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2화
벨이 리자를 끌고 나갔으니 스스로 옷을 갈아입을 수밖에 없었다. 옷을 갈아입기만 했을 뿐인데 중노동을 한 기분이었다. 침대 위를 뒹굴며 머릿속으로 일기장의 내용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친정은 대대로 사제를 배출해 내는 집안이었다. 광증에 가까울 정도로 신실하였고, 역겨울 정도로 교리를 지켰다.
신의 이름으로 서로에 대한 순결을 맹세하기 전, 그녀는 신의와 충직 또한 맹세하였다. 신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예산을 착복하지 않았고, 매주 신전에 기부했으며, 남을 해치지 않았고…….
“빌어먹을 자식.”
백작이 멍청해서, 혹은 리자를 덜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붙여 놓은 게 아니었다. 그 또한 카를라가 리자를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입에서 육두문자가 마구 튀어나왔다. 그래, 카를라였다면 리자를 건들 수 없었을 거다. 충실한 신자인 그녀는 잘못한 하녀에게 적절한 벌을 내릴 순 있어도 질투로 누군가를 해코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물며 그게 자신의 남편이 아끼는 정부라면 더욱 손을 댈 수 없었을 거다. 백작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귀엽고 사랑스러운 하녀가 제 옆에서 조잘거리는 것을 들으며 화를 억눌러야 했겠지. 종잇조각에 눈물을 떨구며 신을 찾았을 거다.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가 솟았다.
백작에겐 안타깝게도 나는 카를라와 달랐다. 나는 멍청할 만큼 사랑에 목을 매지도 않았고, 누가 때리면 가만히 맞고 있을 만큼 착한 위인이 못 되었다.
“이카루스…….”
나는 씹어 먹을 듯 백작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누가 볼까 봐 침대 아래의 종이 뭉치를 꺼낼 수도 없어, 계속 머릿속으로 카를라의 일기를 되뇌었다.
그녀는 사랑에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에, 백작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쓸모없는 시시콜콜한 잡담뿐이었다.
‘그나저나, 백작이랑 같이 밥 먹는 것도 싫은데 잠자리도 해야 하다니…….’
나에겐 다행스럽게도 백작은 꽤 오랫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와 동침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몸을 바로 했다.
“들어가도 되겠소?”
백작이었다. 양반은 못 될 사람이다. 뭐, 귀족이기는 하지만. 실없는 농담을 생각하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엉망인 머리만 대충 빗고는 거만하게 대답했다.
“그러세요.”
한참 늦은 대답이었지만 백작은 방 앞에서 착실하게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분노를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씨근덕거리는 숨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백작은 다짜고짜 나를 힐난했다.
“당신의 심장은 분명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을 거야.”
내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졌다면 백작의 뇌는 가연 물질로 만들어진 게 틀림없었다. 사랑의 불장난으로 뇌가 활활 타 버렸거나 녹아 버렸을 것이다.
거듭 생각하는 건데, 이 멍청한 남자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거는 게 취미인 거 같았다. 그의 가슴팍이 심하게 오르내렸다.
나는 그가 무슨 명분으로 나를 질책하는지 가만히 들어 보기로 했다.
“어린 하녀를 투기하여 손찌검하다니. 끔찍한…….”
듣자 하니 내가 리자를 때린 것 때문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손등을 때릴 때부터 그가 화낼 것을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가소로웠다.
팔짱을 끼고 코웃음을 쳤다.
“건방진 하녀에게 벌을 준 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부러 턱을 들어 올리고 그를 쏘아보았다. 남과 대거리하는 것은 내게 은근한 희열을 주었는데, 그 상대가 나보다 연약한 약자가 아니라 성격 나쁜 백작이라는 점에서 더욱 재미가 있었다.
“그 아이가 백작님의 침대를 덥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제가 백작 부인이랍니다.”
백작은 손을 꽉 말아 쥐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성난 콧김을 뿜던 그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이, 이…… 부끄러움도 모르는 여자 같으니…….”
“어머, 모르고 계셨다니 유감이에요.”
“어울리지도 않는 귀걸이를 탐내서 빼앗다니 부끄러운 줄 아시오.”
그 말에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부끄러움은 내가 느껴야 할 게 아니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앞뒤 보지 않고 뒹구는 두 사람의 몫이었지.
“무슨 귀걸이 말인가요?”
“모르는 척하는 거요?”
“본 적이 없으니까요.”
뻔뻔스럽게 시치미를 떼었다. 내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리자에게 귀걸이를 돌려주었기에 내 수중에는 귀걸이가 없었다. 그녀가 귀걸이를 뺏겼다고 말했든, 아니면 백작이 그저 그렇게 생각할 뿐이든 상관없었다.
“귀걸이가 어디에 있다는 거죠?”
백작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 당신이 빼앗았으니 당신에게 있겠지. 서랍에 숨겨 둔 것 아니오?”
“마음껏 찾아보세요.”
몸을 틀어 백작이 내 화장대를 뒤질 수 있도록 했다. 백작은 사양하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와 서랍을 열어 보았다. 나는 그가 스스로 만든 함정에 뛰어드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몸에 숨겼겠지.”
나는 귀를 뒤로 넘겨 텅 빈 귓불을 보여 주었다. 백작은 차마 내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지켜보겠소.”
“제게 준 수치를 사과하신 다음에 말이죠.”
“오해가 있었나 보군.”
백작은 흥분을 억지로 억누르는 얼굴로 나를 보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짓씹듯 뱉었다.
“제가 왜 귀걸이를 하지 않는지는 아세요?”
분노에 가득 찬 눈을 보며 불쑥 물었다. 내심 그가 조금이라도 카를라의 몸에 대해서 알고 있기를 바랐다.
정부의 작은 귀걸이에 신경을 쓰는 만큼, 카를라에게도 관심이 있었기를. 그러나 그는 무심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안 어울리니까! 그 외에 무슨 이유가 있소?”
“그러게요. 괜히 물었군요.”
나는 대수롭지 않은 척 손을 내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백작은 두말하지 않고 방을 나섰다. 나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벌렁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백작에 대한 짜증이 치솟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를 죽일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늘 습관처럼 하던 생각이었다.
‘부장이 괴롭힐 때마다 인터넷을 얼마나 뒤졌는데.’
역시 가장 쉬운 건 독살이겠지.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을 몰래 섞어 먹여 버리면 사고사로 위장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카를라의 일기장에 뭔가 쓰여 있지 않을까? 문밖에서는 인기척이 조금도 나지 않았다. 침대 아래에 손을 뻗어 숨겨 놓은 일기장을 꺼냈다. 그러나 아무리 훑어보아도 그가 꺼리는 음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 망할 놈은 알레르기 하나 없는지, 가리는 음식도 없었다. 빌어먹을.
내가 알고 있는 독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청산가리, 아편, 비소…… 납 중독으로 죽여 버릴까? 아니. 그건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수은? 구하기 힘들다. 먹이기도 힘들 거다. 독버섯을 구해 먹이는 건 어떨까. 바짝 말려 바구니에 섞어 놓으면 감쪽같을 거다.
아니, 혹시나 다른 사람이 휘말릴 수도 있다. 이 세계엔 CCTV도 없는데 사람을 죽이는 건 꽤 힘든 일이구나.
“하아…….”
나는 일어나 방을 서성였다. 화장대 위에는 사과파이가 통째로 올려져 있었다. 벨이 가져왔다가 그대로 내려놓고 간 거였다.
나는 파이를 아무렇게나 잘라 우적우적 먹기 시작했다. 계피를 듬뿍 넣었는지 혀끝이 알싸했다.
“응? 계피? 시나몬?”
계피는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의 속껍질로 만들어진 향신료였다. 그러나 내가 사는 이 동네는 날씨가 좋을 뿐, 열대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세계 어딘가에 열대 지방이 있다면, 그리고 그곳과 무역을 하고 있다면 리치도 구할 수 있을 거였다. 언젠가 덜 익은 리치를 먹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신문 기사로 얼핏 본 기억이 났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나는 먹던 사과파이를 내려놓았다. 동그랗고 부드러운 리치의 속살이 생각났다. 가볍게 깨물면 달콤하게 으스러지는 흰 과육. 껍질을 까먹어야 하는 번거로운 과일.
고작 그것을 떠올렸는데도 눈알이 핑핑 돌았다. 제 손으로 직접 독을 삼키는 기분은 어떨까. 나는 목을 울려 웃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고작해야 설사나 좀 하겠지.’
실패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고작 과일, 고작 간식을 권한 것뿐일 테니. 나는 손을 불끈 쥐었다. 백작이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을 키워야 했다.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장부를 조작하여 얻은 푼돈과 광산 하나뿐이었다. 지참금을 다시 가져오는 것 외에 다른 방도는 없을까.
어떻게 돈을 번담, 고심하면서 먹던 파이를 마저 해치웠다. 어차피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 *
저택은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녀들은 누구 하나라도 입을 열었다가는 큰일이 날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백작은 굳이 나를 부르거나 식사를 청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러했다.
우리는 서로를 짓밟을 생각으로 가득한 주제에 서로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척 굴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지 못하는 건 리자뿐이었다.
그녀는 내가 백작에게 크게 혼이 났다고 생각하는지, 종종 버릇없는 말을 뱉었다. 벨은 기함했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유치하고 저열한 방식으로 리자를 괴롭혔다.
“차가 떫구나. 다시 끓여 오렴.”
차를 타 오면 적어도 두 번은 퇴짜를 놓고, 티 푸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돌려보냈다가 다시 가져오라고 시키기를 반복했다.
리자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내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여전히 밝고 쾌활했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도 여전했는데, 계단을 올라올 때마다 울리는 요란한 발걸음 소리만큼은 익숙해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