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이혼은 없습니다 10화
백작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는지, 그는 리자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식당을 나섰다. 나 또한 더 말을 섞을 필요는 없었으므로 그와 동시에 방으로 향했다.
“마님, 외출 준비를 할까요?”
“그래.”
벨은 능숙하게 단장을 도왔다. 그녀는 혼자서도 능숙하게 내 옷시중을 들 수 있었다. 머리를 위로 땋아 올리고, 모자를 씌웠다.
그동안 리자에게 부츠 끈을 묶으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매듭을 제대로 묶지 못해 벨이 준비를 마칠 동안 끈을 다섯 번 묶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속이 터질 거 같았다.
백작이 나를 화병으로 죽이기 위해서 그녀를 붙인 걸까, 잠시 생각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머리가 좋은 놈은 아니었다. 그랬으면 얼른 독약을 구해 카를라의 입에 쑤셔 넣었겠지.
“넌 끈 하나도 못 묶는구나.”
그녀의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리자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그 모습이 가련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녀에게 좀 더 폭언을 퍼부었다.
“머리도 나쁘고, 행동도 굼뜨구나. 할 줄 아는 게 있기는 하니?”
결국, 리자는 눈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가볍게 훌쩍이는 소리에 더 이상의 모진 말은 넣어 두기로 했다.
대신 신발 앞코로 그녀의 손을 툭 쳐 내고는 직접 신발 끈을 묶으려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벨이 화들짝 놀라 나를 만류했다.
“마님, 머리가 흐트러지세요.”
그녀는 리자를 밀치고 내 앞에 자리를 잡았다. 다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자 그녀는 능숙하게 신발 끈을 묶었다.
“이 쉬운 일도 제대로 못 하니 갑갑해서, 원.”
리자가 다시 코를 훌쩍였다. 너무 못되게 굴었나,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찾아보면 할 줄 아는 게 있기는 하겠지.”
리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어도 예뻤다.
우느라 붉어진 뺨은 장밋빛이었고, 새근거리는 숨은 새끼 사슴 같았다. 그렁그렁한 눈물은 마치 꽃잎에 맺힌 이슬처럼 그녀를 더욱 가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하니. 얼른 준비하렴.”
“네! 마님!”
그녀는 언제 울었냐는 듯 방긋 웃었다. 그러고는 기운차게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노래를 흥얼거리기까지 했다.
저 정도로 밝게 나오면 오히려 괴롭히는 쪽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기운이 쭉 빠졌다. 저 아가씨의 머리에는 뇌 대신 빵 반죽이 차 있는 게 분명했다. 벨이 슬그머니 일어나 속삭였다.
“정말 리자를 데려갈 생각이세요?”
그녀는 걱정된다는 듯 리자를 힐끔거렸다.
“오늘은 저 애가 필요한 일이 있어서.”
나는 리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목소리를 낮춰 벨에게 지시했다.
“얼마 전에 사 온 귀걸이를 가져오련?”
벨은 금방 서랍 안에서 늘어지는 귀걸이를 찾아 가져왔다. 그것을 귀에 걸고, 옆머리를 조금 빼 감추었다. 가느다란 실처럼 늘어지는 귀걸이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쉽게 숨겨졌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차에 타고 나서도 심장이 두근거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자꾸만 리자의 귓불을 바라보자 눈치가 빠른 벨이 그녀의 옆구리를 찔렀다.
“리자, 귀걸이 빼.”
“왜?”
“너무 눈에 띄잖아.”
리자는 별 의심 없이 귀걸이를 제 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을 모르는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님,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마차 문을 열어 주자, 리자는 뛰어나가듯 먼저 마차 밖으로 나갔다. 나는 마부의 손을 잡고 내려왔다.
리자는 종달새처럼 지저귀기 시작했다. 벨이 남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혀를 찼다.
“마님, 말이 정말 많아요!”
그녀의 치맛자락이 빙글, 호선을 그리며 공중으로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 뒤로 푸른 잔디와 새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화사한 미소가 눈부셨다.
나는 잠시 그녀의 미모에 넋을 놓았다가,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미리 와 있던 부인들이 나를 보자마자 인사를 건넸다.
“카를라! 초대장을 너무 늦게 보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기다리는 동안 설레고 좋았어요.”
우리는 가벼운 안부 인사를 나눈 후, 말을 골랐다. 내가 고른 말은 흰 말이었다. 순하고 좋은 말이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리자가 옆에서 불쑥 말을 걸었다. 벨이 말릴 수도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마님, 저도 말을 타고 싶어요.”
조르는 모양이 퍽 귀여웠다. 그녀는 양손을 모으고 제발요, 하고 덧붙였다. 이 자리가 사교를 위한 모임이 아니었다면 한 번 태워 줄 법했다.
“……카를라, 이 아이는…….”
초대장을 보낸 부인이 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탐탁잖은 얼굴로 내게 눈짓했다. 리자가 멋대로 말을 타고 싶다고 조르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리자.”
최대한 엄하게 리자의 이름을 부르자 벨이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리자는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모양인지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 쳤다.
“요즘 모임을 자주 가지잖아요? 한 명으로는 부족해서 하녀를 하나 더 쓰기로 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가르칠 게 많네요.”
“아아,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요.”
리자는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그 이상 말대꾸를 할 수는 없었는지 얌전해졌다. 말에 올라타 귀걸이를 빼냈다. 그러고는 주변 부인들에게 들릴 정도로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아끼는 물건이니 잃어버리지 않게 잘 보관하고 있으렴.”
리자는 여전히 입을 삐죽거리기는 했으나 내가 내민 귀걸이를 의심 없이 제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그녀가 귀걸이를 얌전히 챙기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말을 몰기 시작했다. 인사를 주고받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진 뒤였다.
말은 아주 순했다. 특별히 고삐를 쥐고 있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숲을 보지 않으려 일부러 저 멀리 있는 하녀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수수한 차림의 벨과 다르게 리자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나무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말을 구경하고 있었다. 모자를 쓰라고 언질을 줘야 했을까, 그녀는 햇살을 받을 때면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기를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벨이 옆에서 울타리에 올라가지 말라며 혼을 내는 게 보였다. 그러나 곧장 다시 울타리에 올라가 말을 구경했다. 울타리 근처에 난 붉은 꽃을 제 귓가에 꽂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러웠다.
“불쌍해…….”
그녀가 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아름다운 만큼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유부남이 아니라도 되었을 텐데.
눈치가 많이 없기는 했지만, 예쁘고 사랑스러우니 카를라의 남편이 아니라 충분히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 거다.
사랑은 마법이 아니었다. 그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다.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자, 단정한 제복 차림으로 말을 타고 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이전의 남자와 같은 제복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찾는 듯 고개를 자꾸만 두리번거렸다.
‘그때 그 사람인가?’
햇빛에 반사되어 머리카락이 갈색인지 금발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가까이 가서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때 그 남자와 또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잘생긴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때였다. 언뜻 마주친 시선에 나와 그 남자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거 같았다.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우리 두 사람을 빗겨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화를 보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 사람이 맞는 거 같아.’
멀리서도 남자가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화사한 웃음에 뺨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본능이 지금은 아니라고 계속 말을 걸었다.
‘일단 지금은 이 자리를 뜨는 게 좋겠어.’
서둘러 말고삐를 잡아당겨 방향을 틀었다. 그는 나를 따라오거나 소리 높여 부르지 않았다. 곁눈질로 힐끔 본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지켜볼 뿐이었다.
한참 말을 몰아 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술렁이는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감쪽같이 사라졌던 사람들이 한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느긋하게 말을 몰던 부인들은 서로 섞여 아무렇지도 않게 담소를 나누었다.
그사이에 끼여 적당히 말을 주고받았다. 날씨가 좋다든가, 어느 지방의 포도가 잘 여물었다든가, 하는 신변잡기의 이야기였다.
“어머나, 카를라, 귀걸이는요?”
먼저 출발했던 부인 하나가 내 빈 귓불을 지적했다. 그녀는 내가 리자에게 귀걸이를 맡긴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녀에게 맡겨 놓았어요. 말을 타다가 떨어트리기라도 할까 봐요.”
눈짓으로 등 뒤의 리자를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빠르게 덧붙였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항상 신세만 지는군요.”
“그런 말 할 거 없어요. 우리는 우정을 나눈 사이잖아요. 어머, 그러고 보니 귓불이 좀 부었네요.”
그녀의 말에 나는 내 귓불을 만져 보았다. 귓불이 도톰하게 부풀어 있었다. 조금 따가운 거 같기도 했다.
아, 카를라는 알레르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뜨끈함에 입맛이 썼다.
백작은 카를라에게 알레르기가 있는 걸 알고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그건 카를라가 낡은 진주 귀걸이 두 점밖에 없는 것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었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는 부인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말 머리를 돌렸다. 울타리에 매달려 있던 리자를 데리고 벨이 이쪽을 향해 오기 시작했다.
“오셨어요, 마님.”
리자가 다가와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내가 제 불륜 상대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마님, 너무 심심해서 여기에 말이 얼마나 있는지 세어 봤는데요, 제 눈에 보인 것만 무려 서른 마리가 넘어요!”
“리자!”
벨이 기겁하며 리자를 말렸다. 저택에서는 다소 예의 없는 짓을 하더라도 묵인해 줄 수 있지만, 밖에서 이런 행동을 하면 주인의 품위에도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벨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대꾸하고 말았다. 리자의 말은 지빠귀가 지저귀는 것처럼 리듬감이 있어, 마치 노래하는 거 같았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내가 대꾸하자 신이 나서 더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흰 말은 열 마리나 있고요. 줄무늬가 있는 말은 세 마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리자에게 쏠렸다. 나는 그녀의 말이 길어지기 전에 손을 내밀었다.
“귀걸이나 돌려주렴.”
리자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녀의 손에서 내 귀걸이가 나왔다. 그것을 받아 들었다가, 이내 이리저리 비춰 보고는…… 다시 리자에게 돌려주었다.
“이건 내 게 아니구나.”
머릿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던 시나리오의 첫 대사를 뱉었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