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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3)화 (13/120)

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3화

“마님! 왕실에서 초대장이 왔어요!”

“리자, 경박스럽게 뛰지 마.”

리자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귀 뒤로 넘기고 내게 초대장 뭉치를 건넸다. 벨이 날카롭게 지적했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먼저 보지 마. 누가 보냈는지 보여도 티를 내지 마. 그게 사용인의 기본 자세라고.”

“하지만, 나는…….”

벨은 변명하는 리자의 팔뚝을 꼬집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초대장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글자를 읽지 않아도 무엇이 왕실의 초대장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질이 좋은 종이에, 봉랍에는 금가루가 섞여 있었다. 선명하게 찍힌 인장은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정도로 독특했는데, 중앙에는 책이 있고 그 위를 양쪽에서 뻗어 나온 칼과 펜이 교차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왕실의 문장인 거 같았다. 보통은 사자나 독수리를 쓰지 않나, 생각했다가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벨은 눈치 빠르게 내 손 위에 지칼을 올려 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봉랍을 뜯었다. 리자가 내게 바짝 붙으려는 것을 벨이 저지했다.

내용은 지극히 단순했다. 친애하는 카를라, 그리고 시간. 통보나 다름없는 초대에 마른침을 삼켰다.

“……흠.”

카를라는 한때 왕의 시녀로 일한 적이 있었다. 왕은 결혼을 반대한 사람 중 하나였다. 카를라가 집안과 절연을 선언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주었다는 내용을 일기장에서 보았다. 그래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알고 있는데…….

카를라는 결혼 후 왕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러니까 카를라가 남긴 일기에서는 두 사람이 만난 적이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무도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왕도 그럴 것이다.

“마님?”

한참 초대장을 만지기만 하고 다른 반응이 없자, 벨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폐하께서 부르시는구나.”

“어머! 왕궁에 가시나요?”

“그래. 준비하려면 꽤 빠듯하겠어.”

벨과 리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

“수선 준비를 할까요?”

벨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솜씨가 좋았다. 드레스의 소매나 단을 조금씩 고치거나 가짜 보석을 달아 감쪽같이 새로운 옷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었다.

나는 카를라가 그녀에게 종종 보상을 내렸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도 그럴 게, 벨은 자신의 손수건이나 소매 안감에 귀족에 옷에나 사용할 법한 레이스를 달고 있었으니까.

아주 섬세하게 짜인 레이스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이런 세계에서 사람의 노동력이 투입된 물건일수록 값비싸다는 것은 알았다.

카를라가 얼마나 벨을 아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어도 그녀가 벨의 솜씨를 높게 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새로 산 옷이 좋겠어.”

이제 내게는 새로운 드레스가 여러 벌 있다. 요컨대 벨이 볼품없는 드레스를 어떻게든 고쳐 보려고 자수를 놓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리자는 새로 맞춘 드레스를 모두 입어 보고 가장 예쁜 것을 골라야 한다고 우겼다. 벨은 리자가 떠드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리자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에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래, 들떴다. 꾸미는 일에 관심이 없던 나라도 화려한 것을 입고 걸치고 바르니 괜히 마음이 설레었다. 그러면서도 왕족에게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예법서를 달달 외웠다.

전날에는 아예 꿀을 발라 마사지를 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 몸단장을 했다. 콧노래까지 불러서 벨이 놀랄 정도였다.

그러니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는 왕의 질문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처럼 되물었다.

“폐하, 저는 무슨 말씀인지 도통…….”

찻잔은 식어 열기가 전혀 없었다. 손잡이를 쥔 손에 간신히 힘을 주어 찻잔을 떨어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누구냐고 물었다.”

왕의 시선이 싸늘했다. 그녀는 카를라와 크게 나이 차이가 나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달각,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애써 뺨을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카를라입니다, 전하.”

“감히 짐을 우롱하는 건가.”

그녀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나는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새카만 머리의 기사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의 허리춤에는 검이 꽂혀 있었다. 순식간에 나쁜 생각 수십 개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뭘 실수했지, 실수를 만회해야 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눈에 띄는 실수는 없었다. 며칠간 연습한 인사는 완벽했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복종의 대사를 읊을 때까지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왕이 차를 따르던 시녀들을 물릴 때까지도 우리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화기애애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옷이 예쁘다느니, 날씨가 좋다느니 하는 붕 뜬 이야기뿐이었다. 심지어 왕은 내가 아름답다며 칭찬하기까지 했다.

“그대는 더욱 아름다워졌군. 궁에 있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울 거야.”

예의상 하는 칭찬이기는 했지만, 옷이나 장신구에 대한 칭찬이 아닌 외모에 대한 칭찬은 이 몸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나는 겸손한 척 대꾸했다.

“실로 폐하의 공덕이옵니다.”

그래, 왕의 표정이 변한 건 내가 대답한 이후였다. 왕은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일정한 속도로 들려오는 마찰음은 나를 점점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불편한 침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목이 죄어 오는 기분이었다.

차마 왕과 눈을 마주칠 수도 없어 마른침만 삼켰다.

“정말 감쪽같아. 어디서 잘도 구해 왔군.”

왕은 나를 찢어 버릴 것처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이를 뿌득뿌득 갈며 사납게 말했다.

“가서 백작에게 전해라. 네놈이 수도에 발을 디디고 살 수 있는 건, 내가 총애하는 카를라 덕분이라는 걸 똑똑히 알라고 말이다. 감히 내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오만함에 대한 벌을 기다리고 있으라고도!”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나는 덜덜 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의 표정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만이 푸른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녀는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으나, 내 정체까지는 모르는 거 같았다.

아니, 그녀의 몸에 누가 빙의했다고 의심하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 자신조차도 그런 상상을 하지 못했으니까.

다행히 왕은 당장 나를 죽여 버릴 생각은 없는 거 같았다. 그녀는 심지어 카를라를 총애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왕은 아군이었다. 아니, 아군이 될 가능성이 큰 사람이었다. 그녀는 백작을 증오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치마에 붙은 레이스를 꽉 쥐었다 놓았다. 부들거리는 얼굴 근육을 움직여 억지로 입가를 끌어 올렸다.

“카를라는 돌아올 수 없어요, 폐하.”

나는 주사위를 던졌다.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왕은 주먹으로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쳤다.

“테오!”

그녀는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눈 깜빡할 틈도 없이 내 목에 칼이 겨누어졌다. 왕의 뒤에 서 있던 새카만 머리 남자였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저렇게 잘생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가, 반짝이는 칼이 무섭지는 않았다. 앳된 외모의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새파란 눈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멍하니 이 세계에는 파란 눈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다.

“죽였나?”

“아니요.”

나는 턱을 치켜들었다. 목숨을 담보로 걸었다면 겁에 질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목 끝에 닿은 칼은 서늘했고, 남자가 힘을 주면 바로 목을 꿰뚫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제가 카를라예요, 폐하.”

“목을 잘라도 그 혓바닥이 움직일지 궁금하군.”

“어머, 무서워라.”

웃으며 덧붙였다. 손가락 끝이 자꾸만 떨렸다. 조금만 방심하면 입꼬리가 아래로 떨어질 거 같아 억지로 뺨에 힘을 주었다.

“폐하, 검을 내려 주세요. 이 혓바닥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왕이 초대한 여인을, 그것도 즉위 전 아꼈던 시녀를 사사로이 죽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백작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닮은꼴이라는 이유로 멀쩡히 돌려보내려고 한 것을 보면 그랬다.

그녀는 내가 카를라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단칼에 죽이지 않았다. 왕은 섣부르게 행동하지는 않을 거다.

“테오도르.”

왕이 이름을 부르자, 남자가 검을 거두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제야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완전한 독대를 허락해 주세요, 폐하.”

남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는 의미로 그녀의 뒤를 힐끔거렸지만, 왕은 그를 무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테오도르, 침묵의 맹세를.”

“신에게 맹세코, 이곳에서 듣고 본 걸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침묵의 맹세가 뭔지 몰랐으나, 입을 다물겠다는 뜻 같았다. 그러나 그가 어디까지 비밀로 지켜 줄지 모르니 말을 최대한 골라야 한다.

“카를라는 어디에 있지?”

“폐하의 눈앞에 있답니다.”

왕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난 되묻는 걸 싫어한다.”

당장이라도 찻잔을 내던질 것처럼 그녀의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몰려 있었다.

직감적으로 내가 왕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물론 감정의 문제일 뿐, 실제로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곧장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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