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6화
때맞춰 시종이 왕의 앞에 넓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내 앞에도 그와 같은 그릇이 놓였는데, 금색이 아니라 은색이라는 것만 달랐다.
왕은 그릇에 손을 담그고 찰박찰박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눈치껏 그녀를 따라 했다. 시종들은 조금 당황하는 듯하더니, 왕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장난을 친다고 여겼는지 이내 평온한 얼굴로 그릇을 치웠다.
“그대가 좋아하는 것들만 차려 놓으라고 했네.”
“저를 응석받이로 만드실 모양이시군요.”
“우리가 다시 만난 기념이야.”
나는 그녀의 말에서 깊은 슬픔이 묻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부러 눈을 돌려 테이블 위로 끝없이 놓이는 접시들을 훑어보았다.
수프만 다섯 종류였다. 하나씩 다 맛을 보았다. 콩소메, 당근, 향신료 맛이 강하게 나는 카레, 닭고기, 쌀죽까지. 다행히 내가 못 먹는 음식은 없었다.
카를라가 좋아하는 음식은 나도 좋아해야 한다. 누군가 오늘처럼 알아차릴 수도 있으니. 왕의 배려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수프에 맞췄는지 고기 요리도 종류가 많았는데, 여섯 가지나 되었다, 소스를 바른 송아지 구이와 큼지막한 칠면조, 버섯과 함께 구운 소시지, 새끼 토끼, 멧돼지와 염소 뒷다리까지 나왔다.
내가 그것들을 훑어보고 어느 것에 먼저 손을 대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왕이 다시 말했다.
“생선이 왜 없냐고 물을까 봐 미리 말하건대, 그대가 좋아하지 않는 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 주방장의 사직서를 받겠다고 했지. 오, 카를라. 그대의 잔소리가 벌써 들리는군. 그래도 격식이라는 게 있지 않나요? 내 대답은 이렇소. 짐이 곧 법이니라.”
와인을 따르는 시종에게 시선을 한번 주었다가 왕을 바라보았다. 왕은 재미있는 농담을 했다는 듯 킬킬거렸다.
카를라는 생선을 싫어하지만, 일부러 가려 먹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좋은 정보였다. 저택의 식탁에는 생선이 자주 올라와서 고통스럽던 참이었다.
아마 제가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편식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나 보지. 일기장에서는 그렇게 어른스럽게 굵던 카를라에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속으로 조소했다.
‘애도 아니고.’
그래도 앞으로는 조금씩 생선을 멀리해도 될 거 같았다. 다행인 일이었다.
새로 올라온 접시를 훑어보았다. 튀긴 토마토와 양파, 베이컨으로 감싼 삶은 달걀, 소스에 버무린 오이, 고기 파이, 레몬과 사과로 장식한 샐러드, 거위 간, 삶은 시금치, 구운 가지와 다진 고기…….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어도 손이 꽤 많이 가는 요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을 조금씩 맛보며 카를라가 좋아하는 게 내가 좋아하는 것과 대다수 일치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왕은 디저트가 나오자마자 시종들을 모두 물렸다. 그들은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사라졌다. 성기사인 테오도르만이 떠나지 않고 내 뒤를 지켰다.
“그럼 이제 사업 이야기를 해 볼까.”
어마어마한 디저트에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했던 차에 잘되었다 싶어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돈이 필요하다고 했지.”
“네, 폐하. 아주 많이요.”
“그럼 카지노은 어떤가.”
나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눈만 깜빡였다. 왕이 말한 거니 그냥 카드놀이나 하는 곳은 아닐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주 크게 열어 주지. 물론 기본 자금은 모두 부담하지. 왕실이 나서서 도박을 조장하면 보기 좋지 않으니 그대의 이름을 빌리는 것처럼 하는 건 어떤가?”
입 밖으로 나오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놀라 방금 무엇을 먹었는지도 잊을 거 같았다.
“그래도 되나요?”
왕은 킬킬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만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야. 어차피 귀족들의 불만을 한번 잠재워 줄 필요가 있었어. 유흥거리를 던져 줘야 덜 짖어 댈 게 아닌가.”
그녀는 어차피 세워 놓은 계획으로 겸사겸사 나를 도와준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그 권유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국책 사업이나 다름없는 일을 내게 주겠다는 소리였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폐하.”
“왜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밝은 얼굴로 웃었다.
“감사해요.”
왕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 표정은 화를 내는 거 같기도, 어쩌면 우는 거 같기도 했다.
“앞으로 내게 감사 인사는 하지 말게.”
“왜냐고 물어봐도 되나요?”
“카를라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왕은 왕관 모양의 설탕 과자를 나이프로 부쉈다. 내게 웃어 주고 있어도 그녀는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거 같았다. 나는 그녀의 기분을 바꾸기 위해 카지노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카지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요, 폐하. 무슨 게임을 하나요? 카드?”
왕은 카를라와 전혀 다른 말투로 조르는 나를 비웃고는 입을 열었다.
“생각해 낸 게 고작 카드 게임이라니. 어지간히 도박과 연이 없나 보군.”
“경마도 알아요.”
“경마? 새로 만든 카지노에는 별별 게임을 다 모아 놓을 거야. 그대가 들어 본 적이 있을지는 모르겠군. 룰렛, 주사위, 판탄, 미니 경마…….”
왕은 손가락을 꼽아 가며 내게 도박 종류에 대해 말해 주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아는 카지노와 흡사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너무 일이 커지는 거 같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폐하, 기껏 만든 곳인데 게임만 즐기게 하다가 돌려보낼 생각이세요?”
“그럼?”
왕은 부순 설탕 과자를 집어 먹기 시작했다. 대통령에게 작전 보고하는 장군의 마음이 이럴까. 아니지, 그것보다는 이게 더 떨릴 게 분명했다.
대통령은 사람 마음대로 죽이면 안 되지만 왕은 죽일 수 있잖아. 후우, 짧게 숨을 뱉었다.
“한 놈 파산시키나 열 명 파산시키나 그게 그거일 거 같은데, 이왕 일 벌이는 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있으면 한 번에 보내 버리시죠.”
“흠, 어떻게?”
“그러니까, 이런 건 어떨까요…….”
간단히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늘어놓았다. 왕은 곰곰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그저 이론일 뿐인 이야기에 현실성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과자를 해치우는 것도 잊고 한참을 떠들었다. 나는 계획에 푹 빠져, 이야기를 끝낼 때쯤에는 이게 누구를 위한 복수인지도 잠시 잊고 말았다.
“그대가 카를라와 닮지 않았다는 말을 했던가.”
왕은 아주 천천히 나를 훑어보다가 빙긋 웃었다.
“취소하지. 그대는 누구보다 카를라와 닮았어.”
* * *
식사를 끝내자 창문 밖은 새카맣게 물들어 있었다. 어둑한 하늘에 별이 하나씩 존재감을 드러냈다. 우리는 아쉽게 자리를 파했다.
왕은 내게 줄 게 있다며 시종을 시켜 선물을 가져오게 했다. 스무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상자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나는 거듭 사양했으나, 그녀는 어차피 카를라에게 주려고 한 거였다며 테오도르에게까지 상자를 쥐여 주었다.
다양한 상자는 무게도 제각각이었다. 개중 큰 것을 옮기려 하자 테오도르가 재빨리 내가 고른 상자를 들어 올렸다.
“자주 얼굴을 비춰 주게.”
“네, 폐하.”
복도에서 한나절을 넘게 기다리고 있던 리자는 내가 왕과 다정히 이야기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큼지막한 상자를 안아 들고 나를 따라오며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마님, 이 기사님께서 저희를 저택까지 호위해 주시는 건가요?”
대꾸해 주면 끝없이 말이 늘어질 것을 알기에 짐짓 그녀의 말을 무시했지만, 피곤하지도 않은지 리자는 마차를 탄 후에도 계속해서 떠들어 대었다.
“마님, 상자 안에 뭐가 들었을까요?”
귀찮아질 만한 질문엔 대답하지 않는 게 좋았다. 왕의 선물은 하나같이 흰 상자에 담겨 있었는데, 리본 또한 흰색이었다.
가장자리의 빛바랜 구석만 제외한다면 눈이 부실 정도로 희었다. 내가 무시하자 리자는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흰 리본으로 머리를 묶으면 정말 예쁠 거예요. 그렇지요? 너무너무 부러워요.”
그녀는 나를 힐끔거리며 계속 리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옜다, 하고 하나 쥐여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니, 리자가 아니라 다른 하녀가 졸라 대어도 리본은 줄 수 없었다.
이건 결혼 선물이다. 적어도 이 년은 손대지 못한 게 분명한. 카를라에게 주어야 했던 선물을 내게 주며 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씁쓸한 기분이 들어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상자에 손가락 하나 댈 수 없었다.
“아우! 피곤해!”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리자는 큰 소리를 내며 마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마부는 당황하며 다시 나를 부축하려 했지만, 테오도르가 더 빨랐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쥐고 마차 아래로 조심스럽게 내렸다.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집사와 벨의 시선이 테오도르에게 닿았다. 둘 다 입을 벌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다행히 집사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반겼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래 돌아오시지 않아 걱정하셨어요.”
그녀의 말에 작게 혀를 찼다. 나를 기다린 게 아니라 함께 간 리자를 기다린 것이 분명한데도 뻔뻔하게 말하는 집사가 가증스러웠다.
나는 그녀를 흘겨보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집사는 기죽지 않고 다시금 공손하게 물었다.
“문양이 없는 마차를 준비할까요?”
궁에서 보내온 기사니, 다시 왕궁으로 돌아간다면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를 준비하는 게 예의였고, 그대로 퇴근한다면 왕실과 백작가의 일이 끝난 셈이니 문양이 없는 마차를 태우는 것이 옳았다.
예법서를 달달 외울 정도로 들여다보았지만, 한 번씩 이 세계의 상식은 나를 헷갈리게 했다.
벨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와 기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갈색 눈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평소 새초롬한 표정을 유지하던 그녀가 한껏 들떠 있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나는 집사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 폐하께서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셨으니, 당분간은 저택에 머물 걸세.”
어머! 하고 벨이 입을 틀어막았다. 기뻐하는 게 당연했다. 저택에는 제대로 된 기사가 없었다. 백작의 사병이 몇 있기는 하였으나, 성기사만큼 각이 잡힌 기사는 없었다.
제복을 입은 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기사는 언제 어디서나 환영받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