의 규율이 그리 엄격하지는 않을 텐데…… 낭만적인 꿈을 꾸는 것까지 막을 수야 있나. 젊은 기사의 의무는 아름다운 레이디를 지키는 게 아니겠나?”

백작은 은근슬쩍 나를 깎아내리려 애썼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무너지지 않았다. 애초에 이게 기 싸움이라는 자각도 없는 듯했다.

“제게 주어진 임무는 폐하의 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백작은 쳇, 하고 혀를 찼다.

“그대는 꽤 뻣뻣하군그래.”

테오도르가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성이 난 모양이었다. 테오도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그가 백작의 속을 뒤집어 놓은 건 확실했다.

속으로 무뚝뚝한 성기사에게 잘했다고 마구 칭찬을 날렸다. 내가 나서서 속을 좀 더 긁을 필요도 없었다. 테오도르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렇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모시는 건 처음이라 긴장한 거 같습니다.”

그는 순진하게도 목덜미를 가볍게 긁기까지 했다. 백작의 의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말투였다.

백작은 내가 박색이라 아쉽지 않으냐고 물었는데, 내가 예쁘다고 대답했으니. 여기서 거짓말을 한다고 트집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작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기사님께서는 말씀도 잘하시는군요. 칭찬으로 배가 불러 며칠은 식사를 건너뛰어도 되겠어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먼저 선수를 쳤다. 백작이 머리를 굴릴 시간을 줘서는 안 되었다.

“그렇지 않나요, 백작님?”

그는 흥미가 식었다는 듯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피곤할 텐데 이만 쉬시오.”

그는 리자와 눈 장난을 치는 것도 잊고 휑하니 제 방으로 들어갔다. 토라졌다고 시위하는 꼴이 우스웠다. 손도 대지 않고 이긴 기분이었다.

나는 킬킬 웃으며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테오도르 경.”

“예.”

“경과는 좋은 우정을 쌓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자리를 뜰 준비를 하자 벨과 리자가 다가와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벨, 테오도르 경의 잠자리를 봐 드리렴.”

“네, 마님.”

“저어, 마님, 제가 기사님의 시중을…….”

리자가 고개를 올려다보며 슬그머니 말을 붙였다. 그러자 벨이 그녀의 팔뚝을 꼬집어 눈치를 주었다. 리자는 몸을 크게 떨고는 입을 다물었다.

안주인이 정한 일에 불평하는 것은 하극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다시 내게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손등을 살살 쓰다듬는 것을 보니 다시 아픈 꼴을 당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내일 뵈어요.”

“위대한 분께서 카를라 님의 밤을 지켜 주시길.”

테오도르는 내게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벨의 안내를 받아 저택 깊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길고 복잡한 미사여구 때문일까, 팔뚝이 간지러웠다.

복도의 어둠이 그를 인도하는 불빛마저 삼킨 후에야 나는 자리를 뜰 수 있었다.

* * *

테오도르는 아침 일찍부터 나를 찾아왔다. 벨이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줄 무렵이었다. 그는 엄숙한 태도로 내 사적인 공간에 어디까지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깊숙한 침실은 보여 줄 수 없지만, 문과 가까운 화장대 정도는 허락할 만했다.

“기상하시는 시간에 맞춰 대기하겠습니다.”

그는 매우 깍듯했다. 왕을 호위하던 기사라 그런지 시간에 칼 같은 면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잘생긴 미남을 보는 건 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거 같았다.

“저는 일어나는 시간이 규칙적이지 않아요.”

“그럼 기상하실 때까지 문 앞에서 대기해도 되겠습니까?”

에둘러 거절했으나 고지식한 기사는 내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았다. 나는 직설적으로 뱉었다.

“과해요.”

벨은 거울 너머로 테오도르를 힐끗힐끗 훔쳐보면서도 조금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한 번 정도는 벨과 눈을 마주쳐 줄 법하건만, 그는 반듯하게 서서 나만 바라볼 뿐이었다.

“여기는 궁이 아닌걸요. 폐하의 명령이 있었지만,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좋아요.”

“저는 카를라 님의 호위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테오도르는 정말이지 꽉 막힌 사람이었다. 결국 그를 평범하게 회유하기를 포기하고 명령처럼 뱉었다.

“그럼 해가 뜰 때부터 제가 침대에 누울 때까지만요. 성기사님도 주무셔야 할 테죠?”

마지막 말에 이르러서는 빈정거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테오도르는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본으로 머리카락을 장식하던 벨에게 불똥이 튀었다.

“벨, 오늘 아침은 정원에서 먹자꾸나.”

갑자기 업무가 늘어난 벨이 손을 멈추었지만 웃는 낯을 잃지 않고 대꾸했다.

“숄을 가져올까요? 아직 이슬이 맺혀 추울지도 몰라요.”

“그러렴. 아, 테오도르 경의 몫도 함께 가져오겠니?”

“네, 마님.”

테오도르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카를라 님, 호위는 식사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지요?”

“식사에 정신이 팔려 호위 대상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궁의 예법인가요?”

“그렇습니다.”

나는 거울 너머로 테오도르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테오도르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나를 왕처럼 취급하는 건 반역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가 왕으로 대할 자는 왕으로 충분했다.

“실언했습니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우리 정원사는 꽤 솜씨가 좋답니다. 주방장은 말할 것도 없고요.”

나는 그를 윽박지른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제멋대로 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종일 나를 따라 움직여야 할 사람에게 밥 한 끼 대접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테오도르가 눈을 휘어 웃었다.

“예, 기대됩니다.”

꽃이 만개하는 것같이 화사한 표정이었다.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획, 하고 고개를 돌렸다.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었으나 그에게 얼굴을 보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카를라는 유부녀였다. 그를 보고 감탄해서는 안 되었다. 이유를 모르는 벨은 내 기분이 상했는지 눈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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