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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4)화 (14/120)
  •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4화

    “이 몸은, 카를라의 것입니다.”

    “나를 우롱할 생각이라면…….”

    왕의 뒤에 있던 기사가 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나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렇다고 말하면 그대로 머리와 몸을 분리해 버릴 거 같았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러니까, 증명할 수 있어요.”

    기사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에 어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왕을 구슬릴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어쨌든 이 몸은 카를라의 몸이 맞으니 신체적 특징을 찾아보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녀를 고문해도 좋다고도. 그러나 내가 입을 여는 것보다 왕이 움직이는 게 빨랐다. 그녀는 내 얼굴을 쥐고 사납게 명령했다.

    “눈 감아.”

    “네?”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좀 더 사나운 목소리였다.

    “눈 감아!”

    그녀의 박력에 밀려 눈을 꽉 감았다. 왕이 다시 명령했다.

    “힘을 빼.”

    고운 손이 부드럽게 내 눈꺼풀 위를 어루만졌다. 아주 천천히, 그녀의 숨이 뺨에 닿았다.

    그녀의 손톱이 내 눈알을 후벼 팔 것같이 매섭게 속눈썹 사이를 훑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눈꺼풀을 더듬었다. 몇 번 더 내 눈을 더듬고 나서야 그녀는 손을 떼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곳에는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또래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눈꺼풀 가장 아래, 속눈썹 사이에 있는 점……. 카를라는 이상한 곳에 점이 있다며 알려 주기를 꺼렸지. 백작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침내, 왕이 물었다.

    “너는…… 너는 누구지? 카를라는 어디에 있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왕은 하, 하고 헛웃음을 뱉었다. 그건 비웃음이라기보다는 자조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카를라를 해쳤나?”

    “정신을 차리니 이 몸이었어요.”

    “믿기 힘들군. 카를라를 다시 불러올 방법은 없는가?”

    “모르겠어요.”

    왕은 내 표정을 주의 깊게 살폈다. 마음 같아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몸이 카를라의 것일 뿐, 나는 그녀의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녀는 몸을 뒤로 젖혀 등을 의자에 기대고 나를 바라보았다. 깊은 한숨을 내쉰 왕은 식어 버린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나는 왕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깊은 슬픔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지금은 그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겠군. 왕을 기만하는 간 큰 얼간이가 아니길 바라네.”

    왕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긴 속눈썹이 그녀의 슬픈 눈동자를 어느 정도 가려 주었다.

    친구를 잃은 여인에게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왕은 금방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그대는 무엇을 할 생각이지?”

    나는 침을 삼켰다.

    “폐하, 저는 카를라의 복수를 하고 싶어요.”

    나는 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왕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 번 두드렸다.

    “복수라…… 어째서?”

    음산한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렸다.

    “카를라의 일기장을 봤어요. 대답이 되었나요?”

    왕은 눈을 휘어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마치 잔뜩 벼려 놓은 칼 같아, 나는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협상하는 방법을 아는 것을 보니 그냥 얼간이는 아닌 모양이군.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저녁을 준비하라 이르겠네.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빌지.”

    나는 그녀의 말에서 백작을 향한 분노를 읽어 냈고, 그녀의 목소리에서 나를 향한 적의가 다소 가라앉은 것을 확인했다.

    왕이 내게 보인 모든 감정은 진심이었을 거다. 아니, 진심이 아니어도 좋았다. 내가 쥘 수 있는 동아줄이라면 썩은 것이라도 쥐어야 했다.

    나는 찻잔을 마저 비우고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영광입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건 언제 어디서든 즐거운 일이다.

    * * *

    나는 기꺼이 왕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종을 시켜 벨에게는 저택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전언을, 리자에게는 좀 더 대기하라는 전언을 보냈다. 내 말을 듣던 왕이 의아하게 물었다.

    “카를라는 하녀를 한 명 이상 데리고 다니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이상하게 보지 않던가?”

    “그중 하나가 낮에는 제 수발을 들고, 밤에는 백작님의 침대를 덥힌답니다. 아주 예뻐서 한 번 인사를 시키고 싶은데, 버릇이 없어 감히 보이기 부끄러워요.”

    왕은 내 비꼼을 흥미롭게 받아들였다.

    “그대도 카를라만큼 못돼 먹었군.”

    왕은 목을 가다듬더니 목소리를 한껏 높여 말했다.

    “짐승이었다면 예쁘게 봐 주기라도 하죠. 어설프게 인간 꼴만 하니 어디 쓸 곳도 없네요.”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건 카를라의 흉내였다. 아주 독특하지는 않았지만, 왕이 쓰는 악센트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카를라를 어설프게 따라 했는지 알아차렸다. 새침하고 도도한 뉘앙스는 언뜻 들으면 비슷할 정도였으나 유심히 들으면 그 차이가 확연했다.

    거기에 돌려 말하는 것 없이 던지는 묵직한 직구란. 왕이 얼마나 카를라를 오래 곁에 두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이 정부를 들였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게 하녀일 줄이야…….”

    못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키득거리며 식은 차를 마저 삼켰다. 머릿속으로 왕이 흉내 낸 카를라의 말투를 몇 번이고 따라 하며 입을 열었다.

    “카를라보다는 제가 덜 못되게 말하는 모양이죠. 어떻게 아신 거예요? 지금까지 아무도 몰랐는데.”

    “외모를 칭찬하면 그 애는 항상 내 속을 긁었지. 제가 예쁘지 않다고 생각해서 입바른 말은 싫어했어.”

    왕은 카를라를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말을 이었다. 그녀가 했던 칭찬을 상기해 냈다. 그녀는 나를 떠본 거였다.

    “하물며 내 도움이라니, 카를라는 그런 말은 죽어도 하지 않을 거야.”

    그녀가 다시 목소리를 높여 카를라의 흉내를 냈다.

    “전하께서는 궁에서 가장 야심이 없으시고요. 뭐, 타국으로 팔려 가시면 싫으셔도 가지셔야 할 테지만요.”

    왕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를 떠본 그 문장은 왕과 카를라만의 암호 같은 거였다. 내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둘만이 공유한 추억은 어딘가 기록하지 않아도 습관처럼 튀어나오기 마련이었으니, 어떻게 하든 들킬 수밖에 없는 거였다.

    이로써 백작가 사람들이 얼마나 카를라에게 관심이 없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속을 긁어 대던지, 덕분에 3왕녀 주제에 왕관을 머리에 쓰고 말았지 뭔가.”

    그녀는 투정 부리듯 말했지만, 그 말속에 그리움이 듬뿍 묻어 있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둘 사이에 말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는 것도. 그러나 나는 짐짓 그런 것은 모르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진실로 믿으세요?”

    “적의 적은 친구인 법이잖나.”

    “맞는 말씀이셔요.”

    우리는 마주 보고 작게 웃었다. 왕은 차를 따르려다가, 주전자가 비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내려놓았다.

    “그깟 시녀에게 정을 붙인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 애는 조금 특별했어. 내게 신전과 손을 잡으라고 조언해 준 것도 카를라야.”

    귀족들의 생활은 어느 정도 알았지만, 이런 깊은 이야기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정치는 쥐약이란 말이야. 나는 눈을 끔뻑였다.

    이런 이야기는 카를라의 일기장에는 전혀 적혀 있지 않아서 생소했다. 다행히 왕은 그 이야기를 길게 이어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카를라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카를라도 그랬을 거예요.”

    “아니, 그것과는 달라. 나는…… 내가 결혼을 조금만 더 반대했더라면…… 아니면 더 일찍 다른 사람을 소개해 주었어도…….”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백작만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불행하지는 않았을 거야.”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리고 왕을 동정했다. 아무리 왕족이어도 친구가 싫다는 결혼을 막아 줄 수는 있지만, 하겠다는 결혼을 억지로 막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았다. 그러니 그녀는 쓸모없는 자책을 하는 셈이었다.

    “그 애는 보는 눈이 없었어.”

    “동감이에요. 이왕이면 잘생긴 쓰레기를 고르지.”

    가감 없는 말에 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바닥이 보이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서, 우리는 기묘한 우정이 성립되는 것을 느꼈다. 왕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게 말했다.

    “그대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나는 허리를 쭉 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계획을 좀 짜 놨는데요…….”

    머릿속에 있던 계획을 늘어놓는 동안, 왕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조금 들뜬 상태로 백작이 가진 재산을 야금야금 빼돌릴 계획을 늘어놓았다.

    어쩌다 보니 리치를 먹여 완전 범죄를 노릴 생각까지 털어놓았다. 정말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지만 그만큼 내 분노가 엄청남을 보여 주려는 생각에 뱉은 말이었다.

    “그러니까, 백작의 정부를 자극해서 백작이 허튼짓하면, 트집을 잡아서 지참금을 빼앗아 오겠다? 그리고 그 돈으로 사업을 벌여서 리치를 사 그에게 먹이겠다는 말인가?”

    “네!”

    “허무맹랑하군.”

    왕이 혀를 찼다.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시무룩해져 있자 왕이 테이블을 다시 두드렸다. 버릇일까? 힐끔 그녀를 쳐다보자 왕이 웃었다.

    “고개를 들어. 카를라는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어.”

    분홍색 혀가 붉은 입술을 핥고 들어갔다.

    “그 허무맹랑한 계획, 내가 도와주지.”

    왕의 눈에 샹들리에의 불빛이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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