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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5)화 (15/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5화

“어떻게요?”

나는 말을 뱉는 순간 내가 멍청한 소리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대는 왕이었다. 이 신분제 사회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백작 부인이 부리는 하녀만 해도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데 왕은 어떻겠는가. 돈도 많겠지. 그녀가 가진 돈과 인력이면 안 되는 것도 어떻게든 할 수 있게 될 테다.

왕은 내 표정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 밑엔 유능한 자들이 많아.”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지. 카를라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데 말이야.”

왕은 큭, 하고 비웃음까지 날렸다. 한쪽 입꼬리만 올리는 얼굴까지 퍽 아름다웠다.

나는 혀를 찼다. 세상은 불공평했다. 이왕 빙의시켜 줄 거, 저런 사람한테 빙의시켜 주면 얼마나 좋아. 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카를라도 말을 썩 잘 타는 편은 아니었다던데요.”

“그래도 낙마는 안 했어.”

나는 툴툴거렸다. 승마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으니 그 정도면 처음 타는 것치고는 잘 탄 거라고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그리고 내가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은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었다.

“어머나, 저도 낙마한 적은 없답니다. 보세요, 멀쩡한걸요.”

뻔뻔하게 거짓말을 뱉자 왕의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옮겨 왕의 뒤에서 시침을 떼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저 멀리 두고 있었지만, 입술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왕은 아주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폐하, 저 무례한 기사를 계속 자리에 두실 생각이신가요?”

“그대는 카를라도 아니면서 꼭 그 애처럼 자존심을 세우는군. 그대가 떨어진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나.”

그제야 기사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까부터 기시감이 들던 잘생긴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았다. 새파란 눈, 앳된 얼굴, 그을린 곳 없이 새하얀 피부…….

머릿속에 어떤 남자가 휙, 하고 지나갔다. 근사한 제복을 입고 나를 구해 준 기사 말이다.

“하지만…… 그때 그 기사는 금발이었는데.”

말에서 떨어지는 나를 구해 준 남자는 금발이었다. 선명한 금발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저렇게 짙은 흑발이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젓자 기사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폐하,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레이디, 아니, 부인께 설명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좋아.”

“검은 머리는 눈에 띄어서…… 평소에는 가발을 쓰고 있습니다.”

검은 머리가 눈에 띈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명확했다. 나는 지금 내가 말에서 떨어진 것을 받아 준 남자를 앞에 두고 허세를 부린 거다.

부끄러워 죽고 싶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성기사들이 귀부인들과 음란한 행위를 한다는 제보가 들어와 순찰하던 중이었습니다. 신전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맹세코 폐하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이 일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성기사?”

그가 내 추태를 왕에게 보고했다는 사실보다 다른 단어가 먼저 귀에 들어왔다.

성기사라는 건 신전의 기사라는 뜻일 텐데, 왜 왕의 옆에 있는 거지? 내 물음에 왕이 웃던 것을 멈추고 설명해 주었다.

“테오도르는 신전에서 선물한 성기사야. 어지간히 내가 무서웠던 모양이지. 견제용이라기엔 꽤 요긴하게 쓰고 있지만, 그렇지?”

사람을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치고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나는 그가 성기사라는 것보다 신전에서 왕을 무서워하고 있다는 말이 더 신경 쓰였다.

그러고 보니 아무리 신전과 손을 잡았다고 해도 3왕녀가 어떻게 왕이 된 거지?

“왕실의 귀한 피를 신의 곁으로 보내셨으니, 신전에서 마땅히 보여야 할 예의를 보인 것뿐입니다.”

기사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왕은 형제를 싹 다 죽인 모양이었다. 피를 본 왕이 무슨 짓을 할까 봐 성기사를 옆에 붙여 놓았다는 말 아닌가.

‘아까 진짜 죽을 수도 있었나?’

순간 겁에 질렸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왕이야 왕이니 건들 수 없다고는 해도, 카를라는 그냥 백작 부인이었다.

장수를 노리려면 말부터 쏘라고, 측근부터 제거하는 건 고전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니 신전에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

“아하하하!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나.”

다행히 내 걱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짐은 관대한 편일세. 그냥 물어본 것뿐이야. 신을 섬기겠나, 아니면 신의 품에 안기겠나……. 다들 신을 섬기고 싶다고 해서 들어 준 것뿐.”

왕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뒈질래 아니면 신전에 박힐래. 자기 형제들을 그렇게 처리했다니, 죽인 것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피를 흘리지 않는 건 피를 흘리는 것보다 어려웠다. 그건 정치에 영 흥미가 없는 나도 알았다.

“카를라의 도움이 컸어.”

그녀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는 듯 씩 웃었다.

“테오도르, 당분간 백작 부인을 호위하도록.”

“네?”

“성기사는 신의 가호를 받아 독이 듣지 않는 몸이 되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에게 나를 호위하라는 말인즉슨, 성기사를 내가 부릴 수 있게 빌려주겠다는 말과 같았다. 신전이 왕에게 바친 성기사를 말이다.

이건 그녀가 보여 주는 일종의 호의이자, 경고였다. 어디에서든 너를 지켜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부릴 수 있다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건 평범한 과시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꽤 이례적인 일이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왕은 진심으로 백작을 죽일 생각이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시선을 돌려 테오도르라고 불린 성기사를 바라보았다. 표정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 문득, 이 세상에 제정신인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궁금해졌다.

테오도르는 가슴팍에 손을 얹고,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얼핏 보아도 엄청나게 정중한 몸짓이었다. 이전에 받았던 사과보다 더 멋지고, 근사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님.”

내 인생에서 이렇게 깍듯한 인사를 받아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을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무엇보다 나는 잘생긴 남자에게 면역이 없었다. 그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말을 돌렸다.

“검은 머리가 눈에 띄나요? 저도 검은 머리인데요. 이제부터라도 가발을 써야 할까요? 카를라는 딱히 쓰지 않은 거 같던데.”

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검은 머리와 푸른 눈의 조합은 흔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폐하의 기사가 큼, 음란한, 큼, 장소에 드나든다는 추문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테오도르는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마님의 경우엔…….”

그는 머뭇거리더니 이내 한마디를 더 뱉었다.

“감추기엔 아까운 머리카락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나는 감탄사를 뱉었다. 잘생긴 남자가 말도 잘했다. 기사는 말을 마치자마자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교대하듯 왕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가져가. 그럭저럭 쓸 만하니까.”

“아니, 그래도…… 저분, 그러니까, 저 기사님 의견도 들어 보셔야죠.”

왕의 호의는 이해했으나 그를 저택에 데려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정부를 둔다고 오해하면 어떻게 하나.

백작에게 오해받는 게 싫어서는 아니었다. 그와의 싸움에서 도덕적 우위를 계속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작 부인도 호위를 둘 수 있는 위치였나? 다른 빙의처럼 원작 내용을 꿰뚫고 있으면 좋으련만, 워낙 얇고 내용 없는 책이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카를라에겐 호위 기사가 없었고, 그렇다면 따로 기사를 두지 않는 게 보편적일 터였다.

“테오도르야.”

“네?”

“이름. 저분, 저 기사님 하지 말고 테오도르. 그대가 말을 높일 상대가 아니야.”

“그래도, 테오도르…… 경의 의견도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어색하게 눈치를 보자 왕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나는 얼른 말을 바꿨다. 비위를 맞춰야 앞으로의 삶이 편할 거 같다는 본능적 직감이었다.

“물론, 그냥, 아니 예의상 물어본 거랍니다. 아시잖아요? 훌륭한 기사를 소개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그제야 왕이 눈에서 힘을 풀었다.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목이 그대로 날아갈지도 몰랐다. 아니, 카를라의 몸이니 죽이지는 않겠지만…….

앞으로는 장난으로라도 왕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 게 좋겠다.

“저도 마님이 아니라 카를라라고 불러 주세요, 테오도르 경.”

“영광입니다.”

깍듯한 대답에 오히려 목이 막힐 정도였다. 목을 축이려 찻잔을 들었지만, 바닥에는 찻물이 마른 흔적밖에 없었다.

“이제 자리를 옮기지.”

“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왕이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복도에 서 있던 수십 명의 시종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왕의 바로 뒤에서 본 그 광경은 몸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상황에 압도당한다는 건 이런 것을 말하는 걸까. 테오도르가 등을 가볍게 밀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을 거다.

한 걸음을 움직였을 뿐인데 수많은 시종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옮겼다. 리자도 그 속에 섞여 있었다. 그녀는 내게 말도 붙이지 못했다.

식당으로 가는 복도를 지나다니는 자들은 그 누구랄 것 없이 허리를 숙였다. 왕의 뒤에 서서 맛본 권력은 달콤했다.

화려하게 꾸민 벽과 천장에 눈이 돌아갈 거 같았다. 식당은 그보다 더 화려해서, 나는 내가 어디에 앉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보지 말게.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 않은가.”

왕은 시녀들의 눈을 의식하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 화려한 건 그녀의 취향이 아닌 모양이었다. 최대한 카를라의 말투를 흉내 내려고 애쓰며 말했다.

“전 또, 폐하의 취향이 바뀌셨나 잠시 놀랐지 뭐예요.”

이번에는 그럴듯하게 카를라의 흉내를 냈는지 왕은 웃으며 대꾸했다.

“그대가 없어서 그래. 종종 놀러 와. 선왕의 흔적을 볼 때마다 내 취향을 가장 잘 아는 건 그대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

맙소사.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카를라의 절친한 친구인 왕이 아니었다면 분명 저 사람이 나를 꼬드기고 있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나는 달콤해 보이는 말의 속내를 바로 이해할 만큼 어른이었기에 아주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잘 아는 것도 폐하시죠.”

우리는 마주 보고 공범자의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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